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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직장에 다니는 열여덟 살의 "나"는 집안에서 십 남매 중 가운데동생, 가운데언니라고 불리며 "어쩌면-남자친구"와 정식 연인이 아닌 어쩌면 관계로 살고 있다.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는 걸 좋아했고 달리는 것 또한 좋아했다. 종종 함께 달리는 셋째 형부는 이 동네 남자들과는 달랐고 자신을 이해해 줬기에 좋아했다. 반면에 첫째 형부는 음흉한 사람이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싫었다.
언제나처럼 집에 걸어가면서 책을 읽던 어느 날,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남자 밀크맨이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말을 거는 밀크맨은 나에게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차에 타라고 말했다. 어느 집 밀크맨인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이었기에 나는 거절을 했지만, 밀크맨은 그 이후로도 내 앞에 종종 나타났다. 달리기를 할 때는 물론이고 야간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울 때조차 어떻게 알았는지 건물 앞에 차를 대놓고 기다렸다.
음흉한 첫째 형부는 그걸 알고선 우리 집에 찾아와 밀크맨에 대해 말했고, 그 이후로는 첫째 언니는 물론이고 엄마, 동네 사람들 모두 소문을 진짜라고 믿어 나는 나도 모르게 밀크맨의 여자가 되어버렸다.
1970년대 북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성인이나 다름없는 한 소녀가 처한 상황을 중심으로 흘렀다. 최근 몇 달 동안 북아일랜드와 영국의 분쟁에 관한 소설을 두 권 읽었기 때문에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마을과 개인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읽었던 책은 범죄 스릴러 소설이었고 주인공 또한 남자였기에 평소 읽는 장르물과 특별하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 이 소설은 어린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이라 색달랐고 그래서 더 불쾌한 부분이 많았다. 밀크맨과 첫째 형부, 아무개 아들 아무개가 등장하는 부분은 기분이 나빴다고 보면 되는데, 그들이 등장하지 않을 때가 거의 없어서 읽는 내내 불쾌했다고 볼 수 있다.
무장단체 주요 인사인 밀크맨의 원치 않은 간택을 받은 주인공은 그때부터 소문이 부풀려져 진짜가 되고 가족들마저 믿지 않아 답답한 상황에 처했지만,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좀 답답한 구석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의 진위 여부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됐을지 모를 말을 이미 사실로 치부해 쑥덕거리기를 좋아했다. 열여덟 살 여자애와 마흔한 살 늙은 남자, 그것도 유부남에다가 국가 반란 행위를 일삼는 무장단체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고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나라나 소문을 사실처럼 믿는 일이 언제나 벌어진다. 아니라고 말해도 듣지를 않고 이미 믿기로 결심한 생각을 바꾸질 않았다. 소문의 당사자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여자 입장에서 이런 추접스러운 소문에 휘말리면 이전까지 어떻게 행동했든 추접스러운 여자가 되고 만다. 남자한테는 안 그러면서 왜 유독 여자에게만 이렇게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건지 모르겠다.
밀크맨이 자신에게 찝쩍대는 주요 에피소드 외에 어쩌면-남자친구와의 관계와 진짜 밀크맨과 엄마의 과거 사연, 이 나라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둘째 언니, 알약소녀와 알약소녀 동생, 셋째 오빠 등 여러 캐릭터가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했다. 사연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리고 그 사연이란 사회적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었기에 때로는 안타까웠고 어떨 땐 뭔가 웃겨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이들 캐릭터 중에 웃겼던 건 주인공의 어린 동생들, 어쩌면-남자친구와 셰프였다. 어린 세 동생들은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찌나 어른스럽고 똑똑했는지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 웃음을 줬다. 그리고 어쩌면-남자친구와 셰프는 주인공의 심각한 상황 이후에 갑작스레 비밀이 밝혀져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그렇게 되도록 몰랐는지 모르겠다. 주인공 입장에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읽어보게 됐다. 언제나 그렇듯 뒤표지에는 책에 대한 찬사가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은 세계적인 권위의 상을 수상했으니 당연히 더 대단한 칭찬이 가득했다. 그래서 기대를 안고 읽기 시작했는데 뭔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100여 페이지를 읽고 그만뒀었다. 그러다 도서관의 장기 휴관으로 읽을 책이 없어서 다시 읽었는데, 역시나 정신없고 이상하게 말이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이 원래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느낀 뉘앙스가 조금 달라 뭐라 표현하기엔 어렵지만, 아무튼 말이 많았다. 거기다가 현재 사건에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 흘렀다가 다시 현재 사건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기에 집중력이 조금 떨어지면 뭔 얘기인가 싶어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주제가 명확하고 현재에도 통용되는 것이었으나 내용 구성 방식이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아 아쉬웠던 책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다들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일이 내 손을 떠나버렸을 때, 애초에 내 손에 들어온 적도 없었을 때, 모든 상황이 나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 이 세상에서 나약한 한 인간인 내가 대체 뭘 어떻게 조심한다는 말인가? - P291.292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고, 엄마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이곳에서는 말이 왜곡되고 날조되고 과장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를 둘러싼 소문을 일일이 설명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려다 보면 내가 힘을 잃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한테도 묻지 않았고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았고 확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해서 내 정신을 분리하는 경계를 유지하기를 바랐고 그렇게 해서 정신을 똑바로 유지하고 온전히 지키고 싶었다고 했다. - P86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심을 말하지 않는 한편 누가 자기 생각을 읽으려 하면 그 사람에게 가장 위쪽 마음 상태만 드러내고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는 의식의 수풀 안에 감춘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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