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지음, 조영학 옮김 / 더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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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매일매일 폭탄 테러가 일어나는 바그다드에서 폐품 업자로 일하는 하디는 어느 날부턴가 테러 때문에 사망해 조각난 여러 시신들을 모아 온전한 사람 형상으로 만든다. 누군가의 팔, 다리, 손가락과 발가락, 코 등 여러 사람의 시신 조각을 주워 꿰맸기 때문에 하디가 만든 시신은 인종과 종교를 아우르는 묘한 형체가 됐다. 그는 조각나 버려진 시신도 엄연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렇게 하면 장례를 치러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

노파 엘시바는 딸들이 이민을 간 이후에도 고향 바그다드를 떠나지 않는다. 교회 신부님의 핸드폰으로 딸들이 이따금 전화해 그곳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곳에서 살자고 설득하지만 엘시바는 집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 아주 오래전에 붙잡혀 군대로 가서 소식이 없는 아들 대니얼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잡지사 기자 마흐무드는 언제나처럼 하디의 의미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 허풍쟁이이자 거짓말쟁이 하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기사로 쓸만한 것은 아니어도 재미는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날, 하디는 자신이 창조해낸 "무명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시신 조각을 주워 온전한 한 사람의 모양으로 만든 시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전쟁을 빼놓고는 일상을 이야기할 수 없는 바그다드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저마다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무명씨를 창조한 하디는 동료를 테러로 잃었고, 엘시바는 전쟁에 끌려간 아들의 소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했다. 고향이자 터전에서의 삶은 상실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디, 엘시바와 같은 사람들은 매일같이 새로이 생겨나고 또 생겨났다는 점에서 끊이지 않는 고통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 상황을 하디가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폭탄 테러로 산산조각 난 사람의 시체를 모아 온전한 하나의 형태로 만들 생각을 한 것부터가 기이했다. 같은 인종끼리만 모아 기워 만든 게 아니라 다양한 인종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은 여러 인종 간의 평화를 상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조각난 시신과 그 조각들을 모아 꿰맨 사람 형체의 무언가도 인간답게 대접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무명씨에게 인격이 생겨나면서 그는 복수를 위해 살아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각난 각 신체 부위를 위한 복수였기에 죽음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복수가 완성된 후 신체 조각이 떨어져 나가 무명씨 역시 무너지고 있었다. 존재하지만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무명씨의 행보가 조금은 안타까웠다. 그의 의식 속에 들어갔던 경비원 하시브가 가여웠고, 엘시바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저 믿고 싶었기에 무명씨를 아들로 여겼던 마음도 안쓰러웠다.

신체를 기워 만든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설정이 흥미로워서 읽게 된 책이었고, 의미도 있었으나 재미는 없었다. 익살맞은 블랙 코미디라는 추천글이 있었는데 대체 어디가 익살맞았던 건지 당최 모르겠다. 거기다 하디와 엘시바, 잡지사 기자, 군인까지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다소 정신이 없었다. 무명씨와 연관되어 있다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굳이 필요한 캐릭터가 아니었던 사람도 있었다.
읽다가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만 읽었어야 했는데 왜 끝까지 읽게 됐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궁금하다.

자기가 여러 피살자들의 신체부위를 모아놓은 것에 누군가의 영혼이 들어오고, 거기에 다시 누군가가 이름을 붙여주어 이토록 기이한 존재가 완성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들은 복수를 해야만 편히 잠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희생자들의 조합이므로 복수가 필연이다. - P140

