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여름 - 류현재 장편소설
류현재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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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에게 유독 중형을 내리는 검사 정해심은 치매로 입원한 아버지 정만선이 계신 요양원의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가 파킨슨병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를 욕조에서 범하려다가 들켰다는 것이었다. 해심은 30년 넘게 곁에서 봐온 아버지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치매라는 병이 성정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급히 요양원으로 향한 해심은 보호사들에게서 두드려 맞아 얼굴이 엉망인 아버지를 보게 된다. 그들이 아무리 말리려 해도 아버지가 할머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피해자 할머니는 아들 하영석이 데리고 가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말을 전했다.

해심은 성범죄에 특히 엄격하지만 막상 아버지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결국 CCTV를 보여달라고 청하는데, 안타깝게도 방과 복도 등에만 설치되어 있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CCTV를 보다 보니 아버지와 피해자 할머니 고해심 씨가 최근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확인해 보려는 해심에게 할머니의 아들 영석이 나타나 합의금으로 1억을 불러 난감해졌다.




아버지로 인해 해심이 곤란해진 이유는 '황금엉덩이'라는 별명을 가진 검사였기 때문이다. 고소인의 엉덩이를 1초 스쳤다는 피고소인에게 중형을 때린 이후 생긴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해심은 성범죄에 유난히 예민했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의 강간 미수 사건이 일어났으니 곤혹스러워지는 건 당연했다.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상황으로 인해 아버지가 저지른 일이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녀는 CCTV라도 확인해 보려고 했지만 욕실에는 CCTV가 없어 자세한 정황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피해자 할머니의 아들 하영석이 합의금을 어마어마하게 높게 부른 게 그녀의 오기를 발동시켰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녀는 혼자서 사건을 파헤치려고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었던 건 피해자 할머니의 이름이 해심과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할머니가 남해의 같은 고향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다.
이후 시점이 바뀌어 해심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해심의 아버지와 만선의 아버지, 그리고 해심이 거의 키우다시피 한 덕자와 덕자의 아버지 하용범까지 지독하게 얽힌 관계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소설이 거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들 사이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 이전의 이야기를 통해 이 모든 건 하용범 때문에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욕심이 많으면서도 비굴한 인간이었고, 그 무엇이든 남의 것만 탐하려 드는 탐욕이 가득했다. 오죽하면 하용범의 딸 덕자가 아빠보다 자신을 키워준 해심 언니를 더 따랐을까 싶다.
해심과 만선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시대로 인해 자신들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가 없었다. 결국 '꽃섬'이라는 작은 섬에서 두 사람은 만나 사랑을 꽃피웠고, 그 모습을 덕자만이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과거가 바깥으로 드러날 수 없었던 건 만선 아버지의 배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 이면에 숨은 또 다른 비밀 때문이었다. 그리고 질투심 많은 누군가의 거짓말과 탐욕이 그들을 갈라놓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그따위 짓을 저지른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예상했던 것보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펼쳐졌을 때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럴 줄은 몰랐다는 마음에 배신감이 내게도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는 해심과 만선의 사랑, 만선과 해심을 지켜보는 덕자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만선의 아내 문희의 사랑 또한 담겨 있었다. 하지만 문희의 사랑은 평범을 뛰어넘어 삐뚤어진 것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자신을 향해 있지 않은 사랑을 구걸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어도 그 삐뚤어진 마음을 놓지 못하던 문희가 마지막엔 가엽기도 했다.

스릴러로 시작되어 여러 사랑으로 끝을 맺었던 소설이다. 젊은이들의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향해 오랫동안 마음에 품은 감정들이 변하지 않거나 혹은 변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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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질문이지만 아직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세상에 옳은 일이라는 게 있을까? 누군가에게 옳다면 누군가에게는 옳지 않을 수도 있는데. - P142

"그런 게 사랑이라면, 평생 외롭고 쓸쓸히 살아가며 원망하는 게 사랑이라면요. 차라리 저는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사랑하지 않아도 외롭고 쓸쓸한 건 마찬가진데 저라면 사랑하면서 외롭고 쓸쓸한 쪽을 선택할 거 같은데요." - P255.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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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
디파 아나파라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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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홉 살 자이는 엄마, 아빠, 누나 루누와 함께 빈민가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 가난한 게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걸 신경 쓰기엔 자이가 아직 어린 걸지도 몰랐다. 자이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건 TV 수사물이었다. 가난해서 딱히 뭘 할 게 없었던 자이가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빈민가에 살던 바하두르가 사라진다. 동네 어른들은 걱정을 했지만, 자이와 같은 반이었던 바하두르의 아버지가 유명한 술주정뱅이였기 때문에 가출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바하두르의 친구 옴비르도 사라지고, 이후로도 빈민가에 사는 여러 아이들이 없어졌다.
자이는 수사물을 즐겨본 자신의 감을 믿고 친구 파리, 파이즈와 함께 사라진 아이들을 찾기로 한다.



