책은 왜 읽는가? 아니, 왜 읽어야 하는가? 茶山선생, 星湖선생을 포함하는 수없이 많은 우리의 선인들이나 서구의 많은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책읽기에 대한 수다한 단상들과 독서기에서 논의되어 온 탁월한 독서법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이야기 했으므로, 이번에는 나의 개인 경험을 통해 책읽기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보기로 하겠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첫째, 도덕적인 인간이 되고자 함이다. 책읽기는 당장의 물질적 풍요 같은 보상으로 이어지는 행위가 아니다. 또한 책읽기 자체는 운동이나 기타 활동처럼 신체의 변화를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책읽기는 가시적인 결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아서 현대처럼 어떤 활동 뒤의 보상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시대에는 별로 득이 될 것이 없는, 어쩌면 공허한 행위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책을 읽어야 할 당위성이 있다면, 나의 경우처럼, 책읽기는 언제든 버려도 되는 덕목으로 전락한 도덕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실존적 몸부림이라는 것에서 찾고 싶다. 옛 조선의 선비들이 도덕과 원칙을 준수하고 올바른 삶을 살고자 했던 나날의 지침이 바로 책읽기였음을 상기해보면, 세상이 인간성의 타락으로 인한 도덕성의 해이(解弛)나 폭력 또는 이념이 득세하는 시공간으로 치달릴수록 책읽기는 나의 정신을 단련시켜 오로지 도덕적으로 살고자하는 결의를 더욱 굳게 해주는 적극적인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뉴스를 보기가 절망적일 만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도덕적 타락상이 극에 달한 지금, 옛 선비들의 맑고 청빈했던 정신세계를 그들이 읽었던 경전 또는 그들이 남긴 책들을 통해 추체험 하는 행동은 비록 금전적인 부유함을 약속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무한 욕망을 누르고 진정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지침은 될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내가 책을 고르고 읽는 기준은 무엇보다도 나의 도덕성을 굳건히 지키고 시류(時流)의 잘못된 흐름에서 멀리 벗어나 청명한 정신의 탑을 쌓는데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에 국한된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둘째, 인간이 분류해 놓은 학문 분야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위해서다. 이것은 대단히 실용적인 목적의 책읽기 이지만,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는 방법으로 책읽기보다 용이한 행동이 또 있는가? 내 전공은 영어영문학인데, 문학만으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부분적인 이해만이 가능할 뿐 더 깊은 인식에는 도달하기가 불가능하므로 다양한 분야의 책읽기는 필수적이다. 따라서 내 책읽기의 범위는 먼저 문학을 포함하는 인문과학 전반과 사회과학, 생물학을 포함하는 자연과학의 일부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분야에 걸쳐 있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될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하나의 전공에만 몰두하고 그 밖의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동향도 모르는 채 지내기에는 인간 뇌의 대부분이 활용되지 못함이 안타깝다. 죽기 직전까지 인간의 뇌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며 그렇게 인식의 폭을 넓혀가는 것인데, 알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두려움도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는가? 고대나 중세처럼 책의 소유나 읽기가 왕족을 포함하는 소수 특권계층의 전유물이었고 따라서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무기로 소수가 권력과 대중 지배력마저 독점했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책읽기가 특권도 아니고 그저 대중적인 선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책이 안 팔리고 읽히지도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식과 정보가 대중화되었어도 내게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 호기심마저 없다면 나는 여전히 정보와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의 지배를 받기가 쉽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책읽기를 소홀히 하여 잘못되고 왜곡된 지식과 정보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 누구라도 거짓과 비도덕, 또는 폭력과 욕망의 희생자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해볼 때 책읽기는 나의 지적 성장과 더불어 나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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