"삶이 퍽퍽한데 집이 있은들 뭐합니까? 어디나 두려움, 죽음, 불안, 범죄가 가득해요. 사람들은 서로 의심스러운 눈으로 노려보고, 잠을 자다가도 악몽에 놀라 화들짝 깨기 일쑤죠."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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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플레이스
길리언 플린 지음, 유수아 옮김 / 푸른숲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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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전, 리비의 엄마 패티, 두 언니 미셸과 데비가 추운 겨울 새벽에 집 안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일곱 살로 형제들 중 가장 어렸던 리비는 엄마 곁에서 자다가 바깥에서 들리는 무시무시한 소리에 놀라 창문 밖으로 달아나 숨은 덕분에 살아남았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거의 목격자로 대접받던 리비는 경찰과 여러 사람들의 추궁으로 인해 첫째인 벤 오빠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나중엔 그게 진짜라고 믿기 시작했다. 리비의 증언으로 열다섯 살이었던 벤은 감옥에 수감되어 아직까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24년이 지난 현재, 리비는 매일매일 돈에 허덕이며 살고 있다. 한때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 소녀로 알려져 사람들에게 기부금을 받기도 하고 책을 출판한 덕분에 수중에 돈이 있을 때도 있었으나 그녀는 일을 하지 않으며 누군가의 후원에만 기대 산 덕분에 이제는 먹고 죽으려고 해도 돈이 없었다.
그런 리비에게 "킬 클럽"의 멤버라는 라일이 편지를 보내온다. 살인자들과 살인 사건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 클럽에 와주면 500달러를 줄 것이고, 가족들이 남긴 유품이나 물건을 판매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한 푼이라도 궁했던 리비는 라일이 말한 킬 클럽 모임에 참석한 이후 24년 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너무 어려서 사리분별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곱 살 리비가 서른한 살이 되어 비로소 가족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벤 오빠를 감옥에 들어가도록 한 거짓 증언에 대한 회한 때문은 전혀 아니었다. 오로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건을 파헤치기로 한 것이었다.
가족들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어려서부터 제대로 자랄 수가 없었다. 엄마 패티의 언니인 다이앤 이모가 정성으로 보살폈는데도 불구하고 리비는 이모에게 상처를 줬고, 덕분에 알지도 못하는 친척 집이나 누군가에게 맡겨져 안정적이지 못한 10대를 보냈다. 리비가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이모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고 누군가에게 후원금을 받을 생각에 서른이 넘도록 일도 하지 않고 지내던 모습들로 인해 리비가 가엽게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하다고 느껴졌다. 과거 벤에 대한 증언부터 현재엔 오직 돈 때문에 움직이던 모습을 보며 리비가 사건의 중심으로 이끄는 주인공임에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킬 클럽 멤버들을 대신해 라일은 리비와 먼저 만나 모임에 데리고 오지만, 멤버들은 벤이 살인범이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오히려 리비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우자 그녀는 유가족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살인사건에 다가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24년 만에 처음으로 감옥에 수감된 벤 오빠를 찾아가기도 했다.
리비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된 벤은 살아남은 유일한 핏줄인 막냇동생을 오랫동안 그리워했는지 자신을 만나러 와준 리비에게 다정했다. 그러면서 리비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너그럽게 이해해 줬지만 리비는 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에 대해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벤과 리비를 보며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게 됐는지는 뻔했다.

소설은 현재 시점에서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리비와 사건 전날부터 당일까지 벤과 엄마 패티의 시점을 오갔다.
패티는 남편 러너와 이혼 후에 양육비는 물론 받지 못하고 때때로 들른 그에게 돈을 뜯기기도 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농장은 빚만 자꾸 쌓여갔고, 그녀는 네 아이들까지 책임져야만 했다. 아직 서른 초반의 그녀에겐 힘겨운 삶이었지만 그래도 패티는 아이들을 굶기지는 않으려고 애를 썼다.
사 남매 중 첫째 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 힘겨웠다. 가난해서 아이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학교에선 잡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집에서는 엄마나 여동생들에게 시달렸다. 유일하게 리비와만 사이가 좋았다. 여자친구인지 섹스 파트너인지 모를 디온드라는 벤을 좋아하는 것 같긴 했지만 돈이 많아서 그런지 가난한 그를 은연중에 얕잡아보고 있었다. 거기다 벤은 한창 사춘기쯤이었으니 감정적으로 격해져 있었다.

