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투 파라다이스 1~2 세트 - 전2권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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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미국 자유주.

자유 미국의 창립자의 손자인 데이비드 빙엄은 동생들과는 다르게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결혼도 아직 소식이 없다. 그가 그렇게 지내는 이유는 과거에 앓았던 병으로 인해 할아버지가 데이비드를 특별히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데이비드에게 중매가 들어왔다. 사별한 무역업자 찰스 그리피스였다. 데이비드보다 13살 정도 많은 남자였지만 할아버지의 변호사가 소개해 준 사람이고, 동생들 역시 변호사의 소개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데이비드는 일단 찰스를 만났다. 찰스는 데이비드를 마음에 들어 했고, 데이비드 역시 그가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러다 데이비드는 오래전부터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고아원에서 음악 선생으로 온 식민지 출신의 에드워드 비숍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1993년 뉴욕.

법률 보조원 데이비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찰스 이든의 연인으로 그의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데이비드는 금발 백인에 부자인 찰스가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자신은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하와이 출신의 젊은 남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내는 와중에 찰스의 집에서 찰스의 친구를 위한 파티가 열린다. 찰스와 모든 처음을 함께하기도 했던 남자였다.


2093년 미국 8구역.

찰리는 어릴 적 앓은 전염병으로 인해 불임이 되었고 약간의 감정적 결함이 생겼다. 찰리가 아기였을 때부터 홀로 그녀를 보살펴 준 할아버지는 결혼 중매소를 통해 손녀에게 짝을 찾아주었다. 가족 모두 처형 당한 에드워드였다. 그 역시 불임이었기에 이 결혼이 성사되었고,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에드워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 줄 거라고 약속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처형되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찰리는 늘 할아버지를 그리워하고는 있지만 할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슬픔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실험실에서 일하는 찰리는 어느 날 연구원들이 분주하고 어수선하면서도 소곤대는 분위기를 느낀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전염병이 흘러들어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와 동시에 찰리는 우연히 데이비드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소설은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1893년부터 1993년, 2093년까지 100년의 기간을 두고 워싱턴 스퀘어라는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모두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데이비드, 찰리, 찰스, 에드워드 등 그들은 모두 환생이라도 하듯 그곳에서 100년마다 나타나 비슷하면서도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지게 했다.

1893년의 데이비드는 아팠던 과거로 인해 세상과 조금은 단절된 듯 보였다. 당시에는 파티 같은 사교 행사가 많았을 때라 데이비드의 두문불출을 포장하는 데 애를 써야 했을 터였다. 처음에는 정말로 아픈 것인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잘못된 사랑에 빠졌다가 배신을 당하고서 좌절해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할아버지는 데이비드가 맏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결혼을 시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 데이비드에게 두 남자가 나타났다. 중매로 소개받은 찰스와 우연히 만난 에드워드였다. 찰스는 평범한 40대 남자라 특별할 게 없었지만 데이비드를 좋아한다는 게 보였고, 집안이나 사업 등 그에 대해서 명명백백하게 알아봤기에 어느 정도 보장된 사람이었다. 반면에 에드워드는 잘생긴 외모의 백인, 식민지 출신이라는 점 외에 알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었다.

20대 초반의 데이비드가 관심을 보인 사람은 당연히 에드워드였다. 그와 함께라면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도련님으로 살아가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1993년의 데이비드의 상황은 1893년과 다르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앞선 이야기 속에서 미국은 자유주와 식민지가 나뉘어 있었고, 그 시대임에도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이었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었다. 또한 1993년은 분명히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에이즈로 보이는 병에 걸린 친구를 위해 찰스가 마지막 파티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있을 법한 이야기로 보였다.

해당 파트 후반에는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데이비드의 아버지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앞선 1893년 파트의 이야기와 비슷한 결이 있다는 걸 파악했다.


그리고 가장 긴 이야기였던 2093년은 지구 온난화와 여러 번의 전염병으로 국가를 봉쇄한 미국이 배경이었다. 냉각복이라 불리는 슈트를 입지 않으면 밖에 나갈 수조차 없는 더위가 우리의 미래를 보는 듯해서 두려웠다. 여기에 전염병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를 봉쇄 이후 국민 통제로 이어진 건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리게 했다. 현실적이라서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지는 설정이었다.

