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질은 부드러워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24년 4월
평점 :
품절



어느 날부터 세계 모든 동물들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은 물론이고 농장의 가축과 동물원의 동물, 심지어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조류들까지 바이러스를 피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동물원은 폐쇄되었고 각 가정에서는 애지중지 돌보던 반려동물을 주인의 손으로 끝을 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대체 육류를 찾아야 했는데, 그 결과 각국 정부는 인육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고 법을 제정했다. 기존의 육류 가공 공장들은 '특별육'이라고 불리게 된 인간 수컷과 암컷들을 처리했고, 특별육을 키우는 농장 역시 따로 존재했다.


중년 남성 마르코스 테호는 육류 가공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이 일을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변이가 생긴 이후 정신줄을 놔버린 아버지를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제일 좋은 요양원에 보냈기에 돈을 많이 주는 이곳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곁에 가족이라도 있으면 고되지 않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갓난 아기인 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아내 세실리아가 친정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그는 이 상황을 묵묵히 견디고만 있다.

그런 그에게 특별육 사육장의 사장이 순종 1세대 암컷을 선물로 보내줬다. 마르코스는 너무나 경악스러워하며 받지 않으려 했지만 사장은 좋은 암컷이라고 하며 그에게 떠넘겼다. 그때부터 마르코스의 삶은 이전과는 달라지게 되는데...




이 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제목이 특이해서였다. 보통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신착 코너를 돌고서 읽을 책 목록에 있는 걸 빌려오는 편인데, 신착 코너에 있던 이 책의 제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육질은 부드러워>라는 뜻이 대체 뭔지 책을 집어 들어 뒤편에 쓰인 간략한 줄거리를 읽었는데 흥미가 확 일었다. 바이러스로 동물이 사라지고 대체재로 인간을 동물처럼 사육해서 먹는다니 상상하니 끔찍하면서도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졌다.

주인공은 육류 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마르코스였다. 마르코스는 특별육을 인간이라고 부르면 잡혀가서 그 역시 특별육이 될 수 있는 세상이 온 이후 채식만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다른 사람들은 마르코스처럼 인육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육류 섭취 부족이 계속해서 이어진 뒤에, 그리고 인육을 맛본 뒤에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르코스는 그렇게도 혐오하는 인육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의 요양원 비용 때문이었다. 결혼 후에 남편, 아이들과 도시에서 사는 여동생은 말로만 아버지를 걱정할 뿐 비용을 보태지 않았다. 마르코스가 비싼 요양원에 아버지를 모신 이유는 그런저런 요양원에 보내면 노인들이 임종한 후에 저렴한 인육으로 팔아넘겨졌기 때문이다. 역겨움의 극치라서 너무나 경악스러웠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며 이 책을 읽어선 안 됐던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인육에 관한 생각을 드러낼 수 없었던 시대에 마르코스는 순종 암컷을 선물로 받게 되었으니 처치 곤란이었다. 오로지 사람에게 먹히기 위해 길러지는 존재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미리 처리를 했고, 당연하게 가축에게 그러하듯 기르기만 했다. 인간이었지만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선물 받은 암컷은 마르코스를 두려워하며 창고에 묶여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 마르코스에게 여러 사건이 일어난 후 그는 재스민이라 이름 붙인 그 암컷과 몸을 섞었다. 사실 이건 예상이 가능한 부분이긴 했다. 아내가 친정으로 떠난 뒤에 마르코스는 늘 외로웠고 욕구를 다른 데서 풀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빈번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 암컷이 순종이라 그런지 생김새도 고왔고, 다른 특별육들처럼 머리카락을 밀어버리지도 않았기에 씻겨두니 보기 좋았을 터였다.