현재의 리비가 과거 사건과 관련이 있었을 아빠 러너, 벤에게 성추행범이라고 누명을 씌운 크리시, 악마숭배자 트레이, 디온드라까지 만나게 되면서 과거의 진실도 밝혀졌다. 패티, 미셸, 데비의 살인사건의 진실에는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이유가 있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노를 일으키는 원흉도 있었다. 등장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캐릭터는 역시나 그 모든 일의 발단이 되었고 현재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랬기에 벤이 불쌍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의 상황이 너무나 가여웠다. 그렇게 해서라도 잘 살기를 바랐던 마음이었는데 완전히 다른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안타까웠다.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벤과 리비는 이제 모든 것을 바로잡고 안도할만한 결말을 맞이했다.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

길리언 플린의 소설을 세 번째로 읽은 건데, 처음으로 만난 <나를 찾아줘>가 워낙 좋았던 탓인지 다른 책들은 그에 비해 조금 아쉬운 감이 있는 듯하다. 최근엔 각본이나 각색 작업을 주로 하는지 신간이 안 나오는데 재미있는 책을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해도 누구도 그런 풍파가 닥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테지. 바로 ‘그날‘, 뭔가가 틀어진 게야." - P70

아니, 내가 본 건 정말 본 거야. 늘 버릇처럼 읊조리는 주문이었다. 비록 거짓말이었지만. 사실 나는 본 게 없었다. 이제 속이 좀 시원한가들? 그래,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듣기만 했을 뿐. 옷장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들을 수만 있었다. 내가 쓸모없는 겁쟁이 꼬마였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죽은 것이다. - P77

"난 네가 거짓 증언한 걸 용서했어. 어려서 많이 혼란스러웠을 테니까. 그건 탓하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제기랄, 리비, 지금은 어때? 넌 서른 살이 넘었어. 그런데 아직도 피를 나눈 오빠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거야?" - P446.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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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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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는 아내 아유미와 아내의 조카 고타로와 함께 살고 있다. 아유미의 언니 가족이 일 때문에 싱가포르로 가게 되었는데, 아들 고타로가 일본에 남겠다고 해서 그들 부부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고타로는 여자친구 유카를 데리고 종종 놀러 오며 이모, 이모부와 잘 지낸다.
어느 날 집 앞에 누군가가 술과 쌀을 두고 간 일이 생긴다. 주소 같은 게 쓰여있지 않고 근처 택배 회사에 전화를 해봐도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이라 영 꺼림칙하다. 그 사건 이후 아키라와 아유미, 고타로에게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난다.

도의원 남편, 아들과 함께 사는 아쓰코는 최근 도의회 중에 일어난 성희롱 발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성희롱 발언을 한 사람을 찾아내려고 하는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무래도 그 발언을 남편이 했을 거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직접 물어보기가 겁이 나서 다른 사건이 터져 성희롱 발언 사건을 덮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다 남편이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서 돈 봉투를 건네받는 걸 목격하고, 아들이 다니는 수영 학원의 친한 엄마와 수영 코치가 바람을 피우는 것도 우연히 보게 된다.

다큐멘터리 감독 겐이치로는 홍콩 시위를 촬영하는 선배를 만나러 갔다가 촬영해온 영상에서 홍콩이라고 전혀 볼 수 없는 장소가 잠깐 스쳐 지나가는 걸 본다. 영상을 느리게 돌려봐도 그곳이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봐도 확인할 수 없는 일은 제쳐둔 그는 세포 신기술을 연구하는 사야마 교수를 취재하며 가까워지고, 결혼을 약속한 가오루코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불안해진다.

군인인 히비키는 휴가를 받아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휴가를 나가려던 중, 웜홀을 통해 70년 전 과거에서 2085년의 현재로 넘어온 사람이 있다는 뉴스를 동료를 통해 듣는다. 집에 돌아온 히비키는 인간이 아닌 "사인"으로 사는 삶에 대해, 그리고 아내 고코나와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자신과 같은 나나미린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엔 이 소설이 단편집인 줄 알았다. 각 소설의 주인공인 사람에게 계절을 할당해 봄부터 가을까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서로 겹치는 구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겐이치로의 이야기를 할 때, 잡지사에서 일하는 그의 친구가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쓰코의 일화를 들려주긴 했으나 잠깐 언급만 됐을 뿐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그리고 각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주제가 명확하게 보이질 않았다. 주인공의 일상적인 생활을 따라 소설이 흘러가다가 간혹 어떤 사건이 일어난 이후 그게 해결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다음 주자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지막 겨울 챕터를 읽고 나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 깨닫게 됐다.

