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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아키라는 아내 아유미와 아내의 조카 고타로와 함께 살고 있다. 아유미의 언니 가족이 일 때문에 싱가포르로 가게 되었는데, 아들 고타로가 일본에 남겠다고 해서 그들 부부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고타로는 여자친구 유카를 데리고 종종 놀러 오며 이모, 이모부와 잘 지낸다.
어느 날 집 앞에 누군가가 술과 쌀을 두고 간 일이 생긴다. 주소 같은 게 쓰여있지 않고 근처 택배 회사에 전화를 해봐도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이라 영 꺼림칙하다. 그 사건 이후 아키라와 아유미, 고타로에게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난다.
도의원 남편, 아들과 함께 사는 아쓰코는 최근 도의회 중에 일어난 성희롱 발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성희롱 발언을 한 사람을 찾아내려고 하는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무래도 그 발언을 남편이 했을 거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직접 물어보기가 겁이 나서 다른 사건이 터져 성희롱 발언 사건을 덮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다 남편이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서 돈 봉투를 건네받는 걸 목격하고, 아들이 다니는 수영 학원의 친한 엄마와 수영 코치가 바람을 피우는 것도 우연히 보게 된다.
다큐멘터리 감독 겐이치로는 홍콩 시위를 촬영하는 선배를 만나러 갔다가 촬영해온 영상에서 홍콩이라고 전혀 볼 수 없는 장소가 잠깐 스쳐 지나가는 걸 본다. 영상을 느리게 돌려봐도 그곳이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봐도 확인할 수 없는 일은 제쳐둔 그는 세포 신기술을 연구하는 사야마 교수를 취재하며 가까워지고, 결혼을 약속한 가오루코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불안해진다.
군인인 히비키는 휴가를 받아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휴가를 나가려던 중, 웜홀을 통해 70년 전 과거에서 2085년의 현재로 넘어온 사람이 있다는 뉴스를 동료를 통해 듣는다. 집에 돌아온 히비키는 인간이 아닌 "사인"으로 사는 삶에 대해, 그리고 아내 고코나와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자신과 같은 나나미린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엔 이 소설이 단편집인 줄 알았다. 각 소설의 주인공인 사람에게 계절을 할당해 봄부터 가을까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서로 겹치는 구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겐이치로의 이야기를 할 때, 잡지사에서 일하는 그의 친구가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쓰코의 일화를 들려주긴 했으나 잠깐 언급만 됐을 뿐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그리고 각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주제가 명확하게 보이질 않았다. 주인공의 일상적인 생활을 따라 소설이 흘러가다가 간혹 어떤 사건이 일어난 이후 그게 해결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다음 주자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지막 겨울 챕터를 읽고 나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 깨닫게 됐다.
아키라와 아쓰코, 겐이치로는 크건 작건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거나 모순적인 면이 있었다.
아키라는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호텔에 가는 등 바람을 피웠다. 자신은 그렇게 손가락질 받을 행동을 하고선 고등학생인 처조카 고타로가 여자친구와 아기를 갖게 되자 엄청나게 화를 냈다. 자기 아들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쓰코는 남편의 편협한 발언이 언제 밝혀질까 전전긍긍해하는데, 이런 와중에 남편은 군수품 관련 일을 하는 친구에게서 돈을 받았고 아들 친구 엄마의 바람까지 목격한다.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사건의 연속이라 아쓰코는 단지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양심이 계속 찔리고 또 찔렸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가여운 캐릭터였다.
겐이치로는 확실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나쁜 인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불쌍하기도 했다. 결혼할 여자가 여태까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었고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남자를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고백에 눈이 안 돌아갈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감정적으로는 이해하지만 행동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도망친 이후의 그는 비겁하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2014~2015년의 현재를 살아가다가 겨울 챕터에서는 갑자기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2085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만들어진 인간인 "사인" 히비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앞서 관련이 없었던 것 같았던 사람들과 그들의 관계, 그들이 만들어 낸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에 퍼즐이 맞춰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눈앞에 닥친 상황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것뿐이지만, 후대에는 그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게 된다. 그것들이 모이면 때론 감당하기 어려운 큰 무언가가 만들어지곤 한다는 점에서 나비효과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나비효과라고 보여준 겨울 챕터에서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니라 에필로그로 이어져 다른 결말을 보여줬다는 점이 좋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기가 잘못됐다고 알아챈 순간, 그걸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가 잘못되지 않은 게 될까, 어떻게 하면 자기가 옳은 게 될까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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