3세기에 거친 이야기 속의 여러 데이비드, 찰리, 찰스, 에드워드 등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삶을 살았던 게 인상적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거나 버림받았던 대신 할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은 늘 낙원을 향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끝이 난다는 게 묘했다. 1893년의 데이비드는 후반부에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할아버지를 저버리는 선택을 해서 그가 추구한 낙원은 그가 그 무엇보다 바라는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 1993년의 아버지 데이비드의 그야말로 낙원은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2093년의 낙원을 향한 바람은 너무나 애틋한 사랑이라 뭉클한 여운을 남겼다.


오랜 시간 동안 독서를 취미로 삼은 나를 가장 심하게 울린 <리틀 라이프>의 저자 한야 야나기하라의 신작 <투 파라다이스>는 대체 역사소설로 3세기에 걸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동성애와 차별과 전염병, 환경 문제에 이어 미래의 디스토피아까지 굉장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처음엔 이런 방식이 낯설었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마치 세 권의 책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어 신선했다.

파트 2의 이야기는 취향과 조금 맞지 않았지만 나머지 두 이야기는 굉장한 흡입력이 있어서 마지막까지 흥미로웠다.

그 남자의 질문에 함축된 대답은 디스토피아는 어떤 것과 비슷해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거야. 사실 디스토피아는 그 어디와도 비슷할 수 있어. 2권 - P396

"자기가 선택한 사람에게 속하면서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속하고자 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어떨 것 같아? 데이비드, 이런 사람이 당신일 수 있잖아? 이게 진짜 당신일 수는 없어?" 1권 - P172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처벌받기를 바랐다. 내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의 감옥행을 바랐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감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날 떠났다─할아버지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자기 아이를 버리는 사람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보다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일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비록 그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말이다. 2권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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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종말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3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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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   '나'는 평등 행진에서 강을 만났다. 무성애자인 나는 강에게만큼은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강과 함께라면 어느 곳에라도 행진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강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강을 모르던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

무르무란   사냥 실력이 워낙 출중한 검은깃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기를 가졌다가 떠나보내고 말았다. 검은깃털은 사라진 아기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깃털은 다시 아기를 갖게 되면서 후대를 위해 벽에 그림을 그리는 부족의 의식을 하게 된다.


개벽   건강이 안 좋아진 윤 씨는 같이 등산을 하던 한 씨에게서 외계인을 믿는 개벽교에 대해 듣게 된다. 외계인이 지구를 평평하게 창조해 한쪽에는 평범한 인간들이 살고 반대편에는 외계인의 발전된 문명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윤 씨는 한 씨에게서 비싼 숯을 먹으면 좋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따라갔다가 개벽교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작은 종말   상의 동생은 혼자 아기를 낳아 키우며 일까지 하느라 버겁다. 그래서 그녀는 몸을 기계로 바꾸는 트랜지션을 받으려 하는데, 상이 아무리 반대를 해도 듣지 않는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과 연락이 끊긴 걸 알게 된 상은 그녀와 아기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다닌다.


은둔자의 영혼   마을 가장자리에서 최소한의 삶을 살던 남자는 은둔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가끔씩 함께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말을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건지, 아예 말을 못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던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어떤 여자를 떠올리게 된다.

통역   시간과 차원을 넘어 이동하며 유휴 자원을 에너지로 전환해 사용하는 외계인들이 지구에 터를 잡고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외계인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고자 그들의 언어를 배워 통역사로 일하고 있다. 나는 지구인 공장 사장의 귀신을 에너지로 전환시켜버린 외계인 '그'의 통역을 맡는다.