외적으로는 계급이 사라진 세상이 온 지 오래되었지만, 알게 모르게 계급은 존재한다. 예전엔 그 계급이 신분이었다면, 요즘엔 재산이 보이지 않는 계급을 나눈다. 재산으로 계급을 나누는 것과는 별개로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로 인해 그 빈부격차가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자이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철이 없어서 그런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친한 친구인 파리가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이라도 되려고 하는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달리기를 잘하는 루누 누나가 육상 대회에 나가 우승해 평범하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여자의 삶을 거부하던 것과도 달랐다. 자이는 세상 돌아가는 것보다는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 성격을 가진 자이가 빈민가 아이들의 실종 사건으로 꼬마 탐정이 되어 수사를 시작했다. 학교를 가야 하는 학생이었고, 가난하기 때문에 수사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지만, 자이는 나름의 주관을 가지고 사라진 아이들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처음엔 아이들이 사라진 사건을 단순 가출로 여겼으나 나중엔 그게 아님을 알고 사건이 점점 심각해졌다. 빈민가의 힌두교도 아이들이 사라졌다가 나중엔 이슬람교 아이들까지 사라졌고, 너무 어려서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까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빈민가를 좋게 보지 않는 경찰들로 인해 신고를 했다가 빈민가를 밀어버릴까 봐 마을 사람들은 전전긍긍해 했고, 자이의 엄마는 언제든지 집을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싸서 문 옆에 놔둘 정도였다.
인도에서 벌어지는 사회적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종교 갈등과 빈부격차, 도시를 가득 메운 스모그로 인한 환경 문제, 그리고 너무 어린아이들이 일을 하고 착취당하는 등의 온갖 세태가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태도가 안일하게 느껴졌다. 그랬기에 아이들이 계속해서 실종이 되는데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설마 사라질까 싶었던 캐릭터마저 실종이 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이전까지 실종된 아이들은 자이와 직접적인 친분이 있다고는 할 수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 캐릭터는 너무 가까운 존재라 제발 무사히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간절함을 배반이라도 하듯 상황은 현실적으로 이어졌다.

인도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작가의 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아이들은 사라져도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는가 보다. 태어날 때부터 소외되고 불안함을 안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아홉 살 자이가 주인공이었지만 내용은 한없이 무거워서 도무지 즐겁게 읽을 수가 없었다. 제발 아이들은 걱정 없이 평범하게, 안심하고 살아가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어릴 때 죽는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인생을 살다 간 걸까, 아니면 절반만 살다 간 걸까, 그것도 아니면 살았다고도 할 수 없는 걸까? - P399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다 우리 잘못인 거지. 우리 집에서 티브이가 사라지면 우리 중 누가 훔친 거고, 우리 중 누가 살해되면 우리끼리 싸우다 죽인 거고." - P198

"오늘이든 내일이든, 인간은 누구나 가까운 사람을 잃게 될 거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넝마주이 대장이 말한다.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늙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고. 하지만 그들조차도 어느 순간에는 깨닫게 될 거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언젠가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는 걸. 우린 이 세상에서 한 점의 먼지에 불과해. 햇빛을 받으면 한순간 반짝이다가 곧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먼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도록 해라."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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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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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인 '나'는 마감을 앞두고 글이 써지질 않아 시간만 보내고 있다.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기엔 아까워서 <천일야화>를 읽게 되는데, 문득 16년 전 학창 시절에 헌책방에서 발견한 사야마 쇼이치의 <열대>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처음엔 그저 묘한 이야기라 여겼던 책은 점점 흥미를 이끌었고 아껴서 읽을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 책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자기 전에 분명 머리맡에 뒀던 책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 책을 다시 구하려고 해도 본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여태까지 <열대>의 결말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에 다니던 직장의 친구가 '침묵 독서회'라는 곳에 함께 가자며 초대를 했다. 여러 나이대의 사람들이 모여 각자 그룹을 이뤄 가지고 온 책에 대한 수수께끼를 이야기하는 그 모임에서 나는 <열대>를 가지고 있는 한 여자를 보게 된다. 곧장 그 그룹에 참석하게 된 나는 여자와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열대>를 끝까지 읽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기이한 말을 듣는다. 그러면서 그녀는 <열대>를 읽은 사람들의 학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책 제목과 같은 <열대>라는 책을 둘러싸고 시작된 기이한 이야기였다. 마침 서막을 장식한 소설가의 이름이 모리미였다는 게 묘한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열대>를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다는 점 또한 기묘했다.