문제는 그 암컷, 재스민이 아기를 갖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아 뒤통수가 너무 아팠다. 마르코스가 사는 사회에서는 가축처럼 길러서 먹는 존재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면 안 되는 법이 있었기에 들키면 그 역시 인육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레 재스민을 돌보며 뱃속의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길 빌었다. 아이를 한 번 잃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주인공 마르코스와 그 외 모든 사람들 사이에는 너무나 먼 거리감이 느껴졌다. 소설 속 현실과 소설을 읽고 있는 나의 거리감만큼이나 까마득했기 때문에 당연히 마르코스에게 공감을 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돈을 벌기 위해 죄책감을 느끼며 일을 해야 했던 그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아버지의 또 다른 자식인 여동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걸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게 안타깝기도 했다. 또한 아내 세실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잃은 슬픔은 부부 모두에게 공통인 아픔이었지만, 세실리아가 그 아픔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며 마르코스에게 다시금 괴로움을 안겨주고 있다는 게 인육을 먹는 사람들과의 거리감만큼이나 비슷하게 다가왔다.

그러던 차에 재스민이 아기를 갖게 된 게 마르코스에게는 삶을 다른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보였다. 여태껏 그가 보여준 행동과 감정들을 미루어 봤을 때 섭취되는 육류로만 취급받는 이들에게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건 가히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놀란 엔딩이었다. 마지막 한 문장이 깊은 탄식을 하게 만들었다.


디스토피아가 배경인 영화와 책을 정말 많이 접했는데 이 소설만큼 충격인 설정은 없었다. 금기시되는 카니발리즘이 합법이 되었다는 것에서부터 놀랍고 끔찍했는데, 소설을 쓴 작가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가 육우 섭취율이 굉장히 높은 아르헨티나 작가라는 것도 의외였다. 그로 인해 시사하는 바가 새삼 다르게 와닿았다.

놀랍고 또 놀라운 소설이다. 읽으면서 몇 번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금세 읽어버리게 만든 흡입력이 있었다. 영상화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인상적으로 본 영화 <옥자>의 고어 디스토피아 버전이 될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사람들이 모여서 몰래 다른 사람들을 죽인 후 먹기 시작했다. 두 명의 볼리비아 출신 실직자를 이웃 사람들이 공격한 다음 시신을 토막 내 불에 구워 먹었다는 기사가 언론에 등장했다. 뉴스를 접한 그는 몸서리를 쳤다. 그런 유의 사건이 공개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그 사건은 결국 대중에게 어디서 났든 고기는 고기일 뿐이라는 인식을 서서히 주입했다. - P16

"어쨌든 세상이 생겨난 뒤로 우리는 서로를 먹어왔어요. 상징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서로를 뜯어먹고 있었어요. 변이라는 과정이 우리를 덜 위선적으로 만든 겁니다." - P205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조금 전까지 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까? 신경이나 쓸까? 그러다 자신이 실제로 자신이 내린 지시에 따라 남자와 여자의 목을 베고 배를 가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감독하며 인생 대부분을 보냈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그런 일이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사람은 거의 모든 일에 익숙해질 수 있다. 아이가 죽는 것만 빼고는. - P1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계산장의 재판 - 대한민국 스토리공모대전 우수상 수상작 케이스릴러
박은우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년 전, 고등학생이던 예쁜 여동생이 친구와 함께 아는 명문대생 오빠들을 만나러 간다고 단장을 했다. 걱정하며 바라보는 손위 형제에게 동생은 낮에 만나서 놀다가 금세 들어올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동생은 집에 오지 않았다.


J 그룹 3세 조성주가 파티를 열 때마다 사용하는 엄마 명의의 청계산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조성주가 직접 초대한 부유한 집안의 친구들이었고, 그들이 데리고 온 파트너는 하나같이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초대를 받고 산장에 들어가려던 이들에게 한 가지 조건이 붙었으니 그건 바로 얼굴에 가면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물부터 영화 캐릭터, 배우의 얼굴 등 각양각색의 가면을 쓴 그들은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으나 파티의 성격을 생각하고 금세 수긍했다.

그렇게 30여 명이 초대된 파티에서 케이터링 업체 직원들이 음식을 비롯한 이런저런 서비스를 돕다가 늦은 시각이 되어 몇 명만 남고 퇴근을 했다. 술과 약에 취한 이들의 소란과 웨이트리스에게 치근덕대는 안하무인 도련님을 잠재우기 위해 곰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나 총을 쐈다. 평소에 절대 들을 수 없는 소리에 놀란 이들이 주목한 곳에 가면을 쓴 남자가 배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방금까지 웨이트리스에게 치근덕대던 사람이었다. 이후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나 그들 모두가 인질이 되었음을 알렸다.