증언   평생 휠체어 신세를 졌던 완은 최근 들어 잠을 잘 못 자는 증상이 나타났다. 손녀 민이 가상현실 시뮬레이션 치료를 권유해서 받게 된 완은 자신의 경험이 아닌 장면을 생생하게 보게 된다. 역사 속에서 누군가가 겪었을 그 일은 매번 완이 다리와 허리를 다치고, 겁에 질려 쳐다보는 다른 아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도서관 물귀신   국가에서 도서관 운영 지원을 중단하기 시작한 이후로 서울에 두 곳, 제주도에 한 곳만 남고 죄다 사라졌다. 사서 김 선생이 일하는 도서관도 3개월 후면 폐관될 예정이다. 그런 도서관에 갑자기 물귀신이 나타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낙인   인공지능 타투 기계가 세상에 등장했다. 타투이스트들은 제거제를 사용하면 타투를 지울 수 있다는 인공지능 기계를 구입해 자신의 팔에 시험을 해본다. 그런데 제거제를 사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살이 타고 녹기 시작한다.

행진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도시에 군인들이 들어온 이후에 시작된 일이었다. 남은 가족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 사라졌던 가족이 다시 돌아와 죽거나 영혼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뒤에 언니와 살고 있는 '나'는 친구와 함께 거리로 나가 행진을 할 계획을 세운다.






열 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표제작인 <작은 종말>이었다.

군인이었다가 사고를 당해 제대를 한 후에 이런저런 일을 하며 살아가는 상이 여동생 세류가 정자은행을 이용해 아기를 낳아 키우겠다고 선언했었고, 현재에는 아기를 더 잘 키우기 위해 신체를 기계로 바꾸는 '트랜지션'을 하게 된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처음에 세류가 몸을 기계로 바꾸겠다고 상에게 통보했을 때 대체 왜 그런 걸 하려고 하나 의아했었다. 그런 상에게 세류는 기계 신체를 가지고 있으면 혼자 아기를 키우며 생계를 잇는 일이 고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하루에 몇 가지의 일을 해도, 집으로 돌아와 아기를 돌봐도 힘들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상은 조금 더 고민해 보라는 말을 남겼지만 세류는 결국 뜻대로 했다.

사건은 이후부터 일어났다. 세류가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인데, 의문스럽게도 핸드폰을 사용하려고 하니 기계에서 '성단연방연합 소속 사절단'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세류를 직접 찾아가려고 밖을 나왔을 때는 자율주행차 안에 갇힌 나이 든 여성을 마주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편의를 주는 모든 기계들이 외계 사절단에게 잠식되어 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최근에 신체를 기계로 바꾼 사람들까지 모두 그들에게 흡수되어버렸다.

<작은 종말>은 영화 <터미네이터>와 같은 섬뜩한 느낌을 주는 내용이었는데, 마지막엔 인간다움, 휴머니즘이란 뭔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어서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도서관 물귀신>은 굉장히 아쉽고도 슬픈 내용이었다. 도서관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장서까지 폐기시키는 건 너무 화가 났다. 후반에 김 선생이 우는 게 이해가 됐을 정도였다. 그렇게 위기를 맞이한 책들과 도서관은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끝이 났다.

<증언>과 <행진>은 인간 중심의 이야기였지만, 그 배경에는 저항할 수 없는 권력이 있었기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단편들 중에서 <개벽>은 현실적인 느낌이 들어 웃음을 짓게 했다.


정보라 작가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만나 즐거운 독서였다. 짧고 굵게 끝내는 이야기가 있었던 반면에 보다 긴 이야기로 이어졌으면 하는 내용도 있어서 매력적이었다.

상은 피를 쏟고 살을 자르면서까지 건조한 하나의 번호나 하나의 색깔이나 초라한 한 단어로 규정되는 법적이고 행정적인 어느 한 분류에 자신을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상은 자르고 맞추고 꿰매어 만들 수 있는 재료나 물건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인간이고 싶었다.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고립된 인간이라도 좋으니 자기 자신으로서 인간이고 싶었다. <작은 종말> - P133

"오래된 일이라고 해서 역사를 잊어도 되는 건 아니지요. 오히려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시간은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잊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고 다시 이야기해야 되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증언>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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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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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였던 이해미는 지금은 일을 그만두고 잠깐 동안 백수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서울 곳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전시회에 자주 발을 들여놓게 됐는데 우연히 우재를 만나게 됐다. 대학 시절 짝사랑했던 사람이었고, 우재 역시 자신에게 마음이 있을 거라 예감하고 있었지만, 연인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던 관계였다.