소설가 모리미에서 시작된 <열대>를 향한 갈증은 시라이시라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녀는 삼촌의 가게에서 일을 하다가 같은 건물에 다니는 직장인 이케우치를 알게 됐고, 그를 통해 <열대>를 탐구하는 학파에 초대받았다. 그 학파에서 <열대>의 작가 사야마 쇼이치를 알았던 지요 씨를 만나 책의 비밀에 한층 가까워지지만, 지요 씨는 갑자기 학파를 탈퇴하고 만다. 거기다 이케우치는 학파를 탈퇴한 지요 씨를 쫓아 교토로 향했다가 연락이 끊기기까지 한다.
여기까지가 <열대> 바깥의 이야기였다. 그 누구도 결말까지 읽은 적이 없는 책을 향한 탐구가 있었고, 결말을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은 마음에 매달리는 이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열대>의 실체를 의심하며 자신이 읽은 것만이 진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같은 책을 읽고 서로 다르게 기억할까 싶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으나 책은 읽는 사람의 시선만을 온전히 따라가기 마련이라 기억하는 것도, 해석하는 것도 저마다 달라지는 거라 생각됐다.

이후 소설은 <열대> 안의 <열대>로 이어졌다. 기억을 잃고 섬에 표류한 남자가 사야마 쇼이치를 만나 '네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마왕이라 불리는 자를 만나고, 그의 딸 지요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신드바드라는 노인을 만나고 또 어떤 이에게서 과거의 이야기를 듣게 되기도 하는 등 이야기가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3장에서 등장한 <열대>의 작가 사야마 쇼이치를 알고 있고 만나 친분을 쌓았던 이들이 4장인 <열대> 이야기 속에 등장한 게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 속 또 다른 이야기였지만 현실 세계의 반영인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타지 모험 같은 이야기였지만 그 때문인지 좀 묘하면서도 으스스 한 느낌을 받았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대체 어떻게 될까, 사라진 <열대>의 작가 사야마 쇼이치는 어떻게 된 걸까 궁금해하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끝에 다다랐을 때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과 비슷한 느낌의 메타픽션이었다. 현실과 판타지가 섞인 환상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끝이 났지만 완전히 끝난 게 아닌 또 다른 시작이 된다는 게 이 책이 주는 묘미였다. 그런 부분을 초반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읽는 동안은 그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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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누가 뭘 해서 어떻게 됐다는 식으로 요약해 봤자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등장인물과 함께 그 세계에 살면서 푹 빠져 읽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그게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 P41

과거에 『열대』라는 소설을 읽기 시작한 우리는 어느새 『열대』라는 세계 그 자체를 살기 시작해 각자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대단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 『열대』만이 진짜인 겁니다. - P245