프롤로그로 시작된 소설로 인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가슴을 답답하게 하리라는 걸 예상하게 했다. 피해자가 고작 고등학생인 여자애였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차차 밝혀지게 되겠지만, 그게 무엇이 됐든 최악일 거라는 건 안 봐도 훤했고 가해자 역시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기에 피해자 여고생의 가족이 모든 걸 계획하고 청계산장에서 재판을 벌이려는 것일 터였다.

본격적으로 청계산장의 파티가 열리기 전에 여러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의 단편을 이야기했다. 형사의 어머니가 돈을 불려준다는 사기 수법을 어디선가 듣고 온 해프닝이 있었고, 강남의 잘나가는 성형외과 의사가 의료사고와 향정신성 의약품 상습 복용으로 인해 의사 면허가 취소된 사건도 이야기하고 지나갔다. 청계산장 파티의 호스트인 조성주가 잠깐 등장했다 의문을 남기고 사라지기도 했다.

이후 주요 무대가 청계산장으로 등장해 파티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초대된 손님은 물론이고 케이터링 업체 직원, 숨어 있을 인질범들까지 모두의 정체를 숨기는 게 일단 첫 번째 목표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손님들은 은밀하고 퇴폐적인 파티이기에 가면을 쓴다는 걸 마음에 들어 했다. 얼굴을 가리면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사회적인 시선으로 인해 감추고 있던 욕망을 드러내기도 쉬울 테니 말이다.

그러나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총성이 울렸고, 그 결과 한 남자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걸 보여줬다. 고작 파티에 왔을 뿐인 인질들은 인질범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총에 맞아 죽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인질범은 일단 남자 인질들의 손발을 묶어 통솔하기 쉽게 했다. 그 이전에 핸드폰 및 소지품을 걷는 데 일부러 시간적 여유를 준 덕분에 산장 내부의 사정이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경찰에게까지 이 이야기가 흘러들어간 건 당연했다.

프롤로그의 여동생을 잃은 유족이 진짜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이런 일들을 벌였다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마스터'라 불린 그 당사자의 정체는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오래전에 이 산장에서 치욕을 당하고 살해된 고등학생 민지영의 형제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민지영 외에 피해자가 더 있다는 게 드러나 누가 이런 일을 벌이는 건지 예측할 수 없게 했다. 산장 밖에서 백방으로 애를 쓰는 경찰과 인질범의 대치는 빈틈이 없어서 파고들기가 어려웠기에 인질범이 이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인질범이 나쁜 쪽이 아닌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억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당연히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안타깝고 분노할 과거가 있었기에 가해자는 똑같은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복수로 인해 자신이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괴물이 되어 간다고 느껴도 멈출 수가 없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원하는 걸 손에 넣을 때까지 분노를 원동력 삼아 움직여야 했으니 말이다.

복수가 성공했는지 못했는지는 결말보다 앞서 밝혀졌는데, 그 상황에 대한 진실보다 앞으로 남은 이야기에 핵심이 있을 거란 생각에 계속해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펼쳐 나갔다.


복수를 위해 착착 맞아떨어지는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 이렇게 사적 제재가 이루어지고 그걸 환호하는 건 현실의 법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인 게 당연할 것이다. 치밀한 과정의 복수와 그 복수가 성공해도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기에 결말은 씁쓸한 맛이 남았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신분은 인질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인질범이지요. 그리고 이제 하나의 연극이 시작됩니다. 바로 인질극입니다." - P55.56

"저는 여기서 재판을 하려고 합니다. 재판정이 아닌 산속에 있는 산장에서 재판을 하려고 하니 이 역시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는 재판정에서는 열리지 못했고, 앞으로도 열릴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 오래전에 열렸어야 할 재판을 이제야 열게 되었습니다.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수 년 전에 어떤 범죄 행위가 있었는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했음에도 재판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재판을 지금 열고자 하는 것입니다." - P259

진실을 알아도 고통스럽고 알지 못해도 고통스럽다. 복수 역시 마찬가지다. 해도 괴롭고 안 해도 괴롭다. 그럴진대 안 하고 오래오래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사느니 빨리 하고 끝내는 게 낫지 않겠는가. - P3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상 디자인과를 졸업한 한아는 동양화과를 졸업한 절친 유리와 함께 작은 옷 수선집을 운영하고 있다. 업사이클링이 주 목적인 가게를 운영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한아는 저탄소생활을 실천하려 애쓰는 중이다. 물론 유리도 함께 말이다.