그때의 재회 이후 해미와 우재는 종종 만나 밥을 먹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문자와 전화로 연락을 하게 됐다. 딱히 사귀는 사이라고 규정하기엔 애매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우재와 여러 대화를 나누던 해미는 문득 13살 때부터 15살 때까지 독일에서 살았던 얘기를 하게 됐다. 가족에게 갑작스레 닥친 비극으로 부모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져 엄마는 신학 공부를 위해 엄마의 언니, 즉 해미의 이모가 있는 독일로 가기로 했다. 해미와 동생 해나를 데리고서 말이다. 아빠는 부산으로 직장을 옮겨 혼자 생활하게 되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독일에서 이모를 만난 해미는 이모의 존재만으로 위안을 얻었고, 이모가 소개해 준 또래 친구 레나, 한수를 만나 가까워진다. 한수의 엄마인 선자 이모가 병에 걸려 삶이 얼마 남지 않게 되어 한수는 엄마의 첫사랑인 K.H.를 찾아 마지막으로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낸다. 그래서 레나와 한수, 해미는 여러 이모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는 일에 집중한다.




소설의 시작은 마치 연애소설과도 같았다.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알게 되어 가깝게 지냈고 연애 감정이 있었지만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우재와 10여 년 만에 우연히 재회를 했다. 막 성인이 된 20대 초반의 서툰 어른이 아니라 30대의 원숙한 성인이었기에 그들의 관계는 여유롭고도 따뜻하게 이어져 나갔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매일 연락을 하고, 제주도에 내려가 약국을 개업한 우재가 서울에 경조사가 있다며 자주 올라와 만나는 그런 관계였다.


그러다 우재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해미 역시 오래전에 묻어둔,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해미는 세 자매였는데 모범생인 언니가 학교에 있었을 시간에 무슨 일로 밖에 있다가 가스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그 사고가 가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엄마와 아빠는 매일 싸웠고, 해미는 부모님을 생각해 언니를 잃은 고통을 표현하지 않았다. 동생 해나는 아직 어려서 큰언니를 잃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해 마냥 해맑았다. 그러다 신학 공부를 하러 독일로 간다는 엄마를 해미, 해나가 따라가면서 가족은 흩어지고 말았다.

언니를 잃은 상실감, 아빠와 헤어진 슬픔, 거기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독일에서의 생활에 위로가 되어준 건 이모 덕분이었다. 파독간호사로 독일에 와서 의사 면허까지 딴 이모는 공허에서 비롯된 외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어릴 때 낯선 땅에 와서 적응하며 열심히 일했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살았으니 해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이모 덕분에 파독간호사 동료들의 자식인 레나, 한수를 소개받고 가까워졌다.

그렇게 가까워진 세 사람은 한수의 엄마인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찾기 위해 그녀가 오랫동안 쓴 일기를 꼼꼼하게 읽어가며 메모를 하고, 선자 이모의 동료였던 이모들에게는 해미가 연애소설을 쓴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전에 한국에서 만났던 사람, 그것도 K.H.라는 이니셜 외에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는 이를 독일에서 찾는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때 해미와 친구들은 10대 중반의 아이들이었으니 어른보다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다 외환 위기로 엄마와 해미, 해나가 갑작스레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직후엔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가 여전히 지속되었지만, 한국에서 적응하기도 어려운 상황과 답을 찾지 못하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레나, 한수와의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때의 기억이 우재와의 관계가 이어지면서 떠오른 것이었다. 선자 이모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시절의 부채감, 그리고 해미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거짓말로 인한 죄책감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래서 해미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시에 해미의 가슴에 응어리진 감정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의 어떤 사건을 연상시키는 가스 폭발 사고가 등장했을 때 깜짝 놀랐다. 이후 해미가 독일로 간 부분에서 파독간호사 소재까지 이어지는 것을 읽고 다시 한번 놀랐다. 아무런 정보 없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소설에 등장한 소재 덕분에 독일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말에 K.H.의 정체가 밝혀진 부분에서 가장 크게 놀랐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정체로 인해 몇 해 전에 인상적으로 본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늦게라도 전하고자 했던 인사, 그리고 덕분에 해미가 스스로에게도 위로를 남기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결말이 참 좋았다.