아키라와 아쓰코, 겐이치로는 크건 작건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거나 모순적인 면이 있었다.
아키라는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호텔에 가는 등 바람을 피웠다. 자신은 그렇게 손가락질 받을 행동을 하고선 고등학생인 처조카 고타로가 여자친구와 아기를 갖게 되자 엄청나게 화를 냈다. 자기 아들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쓰코는 남편의 편협한 발언이 언제 밝혀질까 전전긍긍해하는데, 이런 와중에 남편은 군수품 관련 일을 하는 친구에게서 돈을 받았고 아들 친구 엄마의 바람까지 목격한다.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사건의 연속이라 아쓰코는 단지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양심이 계속 찔리고 또 찔렸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가여운 캐릭터였다.
겐이치로는 확실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나쁜 인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불쌍하기도 했다. 결혼할 여자가 여태까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었고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남자를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고백에 눈이 안 돌아갈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감정적으로는 이해하지만 행동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도망친 이후의 그는 비겁하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2014~2015년의 현재를 살아가다가 겨울 챕터에서는 갑자기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2085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만들어진 인간인 "사인" 히비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앞서 관련이 없었던 것 같았던 사람들과 그들의 관계, 그들이 만들어 낸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에 퍼즐이 맞춰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눈앞에 닥친 상황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것뿐이지만, 후대에는 그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게 된다. 그것들이 모이면 때론 감당하기 어려운 큰 무언가가 만들어지곤 한다는 점에서 나비효과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나비효과라고 보여준 겨울 챕터에서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니라 에필로그로 이어져 다른 결말을 보여줬다는 점이 좋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기가 잘못됐다고 알아챈 순간, 그걸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가 잘못되지 않은 게 될까, 어떻게 하면 자기가 옳은 게 될까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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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파도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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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척주의 보건소에서 약무주사보로 일하는 송인화는 자신의 고향인 이곳이 너무나 싫다. 시멘트 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불미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신 뒤 고향을 떠났다가 18년 만에 이곳에 다시 돌아왔는데, 싫은 감정은 여전했다. 핵발전소 건설 문제로 찬핵, 반핵으로 나뉘어 싸우는 지역 사람들도, "약왕성도회"라는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아픈 데가 없느냐고 묻는 것도, 그리고 노인들이 알 수 없는 약을 복용하는 것도 싫은 것 투성이었지만, 그런 송인화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건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는 서상화였다. 모두에게 살갑게 대하는 서상화는 특별히 송인화를 잘 따랐고, 그를 향한 감정은 어느새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송인화가 고향 보건소에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노인이 막걸리를 마시고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막걸리에 독극물이 있었다는 결과로 수사를 진행하다가 노인에게서 송인화의 명함이 나와 그녀를 참고인을 가장한 용의자로 부르게 된다. 용의자는 송인화뿐만 아니라 그녀가 살고 있는 집 주인인 안금자, 노인들에게 약을 파는 약장수, 약왕성도회 여자들까지 불려갔다.



핵발전소 건립 예정지인 "척주"라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세 남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송인화, 척주에서 유명한 수재였으나 사고를 당한 이후 후유증에 삶을 잠식당한 윤태진, 척주에 약국을 열고 싶어 하는 약대생이자 공익근무 요원인 서상화였다.
처음엔 이들 세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송인화는 서울에서 윤태진을 만나 연인이 되었다가 어떤 사건으로 헤어져 척주로 돌아왔다. 윤태진도 일 때문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송인화가 척주에 있다는 걸 알고 그녀를 향한 마음도 여전했지만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서상화는 송인화를 잘 따르는 동생처럼만 보였으나 어느새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되어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스며들고 있었다.