한아에게는 대학생 때부터 11년 동안 만난 남자친구 경민이 있다. 경민이 한아를 대하는 온도와 한아가 경민을 대하는 온도가 조금 달라 한아는 늘 남자친구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유성우를 보기 위해 캐나다로 훌쩍 떠나버린 경민의 여름휴가도 늘 있는 일이라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건 당연하다.

그렇게 경민이 혼자 여행을 떠나고 돌아온 뒤에 한아는 왠지, 아니 분명히 그가 달라졌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한아를 대하는 경민의 온도가 그녀 자신이 경민을 대하는 온도보다 조금은 더 뜨거워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경민과 유리는 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캐나다에 다녀온 후로는 조금 괜찮아진 것 같다.

그러던 중에 한아는 경민이 캐나다 여행 이전의 경민이 아니라는걸, 심지어 같은 지구인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데...




소설 시작에서부터 느낀 점은 한아가 참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게로 옷을 수선해달라고 가져온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태도를 보였다. 할머니가 입던 옷, 친구들끼리 맞춘 옷, 그리고 세상을 떠난 사람의 옷을 가져와 수선해달라고 하는 낯선 손님들의 감정에 깊이 공감했다. 동업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유리에게도 다른 느낌으로 다정했고, 무심하긴 해도 여전히 좋아하는 남자친구 경민에게도 그랬다. 또한 한아는 지구를 살아가는 동식물 등 모든 생명체에게도 다정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업사이클링이 목적인 옷 수선집을 운영하는 것일 터였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경민이 혼자 계획한 여행을 훌쩍 떠나버리고 난 뒤 한아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선 오랜만에 마주한 경민은 여행 이전보다 한아에게 조금은 뜨거워졌다. 무심함은 온데간데없고 다정하게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유리는 그런 경민을 보며 철들었다고 했지만, 한아는 왠지 모르게 경민이 낯설었다.

그러다 경민의 집을 찾아간 날, 그의 입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라고 만다. 경민의 껍데기를 가진 알 수 없는 생명체를 국정원에 신고하기까지 한다.


한편, 싱어송라이터 '아폴로'의 공식 팬클럽 회장인 주영은 아폴로가 캐나다로 여행을 떠난 뒤에 사라졌다는 걸 알고 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아폴로가 뜨기 전부터 팬이었던 주영을 익히 알고 있던 기획사 사람들과 매니저는 자신들도 행방을 모른다며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다행히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아폴로가 캐나다에서 사라지기 전에 사용한 카드 내역과 렌터카 등과 관련된 자료였다. 주영은 아폴로의 흔적을 좇다가 캐나다에 소형 운석이 떨어졌을 때 함께 있었던 이들의 뒤를 캤다. 그중 한 사람이 경민이었다.

한아의 신고를 받은 국정원 직원 정규는 신고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모처에서 거대한 초록빛 기둥이 뿜어져 나왔었다는 걸 알고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영과 정규는 경민이 없는 경민의 집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시각 경민의 껍데기를 쓴 외계인은 한아에게 프러포즈를 하려던 중이었다.

소설은 여행을 다녀온 남자친구가 이전과는 다른, 그것도 남자친구의 껍데기를 쓴 외계인으로 앞에 나타나 일어나는 해프닝을 그리고 있다. 원래의 이름은 발음하기 어려워서 일단 계속 경민으로 부르게 된 외계인은 고향 행성에서부터 한아를 망원경으로 보고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2만 광년을 날아와 원래의 경민에게 우주 자유여행권을 주며 경민의 몸과 맞바꾸었다. 이 부분에서 원래의 경민이 한 행동에 분노했지만, 초점은 떠난 그쪽이 아닌 경민의 껍데기를 한 외계인이라는 게 중요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엄청난 교통비, 우주를 가로질러 오기 위해 빚을 내서 왔다는 사랑이 가득한 외계인이었다. 이후 한아가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인 뒤 두 사람의 사랑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었다. 외계인과의 연애는 꽤나 귀엽고 엉뚱해서 재미가 있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건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아의 캐릭터 설정에서부터 친환경적이었는데, 외계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지구를 통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들을 무겁지 않게, 그러면서 주제에 어긋나지 않게 그려냈다. 로맨틱 코미디와 환경 문제의 균형을 잘 맞추고 있었다.