책을 펴고 읽는 동안 세계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책을 덮으면 세계는 어디에도 없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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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3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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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챠의 재판을 앞두고 알료샤는 스네기료프의 아들 일류샤를 찾았다. 마침 일류샤를 놀리고 외면하던 콜랴와 그의 친구들도 찾아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낸다. 일류샤가 병에 걸려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반은 미챠를 찾아갔다가 스메르쟈코프에게도 찾아간다. 미챠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말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다. 자신이 스메르쟈코프에게 사주해 아버지를 죽인 것인지, 아니면 믿고 있던 것처럼 미챠가 죽였는지 말이다. 반면에 알료샤는 큰형이 아버지를 죽인 게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후 미챠의 재판이 열리게 되는데, 귀족은 물론이고 그 지역 사람들 모두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존속 살해라는 크나큰 죄를 지은 미챠의 재판에서부터 3권이 시작될 거라 예상했지만, 엉뚱하게도 알료샤가 잠깐 마주쳤었던 일류샤와 그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3권이 시작됐다. 아직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 콜랴와의 대화를 통해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속내를 엿본 기분이라 조금 불쾌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알료샤와 콜랴의 대화가 3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후엔 이반과 알료샤가 각각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미챠의 죄에 대해,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그의 탈출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이어졌다. 큰형의 죄를 두고 둘째는 유죄, 막내는 무죄라고 여긴 것은 평소에 미챠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었다. 신을 믿으며 선함을 온몸으로 보여줬던 알료샤와 모든 사건에서 약간은 떨어진 채 관망하던 다소 냉소적인 이반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다 스메르쟈코프를 통해 이반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버지의 죽음을 사주했느냐 아니냐에서 시작된 논쟁은 미챠의 유무죄로 이어졌고, 급기야 이반은 섬망 증세까지 나타나 자신 안의 악마와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이반은 자기도 몰랐던 속내를 스메르쟈코프에게 들켜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미챠와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겠지만 본심은 흡사할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참아주기 힘든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같은 아버지로 둔 아들이었으니 말이다.

본격적으로 미챠의 재판이 시작되면서 소설을 읽기가 버거워졌다. 변호사와 검사 각각 주장을 펼치는 장면이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좀처럼 집중이 안 됐다. 몇 십 페이지 가량 의식의 흐름대로 자기주장을 하고 있다고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
그러면서 2권까지는 미챠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여겼는데, 3권에 이르러서는 대체 누가 죽인 건지에 관한 의문만 잔뜩 생기게 해놓고 정작 제대로 된 답은 해주지 않아 답답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미챠나 스메르쟈코프나 정확한 답은 하지 않고 긴가 민가 하게 만들어서 갈수록 의문만 생겼다. 결국 미챠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사실은 그가 죽인 게 아니라 스메르쟈코프라고 한다. 이것도 해설을 읽고 알았다. 본문에 확실히 나왔을 수도 있지만 읽다 보니 머릿속에 잡생각만 많아져서 인식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악이 당연하다는 듯 존재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알료샤와 대화를 하던 어린 소년 콜랴가 그랬고,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으며 실제로도 위해를 가한 미챠, 아버지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경멸했던 이반이 있었다. 스메르쟈코프는 물론이고 미챠의 약혼녀 카체리나,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받은 그루셴카까지 선하면서도 악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미챠의 재판을 보러온 사람들은 그가 존속 살해를 저질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재판이 더없는 활기를 띤 것이었다.
소설 속에서 알료샤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그런 면이 정도에 따라 드러났던 걸 보면 보편적인 인간은 선하고도 악한 마음이 존재하기 마련인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알료샤가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갈수록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렀던 소설이라 재미있진 않았다. 2년 전에 <전쟁과 평화>를 읽을 때도 갈수록 흥미를 잃었었는데, 러시아 소설과는 잘 안 맞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내 이해력이 모자란 탓도 있을 듯하다. 그냥 읽었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겠다.
언젠가는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만 당분간은 재미있는 책을 좀 읽어야겠다.


​​​​​​​

"아무도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는 것이 이 뒤죽박죽 카라마조프 집안의 특성인데, 대체 누가 그들 중에서 잘못한 자를 가려낼 수 있으며, 그들 중 누가 누구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 어떻게 계산해낼 수 있겠습니까?" - P311.312

"나는 말이에요, 알료샤, 이따금 끔찍하게 많은 악한 짓과 온갖 더러운 짓을 닥치는 대로 저지르는 생각을 하곤 해요, 오랫동안 몰래 그런 짓을 하는 거죠, 그러다가 갑자기 다들 알게 되는 거예요. 다들 나를 에워싸고 손가락질을 해대면, 나는 태연히 그들 모두를 바라봐주는 거죠. 정말 기분좋아요." - P143

"지금 제가 ‘그 밖의 무슨 다른 것‘이라고 한 건, 도련님 자신도 그때 어쩌면 부친의 죽음을 간절히 바랐을 거라는 뜻입니다.
(……중략)
직접 죽이는 건─도련님이 제 손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었을 테고, 더구나 원하지도 않았지만, 다른 누가 죽여주길, 그렇게 해주길 원했을 테죠, 도련님은 그걸 원했던 겁니다요." - P208.209

