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커플
재키 캐블러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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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는 젬마는 기사 관련 출장 때문에 며칠 집을 비웠다. 사랑하는 남편 대니와는 매일 연락을 주고받으며 집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했다. 그렇게 출장을 마치고 젬마가 집에 돌아왔을 때 대니는 집에 없었다. 대니는 IT 쪽 전문가라 워낙 일이 많아서 평소에도 야근이 잦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만 어디에 있냐고 묻는 젬마의 메일에 답장을 보내지 않는 게 조금 의문스러웠지만 말이다.
금세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대니는 그날 밤이 지나고, 다음날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젬마는 대니가 자신을 떠난 건가 싶어서 그의 물건을 뒤졌지만, 없어진 건 그가 출근할 때 필요한 것들뿐 나머지는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결국 젬마는 대니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거라 여기며 경찰에 신고를 한다.

헬레나는 최근 브리스톨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두 건의 살인사건에 범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해자는 서로 연관이 없는 사이라 어디서부터 수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피해자 사이의 공통점이라고는 형제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은 외모를 가졌다는 것뿐이다.
이런 상황에 부하 직원 데번이 남편이 실종됐다고 신고를 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온 여자를 만나봐야 된다고 말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마당에 실종 사건 같은 건 사소하게 느껴졌지만 데번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그 여자, 젬마를 만난다. 헬레나에게 전후 사정을 들려준 젬마는 남편을 찾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서 그의 사진을 가져왔다며 보여줬다. 그 사진을 본 헬레나는 수사 중인 두 건의 살인사건 피해자와 대니가 너무나 닮았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챈다.



출장을 다녀왔는데 남편이 사라지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짐은 오로지 출근할 때 필요한 것들만 없어졌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고가 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젬마의 생각도 그러했다. 대니와 결혼한 지 이제 1년이 다 되어가던 신혼이었고,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기에 자신을 떠났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없어진 물건들을 봤을 때 젬마가 예상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사고뿐이었다.
그래서 실종 신고를 했지만, 경찰은 마침 수사 중이던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대니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에 실종이 아닌 살해됐을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수사를 시작했다. 닮은 사람만 죽이는 연쇄살인범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큰 혼란을 줄 수 있었다. 피해자들이 모두 어두운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타깃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대니가 사라진 뒤 하루하루 고통을 받으며 어떻게든 그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젬마의 시점과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 헬레나와 데번의 시점을 오갔다.
감정적으로 극단에 처한 젬마의 상황을 읽을 땐 그녀에게 격하게 공감이 됐었다. 남편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당황스럽고 정신이 없는데, 대니와 닮은 남자들이 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대니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젬마는 그가 살아있다고 믿으며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반면에 경찰의 시점을 읽을 땐 젬마가 점점 의심스러워졌다. 이웃들 중 그 누구도 대니를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대니는 브리스톨로 이사를 온 뒤 출근 예정이던 회사에 다니질 않았고, 단 한 번도 은행 계좌에서 돈이 인출되지도 않았다. 젬마가 과거 신문 기자 시절에 일 때문에 공황장애를 겪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는 그녀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건을 수사하고는 있지만 젬마가 연쇄살인범이라는 단서만 손에 잡혀 용의자로 의심하는 경찰과 자신의 결백을 밝히면서 대니의 흔적을 찾기 위해 분주한 젬마의 모습이 교대로 이어졌다. 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제자리만 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진실이 밝혀졌을 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어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젬마를 비롯해 경찰들까지 모두 이 한 놈에게 놀아났다. 그것도 피해 의식이 가득한 비뚤어진 인간에게 말이다. 젬마의 억울함은 벗겨졌지만 해피엔딩이라고 절대 볼 수 없는 결말이라 안타까웠다. 어쩌면 이게 현실적인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읽으면서 유사한 소설이 여럿 생각났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젬마를 의심했는데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결말로 인해 영 개운하지는 않은 소설이었다.