읽는 내내 즐겁고 코믹해서 종종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외계인과의 사랑이 한결같아서 내 마음까지 따스해졌다.

오랜만에 읽는 정세랑 작가의 소설인데 역시나 너무나 재미있었다.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서 좋았고, 환경 문제까지 잘 어우러지게 담아낸 소설이라 의미까지 남겼다. 좋은 책을 읽어서 기분이 참 좋다.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 P118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 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너는 너무 멀리 있는데, 나는 왜 널 가깝게 느낄까. 내가 네 옆에 있는 바보 인간보다 더 가까울 거라고, 그런데 그걸 넌 모르니까, 전혀 모르니까, 도저히 잠들 수 없었어." - P102

"네가 없으면 내 여행은 의미가 없어져."
한아는 망설임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2만 광년이란 엄청난 거리를, 망설임 없이 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 P1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0년 전 사르다 가족의 막내딸 17살 아나가 끔찍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아나의 몸은 토막이 나 있었고 그 토막 난 신체 곳곳에 불에 탄 흔적이 있었다. 누가 아나의 몸에 이런 짓을 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의문스럽게도 너무나 빠르게 종결되었다.


사르다 가족 모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아나의 사건으로 둘째 리아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것도 아나의 장례식이 열리는 성당에서 말이다. 엄마는 기함하며 난리를 쳤고 첫째 카르멘은 언제나 동생들에게 그랬듯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버지 알프레도만이 리아를 이해하며 그녀를 다독였다.

아나와 유독 친밀하고 다정한 사이였던 리아는 더는 가족들과 함께 살 수가 없어서 돈을 모아 아르헨티나를 떠나 스페인으로 떠났다. 순례자의 길이 끝나는 지역에 서점을 연 그녀는 오로지 아버지와만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나의 사건 수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언니 카르멘과 언니와 결혼한 훌리안이 찾아온다. 아버지가 리아의 주소를 절대 알려주지 않았을 게 당연하기 때문에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건지 의문스러웠다. 카르멘이 찾아온 이유는 자신의 아들 마테오가 사라졌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리아의 서점에서 카드가 사용됐다는 걸 알렸다. 그러면서 마테오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들이 다시 이곳을 찾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언니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리아는 알겠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는데, 떠나려던 카르멘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유골재를 건네주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편지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는 죄책감과 이제 아나의 죽음을 밝힐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책임감이 리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30년 전에 일어난 아나의 죽음이었다. 고작 17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가 몸이 토막 나고 불에 그을린 채 발견됐다는 사실은 가족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더욱 오랫동안 이 사건을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빠르게 수사가 종결되었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아나의 죽음을 중심에 두고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사건에 대해, 그리고 비밀과 진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첫 번째로 등장한 사람은 아나의 죽음 이후 신이 없다고 믿게 된 둘째 언니 리아였고, 그다음은 카르멘과 훌리안의 아들 마테오였다. 마테오는 독실한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무신론자인 할아버지 알프레도와 가깝게 지내면서 신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었다.

아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마르셀라는 친했던 친구이니만큼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다. 심지어 가족들, 언니들조차 모르는 아나의 비밀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건 아나가 말하지 않았다. 또한 아나는 마르셀라의 무릎에서 숨을 거뒀는데, 이후 사람들을 부르러 가려던 그녀의 머리에 성당의 대천사상이 떨어지는 바람에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말았다. 엘메르는 아나를 첫 사건으로 맡았던 법의학자였었다.

그리고 후반으로 가면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훌리안과 카르멘의 이야기가 펼쳐져 충격을 줬다. 에필로그에서는 알프레도가 딸 리아와 손자 마테오에게 남기는 편지가 등장했다.