"우리의 본성은 온갖 가능한 모순을 함께 품을 수 있고, 두 개의 심연을, 즉 우리 위에 있는 심연, 드높은 이상의 심연과 우리 아래에 있는 심연, 가장 저열하고 악취를 풍기는 타락의 심연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중략)
‘이 방종하고 걷잡을 수 없는 본성을 지닌 그들에겐 드높은 고결함의 느낌만큼이나 저열한 타락의 느낌이 꼭 필요하다‘는 말씀─이것은 참으로 옳습니다. 정말로 그들에겐 이 부자연스러운 혼합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두 개의 심연, 여러분, 동시에 두 개의 심연─이 느낌이 없다면 우리는 불행하고 만족을 얻지 못하며, 우리의 존재는 충족되지 못합니다." - P376.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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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감각
김보영 지음 / 아작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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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특수기면증에 걸린 누나가 동생에게 편지를 보낸다. 규칙적으로 의식을 잃는 증상을 가지고 있던 누나는 이 섬에 들어온 이후에 사람이 누울 만한 크기로 나무 상자를 잘라 창문과 숨구멍을 내고 그 안에 들어가 의식을 잃는 동안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자신을 보호했다.
땅 밑에 지하 미로를 탐사하는 '하강자'인 이윤형은 '나락'의 새로운 루트를 발견했다는 민석의 연락을 받는다. 아내는 땅 아래로 내려갔다가 사흘 만에 발견되어 폐수종으로 죽기 직전까지 갔었던 윤형을 말리지만, 뼛속까지 하강자인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길을 나섰다. 하강 도중 팀원 몇 명이 다쳐 아래로 내려갈수록 인원이 점점 줄었고 민석 역시 포기하자는 말을 했지만, 윤형은 마지막까지 아래로 내려가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촉각의 경험
뇌신경학 연구소 이진우 박사가 그토록 구매하고 싶어 하던 '뇌파공명기'를 연구소를 소유한 제약회사 사장인 유시헌이 사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시헌은 스스로가 첫 번째 피험자가 되겠다고 하며 조건을 걸었는데, 자신의 클론과 뇌를 연결해 그의 꿈을 보고 싶다고 했다.
다섯 번째 감각
감각이 유난히 예민했던 언니 채세연은 동생 채연주와 함께 있다가 아이 대신 달려오는 차에 치여 죽었다. 세연은 죽을 때까지 연주를 향해 습관처럼 입을 오물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언니가 죽은 이후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쓰인 편지가 도착한 이후, 경찰들이 연주를 찾아와 언니에 대해 물었다. 언니가 스스로를 초능력자라 믿는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경찰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연주는 편지를 보낸 것 같은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우수한 유전자
스카이돔에서 키바 시민을 찾아온 '키바 복지회'의 지훈은 그들의 생활 환경 전반을 향상시켜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지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유전자 판별기로 태어난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완벽한 외모의 200살의 수명을 가진 스카이돔 사람들과 과거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며 50살 정도까지밖에 살지 못하는 키바인들이 서로를 이해할 리가 없는 게 당연했다.
마지막 늑대
주인에게서 도망친 애완동물 알비노, 일명 알비는 집인간이라 불렸다. 그는 늑대를 찾아 도망친 것이었는데, 늑대라 불리는 노파를 만난 이후에는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한다.

스크립터
엄청 오래된 게임을 인수한 회사에서 게임 속 사냥꾼 차림의 남자를 설득하기 위해 직원을 파견한다. 사냥꾼은 이 게임의 초기 이벤트 당첨자이고 평생 무료 사용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게임에 특이한 계약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한 명이라도 이 게임을 계속하는 사람이 남아 있다면 서비스를 중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거울애
늦은 시간에 강태호의 집 문을 전 연인이자 정신과 의사 연정이 두드렸다. 끝까지 열어주지 않으려고 했던 문을 열자, 연정은 열댓 살로 보이는 소희라는 여자애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왔다. 연정은 태호에게 소희를 맡기면서 어딘가로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많은 곳에 가지 말고 대중교통도 이용하면 안 되고, 무엇보다 소희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다. 태호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칼에 찔려 이내 세상을 떠난 사람의 유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노인과 소년
예배당을 지은 늙은 목공이 쓰던 의자에 앉아 쉬던 늙은 사제에게 어린 사제가 놀라 다가왔다. 잠깐 잠이 든 듯했던 사제에게 소년은 같은 얼굴을 가졌지만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았던 여러 사람에 대해 묻는다.
몽중몽
'여몽'은 어제 죽고 오늘 다시 태어났다. 꿈에는 '명일'이 늘 나와서 형일 때가 있었고, 약사일 때도 있었다. 여몽은 언제나 꿈을 기억하며 꿈을 꾸고 또 꾸는 생을 반복한다.




