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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ㅣ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제야는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걸 좋아했다. 백일장에 나가면 종종 상을 탔을 만큼 재능도 있었다. 선생님이 시켜서 초등학교 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를 더 이상 검사를 하지 않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썼고, 여러 일이 있어서 많이 쓰든 아무 일이 없어서 날짜만 쓰든 매일같이 기록했다.
하지만 2008년 7월 14일 이후로는 일기를 쓰지 못했다. 일기만 쓰지 못한 게 아니었다. 사촌동생 승호와 도서관에 다니며 서로 책을 돌려볼 만큼 좋아했던 책도 읽지 못했고, 학교에도 나가지 못했으며, 무조건 자기 편이 되어줄 동생 제니와 승호마저 보고 싶지 않아졌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 중에 좀 짧은 책을 읽으려고 집어 든 책인데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중에 읽을걸, 하는 후회를 했다. 얼마 전에 읽은 장편 소설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는데 이 소설 역시 같은 소재가 주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당숙이라는 자의 더럽고 파렴치한 행동에 상처를 받은 고등학생 소녀 제야가 주인공이었다. 같은 성별의 10대 아이가 강간당한 내용에다 우리나라 작가의 소설이라 더욱 감정이 이입되어 괴로워하며 읽었다.
판형이 작고 글자가 커서 마음만 먹으면 금세 읽을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제야는 가상의 캐릭터였지만 그녀가 겪은 고통은 뉴스에서도 볼 수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마음에 남은 상흔을 대변하는 글이라 생각하니 도무지 소설로만 볼 수 없었다.
소설은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2008년 7월 14일의 짧고 강렬한 일기를 시작으로 보름여가 지난 28일에 과거를 회상하는 일기가 이어졌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각각의 사건이 있었던 일기를 보여줬고, 7월 14일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혀진 후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제야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졌다.
제야는 착하고 어른스러웠으며 동생 제니와 사촌동생 승호를 살갑게 챙기는 다정한 아이였다. 제야와 승호가 각각 백일장과 사생대회에 나갈 때 참가하지 않은 제니를 데리고 다녔고, 그들끼리만 생일파티를 하며 어른들 몰래 집에 있던 맥주를 마셨던 추억도 있었다. 늘 붙어 다니며 곁에 없을 땐 서로를 찾아다니는 셋은 자매지간, 사촌지간이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 사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서로의 편이 되어줄 것 같은 그런 돈독한 관계였다.
이렇게 평화로운 10대 아이들의 모습만 봤으면 좋았겠지만, 당연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제야와 제니가 길을 가다가 교회 앞에서 마주친 당숙이라는 자가 등장했을 때부터 불안한 기운을 단번에 느꼈고, 백일장에서 만난 초등학교 때 친구가 갑자기 사라진 다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불안함은 확신이 되었다. 당숙은 제야와 제니에게 다정하게 대하며 제야에게 졸업 선물이라고 핸드폰을 사주기도 하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내내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건은 일어나고야 말았는데, 문제는 그 이후에 제야에게 보인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신고하겠다는 엄마는 제야의 미래를 생각해서 말렸지만, 그 말조차 제야에겐 놀라울 만큼 상처가 됐다. 경찰서 사람들의 응대는 더욱 가관이라 입안에 욕설만 맴돌았다. 그리고 신고를 받고 온 당숙 새끼는 전형적인 대사를 날리며 분노하게 만들었고, 마을 사람들의 반응 또한 울화가 치밀었다.
피해자는 제야인데 사람들은 제야에게만 뭐라고 하고 있었다. 제야가 발랑 까진 아이가 아닌 공부도 잘하고 착실한 아이였는데 순식간에 남자를 유혹한 10대 계집애가 되어있었다. 그러면서 당숙한테는 남자가 술을 마시면 그럴 수도 있지, 같은 개 짖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그를 두둔했다.
이런 과정을 글로 읽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은 무슨 감정이 들지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제야가 다 죽이고 싶다고, 나중엔 과도를 가방에 넣어 다니는 심정이 왠지 이해가 됐다. 당숙 새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들을 겪으면서 제야가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걱정했다. 죽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내기도 해서 불안했다.
제니와 승호를 보는 것조차 힘겨워했던 제야는 다행히 강릉 이모에게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감정이 요동친 제야가 못할 말을 하는데도 꾹 참아준 제니가 있어서, 때로 폭력을 써가면서 대신 화를 내주고 어떤 날에는 택시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와준 승호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덕분에 제야가 안고 살아가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괜찮아질 거라는 상투적인 말보다 너의 잘못이 절대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당숙 같은 놈들이 제발 좀 부끄러운 줄 알고 살 수 있도록 이마에 낙인이라도 찍었으면 좋겠다.(화가 나서 뒷골 댕긴다...)
‘끔찍한‘까지 쓰고, ‘끔찍하다‘가 무슨 뜻이더라 생각했다. 무슨 뜻이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끔찍한‘이란 글자를 백배 천배 부풀리고 진하게 두껍게, 종이가 찢어질 만큼 칠해도 그때의 감정을 다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 P13
눈을 감았다. 죽은 것 같았다. 오래전에 죽은 시체 같았다. 죽었는데 왜 계속 생각하지? 죽었는데 왜 계속 무섭지? 죽었는데 왜 죽을 것 같지? - P107
진짜 그런 일 겪은 애들은 이렇게 경찰서까지 찾아오지도 못해. 혼자 병원 갈 엄두도 못 내. 아무것도 못하고 방에만 처박혀 있다가 미쳐버리고 말지 학생처럼 이렇게는 못해. 제야는 생각했다. 방에만 처박혀 있다가 미쳐버리는 자기를. 다들 그럴 거라고 생각해도, 그게 피해자다운 거라고 해도, 제야는 그럴 수 없었다. 미치고 싶지 않았다. 안전해지고 싶었다. 제야는 눈물을 닦았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야는 강해지고 싶었다. - P116.117
찢을 수 없다. 찢으면 안 된다. 찢어버리면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은 중요하다. 아름다운 과거보다 중요하다. 더 나은 미래보다 중요하다. 지금 나는 살아 있다. 그러니 다음이 있다. 내게도 다음이 있을 것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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