​​​​​​​

‘내게 거짓말을 했어.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어. 사소한 거짓말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거짓말이야.‘ - P70

"대니 오코너의 시신을 찾아야 해, 데번. 죽은 게 틀림없어. 나는 아직도 그의 영리한 아내가 많은 걸 숨기고 있다고 생각해." - P183

그가 여기 살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나? 나만 의심하는 그들이 진짜 범인을 찾아 나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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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황무지
S. A. 코스비 지음, 윤미선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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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러가드 버그 몽타주는 범죄 현장 도주 차량을 운전한 과거를 청산하고 사촌 켈빈과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다. 아내 키아와 아이들 제이본, 대런, 그리고 첫 결혼에서 낳은 딸 아리엘에게 떳떳한 남편이자 아빠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빠와는 다르게 말이다.
보러가드의 아빠는 집에 있던 때가 드물었고 엄마와도 사이가 영 좋질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보러가드에게 남은 아빠에 대한 몇 안 되는 기억은 그리 좋은 게 없었지만, 그는 그걸 윤색해 추억으로 마음속에 담았다. 그리고 아빠가 남긴 차 '더스터'를 그 무엇보다 애지중지 아끼며 지금까지 몰았다.

하지만 보러가드를 둘러싼 상황으로 인해 자꾸만 나쁜 마음을 먹게 만들었다. 정비소 대출금이 오랫동안 밀렸고,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는 건강보험 문제로 인해 쫓겨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전처와 살고 있는 딸 아리엘의 대학 등록금까지 보러가드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길거리 자동차 경주에 나가 조금이라도 돈을 따 보려고 했지만, 누군가의 수작질로 가지고 있던 돈까지 빼앗겼다.
그런 상황에 미치광이 로니 세션스가 보러가드를 찾아와 큰 건수가 있다고 말했다. 보러가드에게 갚을 빚이 있었던 로니는 그의 운전 실력이 꼭 필요하다고 하며 합류를 설득했다. 결국 이번 일만 하기로 마음먹은 보러가드는 로니와 허세에 찌든 콴과 함께 크게 한탕을 하고 성공하지만, 무서운 사람의 물건을 잘못 건드렸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는다.




보러가드에게 운전은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정비소를 운영하면서 차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덕분이기도 했지만, 어렸을 적 차를 아끼던 아빠 덕분에 습득한 것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실력을 레이서가 되어 F1 같은 데에 썼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역시 아빠로 인해 범죄에 쓰게 된다. 10대 초반에 처음 운전을 해보게 된 상황이 아빠를 위협하는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결국 그로 인해 보러가드는 소년원에 다녀오게 됐고, 아빠는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
과거 회상 같은 건 아빠와 시간을 보내던 10대 때 외에 등장하진 않았지만, 문장 속에 담긴 의미로 봐서 소년원을 나와 첫 결혼을 한 뒤 현재의 아내인 키아와 결혼하기 전까지의 시간 동안 보러가드는 범죄자들의 도주를 도우며 살았던 걸로 보였다. 키아를 만나고 두 아이를 낳은 후에 그는 비로소 변할 마음을 먹고 떳떳하게 정비소를 운영하며 열심히 살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라는 게 언제나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지 않기 마련이라 보러가드에게도 나쁜 일이 찾아왔다. 문제는 그 나쁜 일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는 나쁜 마음을 먹기 마련인데, 로니가 때마침 찾아와 큰 건수에 대해 말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키아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보러가드는 그 일을 해내고야 말았고, 심지어 성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훔친 다이아몬드가 진짜 악랄하고 나쁜 놈인 레이지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레이지는 부하들을 시켜 자신의 주얼리 상점을 털어간 게 누군지 찾아내기 시작했고, 금세 로니를 거쳐 콴, 보러가드까지 붙잡아왔다. 그가 정말 무섭고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게 글 속에서 느껴졌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보러가드의 운전 실력을 경이롭게 여겨 어떤 일을 제안했다. 그 일만 제대로 처리해 준다면 다이아몬드를 털어간 걸 탕감해 주고 가족들까지 무사할 거라는 약속을 했다. 보러가드의 입장에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설이 정말 속도감 있었다. 차와 부품에 대해 잘 모르지만 신이 내린 운전 실력을 가진 보러가드가 모는 차를 타고 범죄 현장에서 도주하는 듯한 생생함이 전해졌다. 그 도주가 머릿속에 절로 그려지며 영화처럼 재생되기도 했다. 그리고 후반에는 어김없이 배신과 또 다른 사건으로 긴장감 있게 몰고 갔고, 가족에게까지 위협이 끼쳐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으로만 향해 가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다행히 소설은 비극으로 끝나진 않았지만 해피엔딩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손이 더러워진 보러가드의 삶이 과연 그렇게 마무리가 된 걸로 끝일까, 레이지의 큰 건수로 인해 손해를 본 이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달려오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안도보다는 걱정이 더 컸기 때문이다.