열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에서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표제작인 <다섯 번째 감각>과 <거울애>였다.

<다섯 번째 감각>은 언니의 죽음 이후 의문스러운 사람들의 방문으로 인해 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되짚어보는 동생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SF 장르의 소설집이긴 했으나 주어진 문장으로 소설 속 초반 상황을 판단할 땐 대체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게 되는 것 같다. 언니가 대체 왜 죽었는지, 습관처럼 입을 오물거렸으며 죽을 때까지도 동생을 향해 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인지 초반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언니가 초능력자라고 믿는 사이비 종교에 빠졌었다는 경찰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직접 찾아 나서게 되면서 이 이야기의 설정이 반전처럼 다가왔다. 입을 오물거리는 행동이 무슨 뜻인지, 듣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음악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감동을 주는 것인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비밀이 어느 정도 밝혀진 이후에는 깊은 울림을 느끼며 뭉클해졌었다.

<거울애>는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일지 유추했는데, 얼핏 들어맞았던 작품이었다. 정신과 의사인 전 여자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남자와 의문스러운 소녀의 동행을 통해 마주친 사람들의 마음을 아무런 티가 묻지 않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무섭기도 했고, 어떨 땐 안쓰러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감정을 바깥으로 오롯이 표출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강태호처럼 스스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타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온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 의사인 연정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소희를 맡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촉각의 경험>은 생각의 틀을 넓혀준 작품이라고 기억할 것 같다. 클론의 꿈을 보고 싶다는 제약회사 젊은 사장의 바람 덕분에 박사는 그토록 연구하고 싶었던 기구로 이 일에 착수한다.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클론은 아기와 흡사한 상태였기에 도무지 꿈을 꿀 수가 없었는데, 연결된 뇌파를 통해 사장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듯한 꿈을 꾸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장과 클론 둘 모두의 상태가 나빠졌다는 게 문제가 됐다.
백지상태나 다름없는 존재가 어떻게 꿈을 꿀 수 있나 의아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이유가 밝혀지며 뭔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인공지능이나 클론의 존재를 단순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느껴졌다. 더불어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기 마련이라 사장의 씁쓸한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우수한 유전자>는 스스로를 진화한 인간이라 여겼던 존재의 맹점을 말하고 있었고, <마지막 늑대>는 겉모습이 타인과 다른 존재에 대한 시선을 독특하게 풀어가고 있었다. 아쉽게도 게임을 전혀 하지 않아서 <스크립터>를 읽을 땐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원래 단편집, 소설집을 읽을 땐 수록된 작품 전부가 마음에 들기 어렵고, 또 SF 장르라는 특수성 때문에 취향을 타기도 해서 더욱 그렇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좋았던 작품이 여럿 있었다. 그래서 작가의 다른 작품도 한 번 찾아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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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들어요.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게 길을 인도해줄 거예요. 위험한 일이 생기면 이 말을 떠올려요. 연주 씨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당신 주위는 소리로 가득 차 있어요.」 <다섯 번째 감각> - P173

"사람들은 눈으로는 생각하는 것을 다 쏟아부으면서, 입만 열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해. 책 속에는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첫장을 펼쳐볼 생각도 하지 않아. 하지만 마음은 몸 안에만 있지 않아. 경계선이 좀 더 바깥에 있지.
(……중략)
읽을 수 없는 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야. 잘못 읽는 것은 상대를 읽는 대신 상대의 눈에 비친 자기 자신을 읽기 때문이야." <거울애> - P338.339

"난 지금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진 정보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유시헌은 엄숙하게 말했다.
"세계와 접촉하지 못한 정자와 난자의 유전자 다발에 들어 있는 몇십억 년에 걸친 생물의 진화정보에 대해서요.
(……중략)
클론은 외부의 정보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인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클론의 꿈을 보게 되면, ‘오직 선천적인 정보‘ 이외에는 없는, 사회적인 정보는 아무것도 없는, 순수 무결하게 ‘선천적인 정보만 있는‘ 사람의 꿈을 보는 겁니다." <촉각의 경험> - 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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