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작은 종말 ㅣ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3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4년 6월
평점 :
지향 '나'는 평등 행진에서 강을 만났다. 무성애자인 나는 강에게만큼은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강과 함께라면 어느 곳에라도 행진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강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강을 모르던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
무르무란 사냥 실력이 워낙 출중한 검은깃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기를 가졌다가 떠나보내고 말았다. 검은깃털은 사라진 아기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깃털은 다시 아기를 갖게 되면서 후대를 위해 벽에 그림을 그리는 부족의 의식을 하게 된다.
개벽 건강이 안 좋아진 윤 씨는 같이 등산을 하던 한 씨에게서 외계인을 믿는 개벽교에 대해 듣게 된다. 외계인이 지구를 평평하게 창조해 한쪽에는 평범한 인간들이 살고 반대편에는 외계인의 발전된 문명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윤 씨는 한 씨에게서 비싼 숯을 먹으면 좋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따라갔다가 개벽교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작은 종말 상의 동생은 혼자 아기를 낳아 키우며 일까지 하느라 버겁다. 그래서 그녀는 몸을 기계로 바꾸는 트랜지션을 받으려 하는데, 상이 아무리 반대를 해도 듣지 않는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과 연락이 끊긴 걸 알게 된 상은 그녀와 아기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다닌다.
은둔자의 영혼 마을 가장자리에서 최소한의 삶을 살던 남자는 은둔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가끔씩 함께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말을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건지, 아예 말을 못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던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어떤 여자를 떠올리게 된다.
통역 시간과 차원을 넘어 이동하며 유휴 자원을 에너지로 전환해 사용하는 외계인들이 지구에 터를 잡고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외계인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고자 그들의 언어를 배워 통역사로 일하고 있다. 나는 지구인 공장 사장의 귀신을 에너지로 전환시켜버린 외계인 '그'의 통역을 맡는다.
증언 평생 휠체어 신세를 졌던 완은 최근 들어 잠을 잘 못 자는 증상이 나타났다. 손녀 민이 가상현실 시뮬레이션 치료를 권유해서 받게 된 완은 자신의 경험이 아닌 장면을 생생하게 보게 된다. 역사 속에서 누군가가 겪었을 그 일은 매번 완이 다리와 허리를 다치고, 겁에 질려 쳐다보는 다른 아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도서관 물귀신 국가에서 도서관 운영 지원을 중단하기 시작한 이후로 서울에 두 곳, 제주도에 한 곳만 남고 죄다 사라졌다. 사서 김 선생이 일하는 도서관도 3개월 후면 폐관될 예정이다. 그런 도서관에 갑자기 물귀신이 나타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낙인 인공지능 타투 기계가 세상에 등장했다. 타투이스트들은 제거제를 사용하면 타투를 지울 수 있다는 인공지능 기계를 구입해 자신의 팔에 시험을 해본다. 그런데 제거제를 사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살이 타고 녹기 시작한다.
행진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도시에 군인들이 들어온 이후에 시작된 일이었다. 남은 가족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 사라졌던 가족이 다시 돌아와 죽거나 영혼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뒤에 언니와 살고 있는 '나'는 친구와 함께 거리로 나가 행진을 할 계획을 세운다.
열 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표제작인 <작은 종말>이었다.
군인이었다가 사고를 당해 제대를 한 후에 이런저런 일을 하며 살아가는 상이 여동생 세류가 정자은행을 이용해 아기를 낳아 키우겠다고 선언했었고, 현재에는 아기를 더 잘 키우기 위해 신체를 기계로 바꾸는 '트랜지션'을 하게 된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처음에 세류가 몸을 기계로 바꾸겠다고 상에게 통보했을 때 대체 왜 그런 걸 하려고 하나 의아했었다. 그런 상에게 세류는 기계 신체를 가지고 있으면 혼자 아기를 키우며 생계를 잇는 일이 고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하루에 몇 가지의 일을 해도, 집으로 돌아와 아기를 돌봐도 힘들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상은 조금 더 고민해 보라는 말을 남겼지만 세류는 결국 뜻대로 했다.
사건은 이후부터 일어났다. 세류가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인데, 의문스럽게도 핸드폰을 사용하려고 하니 기계에서 '성단연방연합 소속 사절단'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세류를 직접 찾아가려고 밖을 나왔을 때는 자율주행차 안에 갇힌 나이 든 여성을 마주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편의를 주는 모든 기계들이 외계 사절단에게 잠식되어 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최근에 신체를 기계로 바꾼 사람들까지 모두 그들에게 흡수되어버렸다.
<작은 종말>은 영화 <터미네이터>와 같은 섬뜩한 느낌을 주는 내용이었는데, 마지막엔 인간다움, 휴머니즘이란 뭔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어서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도서관 물귀신>은 굉장히 아쉽고도 슬픈 내용이었다. 도서관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장서까지 폐기시키는 건 너무 화가 났다. 후반에 김 선생이 우는 게 이해가 됐을 정도였다. 그렇게 위기를 맞이한 책들과 도서관은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끝이 났다.
<증언>과 <행진>은 인간 중심의 이야기였지만, 그 배경에는 저항할 수 없는 권력이 있었기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단편들 중에서 <개벽>은 현실적인 느낌이 들어 웃음을 짓게 했다.
정보라 작가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만나 즐거운 독서였다. 짧고 굵게 끝내는 이야기가 있었던 반면에 보다 긴 이야기로 이어졌으면 하는 내용도 있어서 매력적이었다.
상은 피를 쏟고 살을 자르면서까지 건조한 하나의 번호나 하나의 색깔이나 초라한 한 단어로 규정되는 법적이고 행정적인 어느 한 분류에 자신을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상은 자르고 맞추고 꿰매어 만들 수 있는 재료나 물건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인간이고 싶었다.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고립된 인간이라도 좋으니 자기 자신으로서 인간이고 싶었다. <작은 종말> - P133
"오래된 일이라고 해서 역사를 잊어도 되는 건 아니지요. 오히려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시간은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잊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고 다시 이야기해야 되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증언> - P2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