초반에 리아의 시점에서 등장한 아나의 사건은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끔찍하고 안타까운 것이었다. 독실한 가족들 사이에서 신은 없다고 선언한 리아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아버지 역시 종교적 믿음에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나중엔 리아처럼 무신론자로서 그녀의 견해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정말 든든했다. 여기에 알프레도에게 영향을 받은 마테오는 스스로 종교적인 믿음에 대해 선택하는 현명한 모습을 보여 리아와 잘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프레도 역시 그런 걸 느꼈기에 두 사람이 함께 보라며 편지를 남긴 것일 터였다. 진실을 모두 다 알고 난 후에 알프레도가 두 사람에게 편지를 남긴 심정이 이해가 됐다. 두 사람이 함께라면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절망으로 쓰러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을 향해 한 발자국씩 가까워지면서 예감되던 게 있었는데 역시나 어긋나지 않았다. 아나와 관련된 사건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명백하게 그를 의심했기에 놀랍지 않았지만, 아나를 그렇게 만든 자가 누구였는지 밝혀졌을 때 혐오스러움에 몸서리가 처졌다. 신을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고도 천벌을 받지 않은 건가 싶어 불쾌함이 하늘을 찔렀다. 독실한 신자의 모순이 노골적이라 혐오스럽고 역겹기까지 했다. 자기만의 정의에 빠져 있는 것 또한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결말에 가능성으로 열어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 말마따나 신이 있다면 당연히 천벌을 받을 거라고, 제발 그들에게 지옥과도 같은 벌을 내려주기를 빌었다.


범죄 스릴러를 기본으로 하고 신에 대해서 말하는 책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든, 아니면 돌려 말하든 사람들은 무신론자를 좌절한 군상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급기야 종교적 믿음을 갖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악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예단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사람은 결코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논리다. - P18.19

내 믿음이 두려움과 내 주변 사람들이 떠받드는 하느님─혹은 다른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으면 나쁘고 끔찍한 일, 즉 세상의 종말이 올 수도 있다는 가정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처럼 하느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갖도록 교육받고 자랐다. 하지만 어떤 자들이 내 동생을 죽인 것도 모자라 시신을 불태워 없애버리려고 하다가 결국 토막까지 내고 말았다. 내가 믿음을 버린대도 얼마나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 P21

여성들은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워오지 않았던가? 임신중지는 자기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내가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 거지?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한다. 일단 결정을 내린 이상, 여자들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아나는 결정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느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 것뿐이다. - P324.325

어쩌면 믿음이라는 건 순진한 속임수일지도 몰라. 적어도 여러 가지 소박한 속임수에 의해 지탱되는 삶에서 말이다. - P4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유리 ×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성재가 떠난 뒤 수진에게 남은 건 아픈 반려묘와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런 수진에게 20년 지기 친구 영인이 그녀의 감정을 사겠다고 말했다. 영인의 남편이 어플로 조건만남을 한 이후 둘의 관계가 이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골치 아픈 감정에 더 이상 휘둘리기 싫었던 수진은 영인과 함께 감정전이센터를 방문해 적합도 검사를 받고 기준치에 도달했다는 연락을 받은 뒤 자신에게 남은 감정을 영인이에게 전이했다.


김서해 × 폴터가이스트   고등학생 세인이에게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엄마는 세인이를 데리고 여러 병원, 심지어는 무당까지 찾았지만 소리를 없애지는 못했다. 그렇게 익숙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소리와 살아가던 세인에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전학생 정현수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로 친구가 없는 세인이를 현수는 왠지 재미있어하며 다정하게 대했고, 세인이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어릴 적 사고에 대해 털어놓았다.


김초엽 ×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나'는 인공장기 배양회사에서 일하다 눈알 공포증으로 그만두고 인공피부를 만드는 '솜솜 피부 관리숍'에 취직했다. 그곳은 스스로를 동물이나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혹은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인공피부를 만드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주 잘 적응을 하며 우수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사장이 질색하는 의뢰 신청자 수브다니가 찾아온다. 사장이 몇 번이고 거절했는데 매번 찾아오는 수브다니는 자신의 신체를 금속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금속 느낌이 나는 재질이 아닌 금속 자체로 바꾸길 원해서 사장은 늘 거절을 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수브다니는 인간화를 한 안드로이드였다는 게 밝혀졌다.