​​​​​​​흥미진진한 범죄 소설이었다. 읽는 동안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너한테 갚을 돈이 있어서가 아니라 네가 최고이기 때문에 부탁하는 거야. 버그 너처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껏 못 봤으니까." - P87

"그들은 널 반드시 찾아낼 거야. 그리고 너는 네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도망을 다녀야 할 거고. 네 아이들과 처를 버리고 말이다." - P201

어떤 사람은 피아노 혹은 기타를 치기 위해 태어났다고들 하지만, 그에게는 차가 악기였고 지금은 차로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몸이 차가워짐을 느꼈다. 냉기는 심장에서 시작해 손끝, 발끝으로 번졌다. 그는 지금보다 더 현재에 집중할 수는 없다고 느꼈다. 그는 그것이 진실임을 느끼는 동시에, 그 사실이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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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정호승 지음 / 시공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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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수의 수의 상설 전시장에 사는 수의는 이곳에 온 지 몇 년 되었다. 다른 옷으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던 때가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하다. 이 수의가 특별했던 건 주머니가 있다는 점이었다. 전시장 주인 김 씨가 특별한 이유로 주머니가 있는 수의를 만들어 판매를 했던 것이다.
룸비니 부처님 네팔 룸비니에서 태어난 기념품인 '나'는 잘 팔려나가는 다른 기념품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인해 오랫동안 팔리지 않고 이곳에 살았다. 그러다 중년 남성에게 팔려 그곳을 떠나 한국으로 오게 된다.
참나무 이야기
가야산 다람쥐의 겨울 양식이었던 도토리는 봄이 되어 살아남았다. 도토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며 참나무가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어느덧 크게 자란 참나무는 대웅전 대들보가 되어 부처님을 모시기를 희망한다.

플라타너스
아파트가 들어설 때 정문 입구 자리에 있던 플라타너스가 베이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아파트 사람들 모두 그 나무를 아꼈는데, 그중에서 문학소녀인 학생이 유독 그 나무를 사랑하며 나의 나무라 칭했다. 그러다 소녀가 그곳을 떠나 이사를 가자 플라타너스는 소녀가 보고 싶어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바람과 새
새는 자신이 새라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늘이 아름다운 건 자신이 날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만하기까지 했다. 그런 새의 오만함을 바람이 꾸짖자, 새는 가소롭다는 듯 바람을 무시했다.
걸레
사각 트렁크 팬티로 태어난 '나'는 주인인 남자의 사랑을 받는 바람에 늘 더러웠다. 세탁도 하지 않고 며칠씩 입는 바람에 스스로가 비참해지기까지 했지만 남자는 팬티를 잘 빨지 않았다. 그러다 남자의 아내가 구멍 난 팬티를 발견하곤 걸레로 쓰기 시작했다.

