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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기자였던 이해미는 지금은 일을 그만두고 잠깐 동안 백수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서울 곳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전시회에 자주 발을 들여놓게 됐는데 우연히 우재를 만나게 됐다. 대학 시절 짝사랑했던 사람이었고, 우재 역시 자신에게 마음이 있을 거라 예감하고 있었지만, 연인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던 관계였다.
그때의 재회 이후 해미와 우재는 종종 만나 밥을 먹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문자와 전화로 연락을 하게 됐다. 딱히 사귀는 사이라고 규정하기엔 애매한 그런 관계였지만 말이다.
우재와 여러 대화를 나누던 해미는 문득 13살 때부터 15살 때까지 독일에서 살았던 얘기를 하게 됐다. 가족에게 갑작스레 닥친 비극으로 부모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져 엄마는 신학 공부를 위해 엄마의 언니, 즉 해미의 이모가 있는 독일로 가기로 했다. 해미와 동생 해나를 데리고서 말이다. 아빠는 부산으로 직장을 옮겨 혼자 생활하게 되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독일에서 이모를 만난 해미는 이모의 존재만으로 위안을 얻었고, 이모가 소개해 준 또래 친구 레나, 한수를 만나 가까워진다. 한수의 엄마인 선자 이모가 병에 걸려 삶이 얼마 남지 않게 되어 한수는 엄마의 첫사랑인 K.H.를 찾아 마지막으로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낸다. 그래서 레나와 한수, 해미는 여러 이모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는 일에 집중한다.
소설의 시작은 마치 연애소설과도 같았다.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알게 되어 가깝게 지냈고 연애 감정이 있었지만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우재와 10여 년 만에 우연히 재회를 했다. 막 성인이 된 20대 초반의 서툰 어른이 아니라 30대의 원숙한 성인이었기에 그들의 관계는 여유롭고도 따뜻하게 이어져 나갔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매일 연락을 하고, 제주도에 내려가 약국을 개업한 우재가 서울에 경조사가 있다며 자주 올라와 만나는 그런 관계였다.
그러다 우재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해미 역시 오래전에 묻어둔,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해미는 세 자매였는데 모범생인 언니가 학교에 있었을 시간에 무슨 일로 밖에 있다가 가스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그 사고가 가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엄마와 아빠는 매일 싸웠고, 해미는 부모님을 생각해 언니를 잃은 고통을 표현하지 않았다. 동생 해나는 아직 어려서 큰언니를 잃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해 마냥 해맑았다. 그러다 신학 공부를 하러 독일로 간다는 엄마를 해미, 해나가 따라가면서 가족은 흩어지고 말았다.
언니를 잃은 상실감, 아빠와 헤어진 슬픔, 거기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독일에서의 생활에 위로가 되어준 건 이모 덕분이었다. 파독간호사로 독일에 와서 의사 면허까지 딴 이모는 공허에서 비롯된 외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어릴 때 낯선 땅에 와서 적응하며 열심히 일했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살았으니 해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이모 덕분에 파독간호사 동료들의 자식인 레나, 한수를 소개받고 가까워졌다.
그렇게 가까워진 세 사람은 한수의 엄마인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찾기 위해 그녀가 오랫동안 쓴 일기를 꼼꼼하게 읽어가며 메모를 하고, 선자 이모의 동료였던 이모들에게는 해미가 연애소설을 쓴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전에 한국에서 만났던 사람, 그것도 K.H.라는 이니셜 외에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는 이를 독일에서 찾는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때 해미와 친구들은 10대 중반의 아이들이었으니 어른보다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다 외환 위기로 엄마와 해미, 해나가 갑작스레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직후엔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가 여전히 지속되었지만, 한국에서 적응하기도 어려운 상황과 답을 찾지 못하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레나, 한수와의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때의 기억이 우재와의 관계가 이어지면서 떠오른 것이었다. 선자 이모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시절의 부채감, 그리고 해미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거짓말로 인한 죄책감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래서 해미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시에 해미의 가슴에 응어리진 감정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의 어떤 사건을 연상시키는 가스 폭발 사고가 등장했을 때 깜짝 놀랐다. 이후 해미가 독일로 간 부분에서 파독간호사 소재까지 이어지는 것을 읽고 다시 한번 놀랐다. 아무런 정보 없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소설에 등장한 소재 덕분에 독일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말에 K.H.의 정체가 밝혀진 부분에서 가장 크게 놀랐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정체로 인해 몇 해 전에 인상적으로 본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늦게라도 전하고자 했던 인사, 그리고 덕분에 해미가 스스로에게도 위로를 남기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결말이 참 좋았다.
나는 어른들의 사정을 다 알았지만 어른들은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오히려 너무 많은 상상을 멈출 수 없고 그래서 괴롭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
(……중략)
일주일만 지나면 해가 바뀌고 나는 언니와 동갑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일 년 후부터는 내가 언니의 언니가 될 것이었다. 언니가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나 혼자 살게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지만 그 역시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물론 해나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나에게는 거짓말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 P50
나에게는 언니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기회가 더이상 없는데 한수에게는 남아 있다는 사실에 불쑥 화가 났다. 너무 불공평해. 불현듯 나는 줄곧 내가 그렇게 생각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자 한없이 서글퍼졌다. 열네 살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는 대신 다른 사람도 적어도 나만큼은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간이 나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 P66
이모의 손길이 닿자, 나는 오래전 이모의 집 거실에 서 있던 어린아이가 되어 이십 년이 훨씬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전히 언니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 때가 있다고. 상실 이후 시간이 때때로 선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쳇바퀴를 돌듯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 P227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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