세 사람이 살고 있는 척주 역시 또 다른 주인공이라 볼 수 있었다. 오래전 척주를 먹여살린 시멘트 회사가 있는 곳이자 현재는 핵발전소가 건립될 예정인 도시, 약왕성도회의 주 활동 무대, 그리고 시멘트 회사에서 일하던 남자들이 이제는 늙고 아파서 마약성 진통제가 활발하게 유통되는 곳이었다. 아프지 않게 해주는 약을 준다는 약국들, 그 아픔을 먹이 삼아 신도들을 모으는 사이비 종교, 과거 시멘트 회사 사장에서 지금은 핵발전소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척주 시장까지 온갖 유혹과 개인적인 욕망이 난무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겉과 속이 달라 누구를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송인화의 모습이 위태롭게만 느껴졌다. 보건소에서도, 집에서도 편하게 있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사고 이후 척주라는 도시 자체가 송인화에겐 이중적인 곳으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사고사인데 자살로 판명되어 지긋지긋해져 떠날 수밖에 없었던 18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곳을 조금은 좋아지게 만든 사람이 서상화였다. 한결같은 다정함과 따뜻함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서상화에게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늘 밝기만 한 게 아니라 아픔을 숨기고 있어서 때로는 안아주고 싶기도 하는 사람이라 그를 사랑하게 됐다. 송인화와 서상화의 맑고 순수한 사랑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몇 번이고 참다가 가만히 잡은 손, 도란도란 오가는 대화에 담긴 애정과 때로는 그저 바라보던 눈빛만으로도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이들의 사랑만 이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척주가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날마다 사건이 일어났고 핵발전소 문제로 시장을 끌어내리느냐 마느냐까지 오면서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매일매일이 조심스러웠다. 소설에서 내내 풍기던 비극적인 분위기가 수면 위로 올라와 놀라움을 주면서도 안타까움에 슬프게 만들었고, 독극물 막걸리를 마시고 사망한 노인 사건이 의외로 모든 사건을 푸는 열쇠가 되어 비통함을 조금이나마 다독여줬다.
사실 소설 분위기 자체가 애달픔을 풍겨내고 있었기에 해피엔딩은 아닐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그래도 그렇게 끝이 나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각자 오랜 세월 동안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안식이 되어주길 바랐었기 때문에 결말이 더욱 애처롭고 서글펐다.

사회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흘러간 소설이지만 하지만 여운을 남긴 결말 덕분에 소설 속 두 사람의 사랑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땅 위는 이렇게 멀쩡한데, 발밑 뚜껑 아래에 뭐가 있는지 사람들은 알까. 모를까. 알면서 모르는 척 살아가는 걸까. - P204

손바닥과 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송인화는 자신이 다른 세계 하나와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서상화라는 세계. 송인화는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손에 힘을 주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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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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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다니는 열여덟 살의 "나"는 집안에서 십 남매 중 가운데동생, 가운데언니라고 불리며 "어쩌면-남자친구"와 정식 연인이 아닌 어쩌면 관계로 살고 있다.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는 걸 좋아했고 달리는 것 또한 좋아했다. 종종 함께 달리는 셋째 형부는 이 동네 남자들과는 달랐고 자신을 이해해 줬기에 좋아했다. 반면에 첫째 형부는 음흉한 사람이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싫었다.


언제나처럼 집에 걸어가면서 책을 읽던 어느 날,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남자 밀크맨이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말을 거는 밀크맨은 나에게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차에 타라고 말했다. 어느 집 밀크맨인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이었기에 나는 거절을 했지만, 밀크맨은 그 이후로도 내 앞에 종종 나타났다. 달리기를 할 때는 물론이고 야간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울 때조차 어떻게 알았는지 건물 앞에 차를 대놓고 기다렸다.

음흉한 첫째 형부는 그걸 알고선 우리 집에 찾아와 밀크맨에 대해 말했고, 그 이후로는 첫째 언니는 물론이고 엄마, 동네 사람들 모두 소문을 진짜라고 믿어 나는 나도 모르게 밀크맨의 여자가 되어버렸다.