숫돌
칼을 가는 남자의 숫돌은 점점 자신의 몸이 닳아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햇살에게서 듣고 알게 됐다. 자신의 몸이 사라지는 게 불안했던 숫돌은 더 이상은 칼을 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첨성대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첨성대에는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머물다 가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아라연꽃
백제군의 침공으로 아라가야에 사는 백성들은 고통을 받는다. 아라공주가 도망을 치는 모습을 발견한 아라연꽃은 그녀를 자신의 몸으로 숨겨준다.

한 알의 밀
밀을 수확하고 난 뒤 곳간 바닥에 밀알이 떨어졌다. 답답한 자루 안에 들어가지 않게 되어 안심한 밀은 자신과 함께 떨어진 다른 밀이 쥐에게 잡혀먹히는 걸 보고 자루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다행히 농부에게 발견되어 자루 안에 들어가 안심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루 안의 삶이 갑갑해진다.
추기경의 손
김수환 추기경의 오른손과 왼손은 이웃들을 돌보고 돕느라 바쁘신 그를 대신해 몰래 사람들을 도우러 다닌다.
선암사 해우소
순천 선암사 야생 차밭에 있던 바윗돌은 그곳에서 사는 게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깝게 지내던 스님이 바윗돌을 해우소로 데려가야겠다고 말한다.

진실
사람들이 더 이상 진실을 믿지 않고 거짓을 일삼게 됐다. 그래서 진실은 인간의 곁을 떠나 백합조개의 가슴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지나 진실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은 진실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네모난 수박
일본에서 네모난 수박이 탄생한 뒤 경북에서 수박 농사를 짓는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네모난 수박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한다.
흰이마기러기
겨울이 되자 흰이마기러기는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남쪽으로 떠난다. 힘든 여행을 하던 중 동생이 이제 더 이상 날기 힘들다며 포기를 하려고 한다.

낙산사 동종
낙산사의 종으로 오랫동안 살아온 그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타종될 때의 고통으로 인해 스님께 쉬고 싶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의상대 소나무로 인해 점점 화가 나는 일이 일어나 빌어선 안 될 소원을 빌게 된다.
하동 송림 장승
1745년부터 하동 송림에서 살았던 소나무에게는 두 개의 총알이 몸에 박혔다. 아무도 그의 몸에 있는 총알을 빼내주지 않아 점점 고통스러워졌고, 오래 지나지 않아 쓰러지고 만다.




17편의 우화를 담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진실>이었다. 다른 이야기들처럼 동물이나 식물, 사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명사를 주인공으로 하여 공감되는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진실보다는 거짓을 더 믿고 올바른 것을 바로 보지 않으려 하는 게 퍽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진실이 인간을 떠나게 되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진실의 가치를 깨닫고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진실을 되찾고자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사람들의 폭력적인 모습은 다시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결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걸레>와 <숫돌>, <한 알의 밀>, <선암사 해우소>는 궁극적으로 존재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다 다르지만 저마다의 쓰임새가 있기 마련이고, 때로는 처음과는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되기도 하지만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룸비니 부처님>과 <추기경의 손>처럼 종교를 넘나드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존재해왔던 문화유산, 유적지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우화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화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이솝 이야기>를 어렸을 때 몇 편 읽었던 것 같긴 한데, 제대로 된 기억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낯설기 때문인지 사물과 동물, 자연을 주인공으로 세워 교훈을 주는 짧은 이야기가 신선했고 주제 의식이 깔끔하고 담백했다. 짧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매력 있던 책이었다.