설재인 × 미림 한 스푼   고등학교 신입생 주경은 학교에 가게 되면 야간 자율 학습을 신청하겠다 다짐했다. 가정 폭력을 견딜 수가 없었기에 집에 되도록이면 늦게 오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새 학기가 시작되는 당일 새벽,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기화했다. 주경은 더 이상 학교에 갈 수가 없어 폭력에 내몰린 상황이 됐다. 사람들이 기화하는 이유는 외계 존재 '솜새끼'가 지구 운영을 종료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솜새끼는 특별히 누군가는 살려주겠다고 하며 여러 작가를 모아 종말에 관한 글을 쓰게 하는 서바이벌을 열었다. 그리고 주경은 아무도 내려가지 않은 빌라의 지하층에서 미림을 만났다.


천선란 × 뼈의 기록   장의사 안드로이드 로비스는 유가족 없이 홀로 생을 마감하는 노인, 혹은 생전에 로비스에게 염을 맡긴다는 의사를 남긴 이들의 마지막 길을 도왔다. 로비스는 고인을 존중하며 그들의 몸을 보며 삶을 반추했다. 로비스는 89살의 노인, 항공우주군 대위의 첼의 여동생, 로봇을 좋아했던 어린 소년 등을 차례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비스는 매일 잠깐이나마 앉아서 대화를 나눴던 청소부 모미를 스테인리스 침대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다섯 작가의 짧은 이야기가 담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당연히 천선란 작가의 <뼈의 기록>이었다. 천선란 작가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마음을 울리기에 이번에도 기대가 됐는데 어김없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고 말았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 속에서 장의사 안드로이드 로비스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에게 염을 맡긴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헤아리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러다 로비스가 가깝게 지낸 모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마치 인간과도 흡사한 감정으로 모미의 죽음을 애처롭고 안타깝게 여겼다. 어릴 적 화재로 인해 모미의 몸에 화상 흉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로비스는 그녀를 화장시킬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처음으로 규칙을 위반하는 선택을 한다.

천선란 작가의 책 <랑과 나의 사막>과 비슷하게 미래를 배경으로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그런지 비슷한 결의 감정을 느꼈다. 감정이 없어야 마땅하지만 가깝게 지낸 이의 죽음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슬퍼하고 애도하는 안드로이드의 이야기가 사람의 그것보다 더 감정적이고 애틋해서 먹먹한 여운이 남았다. 엔딩은 자못 쓸쓸했지만 그럼에도 로비스가 의연했기에 오히려 내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표제작인 이유리 작가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이별 뒤에도 여전히 남은 사랑의 감정을 필요한 다른 이에게 이식하는 감성 SF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이별이 고통스러운 이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술은 없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소설 속 수진과 영인이 처한 상황에서 감정이 꼭 들어맞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감정을 무사히 전이하고 나서 영인의 남편이 가지는 의문에 나도 모르게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후반에 등장한 어떤 캐릭터의 감정 전이 시술에 관한 견해나 행동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때 깊이 빠져들었던 감정을 완전히 소거했을 때 과거의 사랑을 과연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의문을 남겼다.

<폴터가이스트>의 두 고등학생의 이야기는 처한 상황이 끔찍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귀여운 느낌이 있었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는 신선한 소재에 안드로이드를 연결 지어 흥미를 느끼게 했다. <미림 한 스푼>은 그럼에도 인간은 마지막까지 서로를 사랑하며 자신도 모르게 구원하는 이야기라 좋았다.

아기자기한 제목의 책 안에 담긴 여러 이야기들이 공통의 장르 안에서 다양한 재미를 줘서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그 순간 로비스는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죽음이란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다르며, 볼 수 없는 존재의 삶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뼈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로구나. 천선란 <뼈의 기록> p.277

"감정이라는 게, 무슨 장기 이식하듯이 누구 것을 빼서 다른 누구에게 넣는다고 그게 진짜 자기 것이 될까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유리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p.30

종말을 바란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통증이라고는 없는 마지막을 원했다. 주경 역시 그랬다. 종말은 부드러워야 했다. 종말이 아프다면, 자신을 멸시하며 덜 아픈 현재를 꾹 참아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설재인 <미림 한 스푼> p.1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