나는 어른들의 사정을 다 알았지만 어른들은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오히려 너무 많은 상상을 멈출 수 없고 그래서 괴롭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

(……중략)

일주일만 지나면 해가 바뀌고 나는 언니와 동갑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일 년 후부터는 내가 언니의 언니가 될 것이었다. 언니가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나 혼자 살게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지만 그 역시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물론 해나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나에게는 거짓말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 P50

나에게는 언니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기회가 더이상 없는데 한수에게는 남아 있다는 사실에 불쑥 화가 났다. 너무 불공평해. 불현듯 나는 줄곧 내가 그렇게 생각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자 한없이 서글퍼졌다. 열네 살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는 대신 다른 사람도 적어도 나만큼은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간이 나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 P66

이모의 손길이 닿자, 나는 오래전 이모의 집 거실에 서 있던 어린아이가 되어 이십 년이 훨씬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전히 언니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 때가 있다고. 상실 이후 시간이 때때로 선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쳇바퀴를 돌듯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 P227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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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폴리 지음, 백지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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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로 시작했다가 잡지까지 론칭하게 된 줄스와 서바이벌 TV 프로그램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윌이 아일랜드의 한 섬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셀러브리티 커플의 만남이니 만큼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들만 이 섬에 들어올 수 있었다. 예비부부는 섬에 먼저 와서 준비를 하는 와중에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만 하면 뜨겁게 불이 붙는다.

줄스의 신부 들러리이면서 이부동생인 올리비아는 여러 문제로 복잡하다. 그런 동생을 보는 줄스는 대체 뭐가 문제냐고 따지고 싶지만 좋은 날을 앞두고 있으니 꾹 참는다. 윌의 친구인 신랑 들러리 조노는 결혼식 때 입을 명품 양복을 집에 두고 왔다고 했다. 아일랜드섬에서 그의 집이 있는 시골까지 갔다 올 수 있는 시간이 안 되어 윌은 자신의 양복을 빌려주기로 한다. 사이즈가 한참 작긴 하지만 말이다.

섬의 주인이자 웨딩플래너인 이파는 남편이자 요리사인 프레디와 함께 결혼식 준비에 한창이다. 그리고 곧이어 신랑 윌의 기숙학교 패거리들, 어렸을 때부터 줄스와 친한 친구라서 결혼식 사회를 보기로 한 찰리는 아내 해나와 섬에 발을 디뎠다.


결혼식 전날부터 묘하게 날이 서 있던 분위기는 결혼식 당일 폭풍이 몰아치는 날씨까지 가세하면서 한층 날카로워졌다. 더구나 야외 결혼식이라 변수가 자꾸만 생겨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그러다 마침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다.




평생 단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아마도 그 한 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는 결혼식이 완벽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는 건 당연하다. 그랬기에 신부인 줄스가 예민해져 있는 게 이해가 됐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잡지사를 소유하고 있었고, 남편으로 맞이할 윌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는 어마어마하게 잘생긴 남자였으니 일단은 그들 예비부부의 외형은 완벽했다. 줄스가 원하는 결혼식 역시 그들과 어울리도록 특별해야만 했다. 그래서 외딴섬에서의 야외 결혼식을 택한 것이었다.

섬의 주인이면서 웨딩 플래너인 이파는 셀러브리티인 줄스와 윌의 결혼식을 멋지게 치러낸다면 앞으로 더 많은 결혼식을 맡을 수 있을 거라 고대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상황을 확인하는 한편으로 예민한 줄스의 마음을 때때로 가라앉히는 역할도 한다.