* 이 리뷰는 펍스테이션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진실은 늘 맑고 순결했다. 더럽지도 때 묻지도 않았다. 진실은 존재 그 자체로서 고결하고 숭고했다.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 <진실> - P195

"우리는 각자의 몫대로 쓰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나는 먹물을 생산해내는 역할을 해야 하고, 넌 칼 가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거야. 그게 우리 존재의 가치야." <숫돌>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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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드뷔시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권영주 옮김 / 북에이드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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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열여섯 살 소녀 고즈키 하루카는 할아버지와 부모님, 삼촌, 그리고 동갑내기 사촌 가타기리 루시아와 함께 살고 있다. 루시아는 인도네시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1년에 한 번 일본에서 지냈었는데, 그녀가 일본에 온 사이 인도네시아에 유례없는 큰 지진이 일어나 집과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그녀를 하루카의 부모님이 거둬 입양 절차를 밟고 있었다. 하루카는 사촌이지만 자매가 생긴 것 같아 루시아와 단짝처럼 지냈고, 루시아 역시 하루카처럼 피아노를 배우고 있어서인지 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그러던 중, 부모님과 삼촌이 집을 비운 날, 두 아이는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지내는 별채에서 잠을 자게 된다. 하루카는 잠을 자다가 눈과 코, 목 등에서 이상한 통증을 느껴 눈을 뜨게 된다. 아픔을 느낀 하루카는 별채에 불이 나 연기를 잔뜩 마셨다는 걸 퍼뜩 깨닫는다. 휠체어 신세를 지는 할아버지와 자매나 다름없는 루시아가 걱정돼 방 밖으로 나온 하루카는 자신처럼 방을 기어 나오는 루시아를 본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하루카는 불이 시작된 것 같은 할아버지의 작업실로 들어갔다가 천장이 떨어져 눈을 감는다.

이후 병원에서 깨어난 하루카는 온몸의 고통을 느낀다. 그녀는 목숨을 구했으나 전신 화상을 심하게 입어 얼굴과 몸 대부분을 피부 이식을 받았지만, 할아버지와 루시아는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살아난 하루카였지만 두 번 다시는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손이 되고 말았다. 이식을 받은 손가락 피부가 땅겨 섬세한 연주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미사키 요스케에게 과외를 받게 된다.



하루카의 시점으로 진행된 소설은 피아노와 가족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루시아와 함께 살게 된 사연, 사업을 번창시켜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는 할아버지가 하루카와 루시아의 미래에 기대는 희망, 그에 반해 할아버지의 자식인 겐조 삼촌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빈둥대는 모습, 그리고 은행원인 아버지가 현재 회사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등에 관한 사정이었다. 이 외에도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의 간병인 미치코도 등장했다.

이렇게 초반 설명이 지나고 나자 곧바로 화재 사고가 일어났고, 하루카만 목숨을 구했다는 걸 보여줬다. 하지만 목숨을 구한 것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사촌 루시아를 잃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아니스트인 하루카가 거의 온몸에 피부 이식을 받았기 때문이다.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할 정도로 오랜 시간 회복에 집중해야 했는데, 학교에서는 피아니스트 특기생으로 들어온 하루카에게 교칙을 강요하느라 피아노 연습에도 매달려야 했다. 섬세한 연주를 해야 하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건 절망적인 일이었다. 포기하고 싶었던 하루카 앞에 미사키 요스케가 과외 선생을 자처하면서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한계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소설은 피아니스트를 희망하는 소녀의 성장물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추리 소설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는 듯 여러 사건이 이어졌다. 할아버지의 유산 상속분 중 절반이 하루카에게, 나머지 절반은 아버지와 삼촌이 나눠진 게 밝혀지면서 하루카는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됐다. 몸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다치지 않을 문제였으나 목발을 짚고 미끄럼 방지 스티커를 붙인 계단을 오르내리는 하루카에겐 치명적인 일이었다. 심지어 길에서 누군가가 밀어버리는 바람에 차에 치일 뻔하기도 했다. 사건은 이뿐만 아니라 하루카의 엄마가 신사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세상을 떠난 충격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아무리 봐도 집안사람들 중 한 명이 하루카에게 원한을 품은 게 분명했지만, 그녀로서는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들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유산 분배 유언이 밝혀진 이후 여러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돈 문제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돈 때문에 가족을 죽이려 한다는 건 무섭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이런 사건을 하루카의 피아노 과외 선생인 미사키 요스케도 곁에서 지켜보고 추리를 하게 된다.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기 이전에 법대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변호사가 되길 그만두고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고 있지만, 피아노를 치는 변호사가 되었다면 굉장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외모 또한 아름답다는 묘사가 있었기에 더욱 주목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정도 사건이 일어난 후에 더 이상 하루카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콩쿠르 연습에 매진하는 하루카와 그녀를 혹독하게 가르치는 미사키의 모습이 이어졌고, 마침내 콩쿠르 예선과 본선까지의 이야기를 향해 달려갔다.
하루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콩쿠르에서 어떤 성적을 받게 될지는 예상을 했지만, 사건 이면에 어떤 진실이 숨어있었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깜짝 놀랐다. 물론 하루카를 죽이려고 했던 범인은 예측했다. 하지만 엄마가 왜 사고를 당했는지 밝혀졌을 때 깜짝 놀랐고, 그 기저에 숨은 반전은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했다. 정말이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무조건적으로 믿었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클래식 음악과 추리의 묘한 조화를 보인 소설이었다. 소개된 음악을 찾아 들으며 읽으니 묘사가 참 섬세하다는 걸 느꼈다. 서정적이면서 약간의 스릴, 충격 반전을 곁들인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미사키 요스케가 등장하는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던데 차근차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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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꼭두각시 인형처럼만 움직여지는, 붕대를 칭칭 감은 몸뚱이. 하지만 인형은 음악에 의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꼭 살아 있는 양, 자유롭게, 경쾌하게. 만약 또 한 번 그렇게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가 마법사건 악마건 상관없다. 그와 무슨 거래를 해도 좋다. 설사 그 대가가 영혼이라 해도. - P91