1970년대 북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성인이나 다름없는 한 소녀가 처한 상황을 중심으로 흘렀다. 최근 몇 달 동안 북아일랜드와 영국의 분쟁에 관한 소설을 두 권 읽었기 때문에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마을과 개인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읽었던 책은 범죄 스릴러 소설이었고 주인공 또한 남자였기에 평소 읽는 장르물과 특별하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 이 소설은 어린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이라 색달랐고 그래서 더 불쾌한 부분이 많았다. 밀크맨과 첫째 형부, 아무개 아들 아무개가 등장하는 부분은 기분이 나빴다고 보면 되는데, 그들이 등장하지 않을 때가 거의 없어서 읽는 내내 불쾌했다고 볼 수 있다.



무장단체 주요 인사인 밀크맨의 원치 않은 간택을 받은 주인공은 그때부터 소문이 부풀려져 진짜가 되고 가족들마저 믿지 않아 답답한 상황에 처했지만,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좀 답답한 구석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의 진위 여부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됐을지 모를 말을 이미 사실로 치부해 쑥덕거리기를 좋아했다. 열여덟 살 여자애와 마흔한 살 늙은 남자, 그것도 유부남에다가 국가 반란 행위를 일삼는 무장단체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고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나라나 소문을 사실처럼 믿는 일이 언제나 벌어진다. 아니라고 말해도 듣지를 않고 이미 믿기로 결심한 생각을 바꾸질 않았다. 소문의 당사자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여자 입장에서 이런 추접스러운 소문에 휘말리면 이전까지 어떻게 행동했든 추접스러운 여자가 되고 만다. 남자한테는 안 그러면서 왜 유독 여자에게만 이렇게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건지 모르겠다.


밀크맨이 자신에게 찝쩍대는 주요 에피소드 외에 어쩌면-남자친구와의 관계와 진짜 밀크맨과 엄마의 과거 사연, 이 나라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둘째 언니, 알약소녀와 알약소녀 동생, 셋째 오빠 등 여러 캐릭터가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했다. 사연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리고 그 사연이란 사회적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었기에 때로는 안타까웠고 어떨 땐 뭔가 웃겨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이들 캐릭터 중에 웃겼던 건 주인공의 어린 동생들, 어쩌면-남자친구와 셰프였다. 어린 세 동생들은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찌나 어른스럽고 똑똑했는지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 웃음을 줬다. 그리고 어쩌면-남자친구와 셰프는 주인공의 심각한 상황 이후에 갑작스레 비밀이 밝혀져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그렇게 되도록 몰랐는지 모르겠다. 주인공 입장에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읽어보게 됐다. 언제나 그렇듯 뒤표지에는 책에 대한 찬사가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은 세계적인 권위의 상을 수상했으니 당연히 더 대단한 칭찬이 가득했다. 그래서 기대를 안고 읽기 시작했는데 뭔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100여 페이지를 읽고 그만뒀었다. 그러다 도서관의 장기 휴관으로 읽을 책이 없어서 다시 읽었는데, 역시나 정신없고 이상하게 말이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이 원래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느낀 뉘앙스가 조금 달라 뭐라 표현하기엔 어렵지만, 아무튼 말이 많았다. 거기다가 현재 사건에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 흘렀다가 다시 현재 사건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기에 집중력이 조금 떨어지면 뭔 얘기인가 싶어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주제가 명확하고 현재에도 통용되는 것이었으나 내용 구성 방식이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아 아쉬웠던 책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다들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일이 내 손을 떠나버렸을 때, 애초에 내 손에 들어온 적도 없었을 때, 모든 상황이 나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 이 세상에서 나약한 한 인간인 내가 대체 뭘 어떻게 조심한다는 말인가? - P291.292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고, 엄마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이곳에서는 말이 왜곡되고 날조되고 과장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를 둘러싼 소문을 일일이 설명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려다 보면 내가 힘을 잃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한테도 묻지 않았고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았고 확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해서 내 정신을 분리하는 경계를 유지하기를 바랐고 그렇게 해서 정신을 똑바로 유지하고 온전히 지키고 싶었다고 했다. - P86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심을 말하지 않는 한편 누가 자기 생각을 읽으려 하면 그 사람에게 가장 위쪽 마음 상태만 드러내고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는 의식의 수풀 안에 감춘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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