올리비아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어떤 사연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녀가 줄스의 이부동생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관계로 인해 실연의 슬픔이 오래가는 것처럼 보였다. 조노는 윌과 같은 학교에 다닌 친구 사이였지만, 둘 사이에는 권력의 무게가 한쪽으로 명백히 쏠려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건 윌이 괜찮은 집안 자식인데다가 지금도 잘나가는 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 사이의 어떤 비밀로 인해 이 관계가 기울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해나는 남편 찰리를 따라 이곳에 오긴 했는데, 사실 그녀는 줄스와 친하지 않았다. 찰리와 줄스가 오랜 친구라고는 해도 해나는 그들 사이에 친구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내내 느꼈다.

이렇게 소설은 신부 줄스, 웨딩플래너 이파, 신부 들러리 올리비아, 신랑 들러리 조노, 남편을 따라 하객으로 참석한 해나까지 여러 사람의 시점을 결혼식 전날부터 보여주는 한편으로 때때로 현재 시점인 결혼식 피로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드러냈다. 그래서 시작부터 이 결혼식은 비극이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파국이 어떻게 시작될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처음엔 그저 저마다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줄스는 신부라서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올리비아는 헤어진 남자친구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밝혀지며 큰 충격을 주었다. 해나는 남편 찰리가 줄스와 단순한 친구가 아닐 거라고 내내 의심해왔기에 섬에 도착해서부터 그녀와 붙어서 결혼식 사회 진행에 관한 준비를 하는 걸 보는 게 싫어서 차라리 자리를 피했다. 조노는 기숙학교 출신인 다른 친구들과 달리 좋은 직업도 없고, 잘나가는 게 아니라서 조금은 껄끄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술이나 마약을 찾았던 건지도 몰랐다.

단순히 결혼식을 걱정하는 건 줄스와 이파뿐이었다고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는 걸 드러냈다. 올리비아가 해나에게 과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해나는 세상을 떠난 언니 앨리스를 떠올리게 됐다. 여기까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조노와 친구들이 기숙학교 시절에 학생들이 전통처럼 했던 '생존' 게임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 게임에서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는 걸 예감할 수 있었고 그 실체가 후반에 드러났다.


여러 사람들이 엮이면서 저마다의 문제가 한 사람의 문제로 이어져 역시나 재수 없는 인간은 싹수부터 노랬다는 걸 보여줬다. 그저 싹수가 노란 게 아니라 되먹지 못한 인간이었기에 그렇게 되어 마땅했다. 저지르고 다닌 죄가 워낙 많아서 누구라도 그 인간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었다. 결말에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한편으로 또 다른 죗값을 치르는 걸 보니 역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 된다는 걸 느끼게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줄스의 결혼식이 완전히 망가져서 안타까운 마음이 살짝 들었지만, 이혼보다는 파혼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줄스가 이후에 한 행동은 조금은 의외로 여겨졌고 둘의 관계가 생각보다 괜찮아서 다행이었다.


여러 사람의 시점을 오가며 저마다의 비밀로 향해가다 현재에 빵 터트려 권선징악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구조가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나는 이 예배당 같은 곳에서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래, 이곳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뭔가 비극적인, 살짝 섬뜩하기까지 한 구석이 확실히 있다. - P80

결혼식을 기획한다는 건 이런 거다. 하객이 장단을 맞춰주고 특정한 경계선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걸 잊지만 않으면 나는 완벽한 하루를 꾸릴 수 있다. 그러나 하객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그 뒤탈은 이십사 시간보다 훨씬 오래갈 수도 있다. 그런 유의 후유증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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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 라이어
태넌 존스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시간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레슬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레슬리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세상을 떠났고, 동생 로빈은 10년 전에 가출한 이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곁에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던 레슬리가 그를 간호하고 보살피며 마지막까지 지켰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는 유산 처리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변호사의 말을 들으니 아버지는 레슬리와 로빈이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 절반으로 나눈 유산을 딸들이 갖게 될 거라는 조건이 붙었다.


그래서 레슬리는 어렵게, 어렵게 로빈을 찾았다. '레이철 브릴런드'라는 가명으로 살고 있는 로빈을 찾아 고향으로 직접 데리고 가려고 했던 레슬리는 싸늘한 주검이 된 깡마른 로빈의 시신을 마주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당황한 레슬리는 그대로 도망을 쳐 나왔다. 로빈은 레이철이라는 가명으로 무연고자 묘지에 묻히겠거니 했다.

