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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파도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강원도 척주의 보건소에서 약무주사보로 일하는 송인화는 자신의 고향인 이곳이 너무나 싫다. 시멘트 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불미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신 뒤 고향을 떠났다가 18년 만에 이곳에 다시 돌아왔는데, 싫은 감정은 여전했다. 핵발전소 건설 문제로 찬핵, 반핵으로 나뉘어 싸우는 지역 사람들도, "약왕성도회"라는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아픈 데가 없느냐고 묻는 것도, 그리고 노인들이 알 수 없는 약을 복용하는 것도 싫은 것 투성이었지만, 그런 송인화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건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는 서상화였다. 모두에게 살갑게 대하는 서상화는 특별히 송인화를 잘 따랐고, 그를 향한 감정은 어느새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송인화가 고향 보건소에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노인이 막걸리를 마시고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막걸리에 독극물이 있었다는 결과로 수사를 진행하다가 노인에게서 송인화의 명함이 나와 그녀를 참고인을 가장한 용의자로 부르게 된다. 용의자는 송인화뿐만 아니라 그녀가 살고 있는 집 주인인 안금자, 노인들에게 약을 파는 약장수, 약왕성도회 여자들까지 불려갔다.
핵발전소 건립 예정지인 "척주"라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세 남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송인화, 척주에서 유명한 수재였으나 사고를 당한 이후 후유증에 삶을 잠식당한 윤태진, 척주에 약국을 열고 싶어 하는 약대생이자 공익근무 요원인 서상화였다.
처음엔 이들 세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송인화는 서울에서 윤태진을 만나 연인이 되었다가 어떤 사건으로 헤어져 척주로 돌아왔다. 윤태진도 일 때문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송인화가 척주에 있다는 걸 알고 그녀를 향한 마음도 여전했지만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서상화는 송인화를 잘 따르는 동생처럼만 보였으나 어느새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되어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스며들고 있었다.
세 사람이 살고 있는 척주 역시 또 다른 주인공이라 볼 수 있었다. 오래전 척주를 먹여살린 시멘트 회사가 있는 곳이자 현재는 핵발전소가 건립될 예정인 도시, 약왕성도회의 주 활동 무대, 그리고 시멘트 회사에서 일하던 남자들이 이제는 늙고 아파서 마약성 진통제가 활발하게 유통되는 곳이었다. 아프지 않게 해주는 약을 준다는 약국들, 그 아픔을 먹이 삼아 신도들을 모으는 사이비 종교, 과거 시멘트 회사 사장에서 지금은 핵발전소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척주 시장까지 온갖 유혹과 개인적인 욕망이 난무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겉과 속이 달라 누구를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송인화의 모습이 위태롭게만 느껴졌다. 보건소에서도, 집에서도 편하게 있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사고 이후 척주라는 도시 자체가 송인화에겐 이중적인 곳으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사고사인데 자살로 판명되어 지긋지긋해져 떠날 수밖에 없었던 18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곳을 조금은 좋아지게 만든 사람이 서상화였다. 한결같은 다정함과 따뜻함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서상화에게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늘 밝기만 한 게 아니라 아픔을 숨기고 있어서 때로는 안아주고 싶기도 하는 사람이라 그를 사랑하게 됐다. 송인화와 서상화의 맑고 순수한 사랑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몇 번이고 참다가 가만히 잡은 손, 도란도란 오가는 대화에 담긴 애정과 때로는 그저 바라보던 눈빛만으로도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이들의 사랑만 이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척주가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날마다 사건이 일어났고 핵발전소 문제로 시장을 끌어내리느냐 마느냐까지 오면서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매일매일이 조심스러웠다. 소설에서 내내 풍기던 비극적인 분위기가 수면 위로 올라와 놀라움을 주면서도 안타까움에 슬프게 만들었고, 독극물 막걸리를 마시고 사망한 노인 사건이 의외로 모든 사건을 푸는 열쇠가 되어 비통함을 조금이나마 다독여줬다.
사실 소설 분위기 자체가 애달픔을 풍겨내고 있었기에 해피엔딩은 아닐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그래도 그렇게 끝이 나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각자 오랜 세월 동안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안식이 되어주길 바랐었기 때문에 결말이 더욱 애처롭고 서글펐다.
사회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흘러간 소설이지만 하지만 여운을 남긴 결말 덕분에 소설 속 두 사람의 사랑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땅 위는 이렇게 멀쩡한데, 발밑 뚜껑 아래에 뭐가 있는지 사람들은 알까. 모를까. 알면서 모르는 척 살아가는 걸까. - P204
손바닥과 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송인화는 자신이 다른 세계 하나와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서상화라는 세계. 송인화는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손에 힘을 주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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