5만 달러 유산을 어떻게 받아야 하나 고민하던 레슬리 앞에 예쁘게 생긴 메리가 나타났다. 배우 지망생이라고 하는 메리의 머리 색깔을 바꾸면 예뻤던 로빈과 제법 비슷할 것 같아서 레슬리는 그녀에게 제안을 한다. 고향으로 함께 가서 로빈인 척 서류에 사인을 해주고 로빈 몫의 유산을 가지라고 말이다.




아버지 곁에 남아 간호하고 보살핀 레슬리 입장에서 유산 상속 조건은 큰 불만이었을 것 같다. 동생 로빈은 10년 전에 떠나서 돈이 필요할 때에만 연락을 했고, 때로 술이나 마약에 취해서 전화 연락만 했으니 레슬리는 답답하고 화도 났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산 상속 문제로 동생을 찾아냈을 때 이미 죽어버린 시신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거나 통곡을 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걸로 봐서 어쩌면 그런 끝을 예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다 메리를 만나게 된 건 레슬리에게 기회였을 것이다. 10년 전에 가출해서 집에는 돌아오지 않았던 동생의 외모 같은 건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을 터였다. 어릴 때부터 레슬리보다 예뻤던 로빈이었기에 그만큼 예쁜 메리가 로빈과 똑같은 머리 색깔로 바꾼다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예쁜 건 화장이나 헤어스타일로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아버지의 친구이자 유산 상속 변호사는 돌아가신 아버지만큼이나 지긋한 나이였기에 확실히 구분할 수 없다는 데에 가능성을 걸었다.

그렇게 시작된 사기는 처음엔 잘 먹혀 들어가는 듯했다. 레슬리는 집으로 가는 중에 부모와 관련된 정보를 메리에게 알려주었다. 배우 지망생이라 그런지 메리는 로빈인 척 능청스럽게 연기하며 레슬리의 남편 데이브, 아들 일라이를 만났다. 그리고 변호사 또한 마주했는데, 서류 처리 문제로 시간이 좀 미뤄져 가짜 자매의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메리는 레슬리가 왜 그렇게 유산을 원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데이브에게는 일을 그만뒀다고 했지만, 레슬리는 낮에 회사에 갔고 일라이는 어린이집에 맡겼다. 메리는 레슬리를 미행하며 그녀가 왜 낯선 이에게 동생인 척해달라는 부탁까지 한 건지 밝혀내려고 했다. 그러는 와중에 과거 로빈과 묘한 관계가 있었던 낸시를 만나 전적인 사랑을 받는 느낌이 무언지 깨닫게 되었다. 낸시는 메리와의 관계를 로빈과의 재회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레슬리의 비밀을 파헤치는 와중에 가족의 과거, 정확히 말하면 자매의 어머니에 관한 사실이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다. 충분한 단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차례 반전이 드러나며 커다란 충격을 줬고, 결말에서는 또 한 번 놀란 가슴을 움켜쥐게 만들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제목이 이보다 더 내용과 잘 어울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경찰에 연락하지 않으면 로빈 보이트는 이대로 레이철 브릴런드로 남게 된다. 라스베이거스시는 가족 없는 헤로인 중독자 레이철 브릴런드를 알아서 묻어줄 것이다. 열여섯 살 로빈이 선택한 삶의 길 그대로. 고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땅속에 홀로 묻혀 있기를. - P15

순간, 진짜 로빈을 보는 듯했다. 실제보다 완벽한 로빈. 로빈이 또 다른 삶을 살았다면 아마도 저런 모습일 것이다.
어수선한 머릿속으로 흘러든 생각은 또 다른 상상으로 이어졌다. 해결책. 바로 이 난관을 뚫을 방법이었다. - P66.67

어떤 면에서 나는 이미 유령이었다. 죽은 여자의 집에서 죽은 여자의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이따금 레슬리가 나를 보는 표정에서도 그것이 느껴졌다. 그럴 때면 레슬리에게 나는 메리가 아니라, 로빈이었다. - P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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