"자연히 벗겨진 미끄럼 방지 테이프, 자연히 고장 난 목발. 그 때문에 네가 화를 당해도, 누가 공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예기치 못한 사고로 보일 뿐이야. 언제 어디서 그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어. 아니, 벌어지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지. 그런, 불확실성에 입각한 계획이기 때문에 반대로 들킬 가능성도 크지 않아. 교활하다면 이만큼 교활한 계략도 없는 거야."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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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사진작가 정석주는 15년 전 '303 연쇄살인'으로 애지중지 키운 딸 은혜를 잃었다. 이후 공소시효 만료를 코앞에 두고 있는 현재까지 석주는 딸의 주검이 발견된 붉은 소파를 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 소파에 앉은 누군가를 카메라에 담는다면 범인을 알아볼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석주는 범인을 찾아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런 석주를 수제자이자 사위인 이재혁이 찾아온다. 이대로 가다간 석주가 스튜디오에서 내쫓길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15년 전 은혜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내내 재혁을 원망하고 의심하고 있었던 석주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처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혁이 물어온 일을 하게 됐는데, 그 일이라는 게 살인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 사체를 사진으로 찍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라는 걸 모르고 현장에 도착한 석주는 다른 이유로 다시금 놀라게 된다.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 김나영이 죽은 딸 은혜와 아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몇 번의 촬영으로 나영과 조금은 가까워진 석주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듣게 되어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딸 은혜를 잃고 범인조차 찾지 못해 유랑하며 떠도는 석주의 모습으로 소설이 시작됐다. 범인을 잡고 싶다는 일념이 얼마나 간절한지 느낄 수 있었다. 곧 그를 찾아온 재혁과 얼굴을 마주했을 때 왜 은근한 적의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됐든 은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 예감할 수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은혜와 재혁의 관계가 밝혀졌고 곧이어 형사 김나영과의 연관성까지 드러났다. 석주가 왜 그런 의심을 하게 됐는지 심히 이해가 됐다.
그러면서 나영에 대한 감정은 조금씩 복잡해졌다는 게 소설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영을 처음 보고서 연예인 뺨치는 매력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몇 번의 일을 의뢰받으며 가까워지니 은혜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303 연쇄살인'의 다섯 번째 피해자였던 은혜 이전에 나영이 네 번째 피해자이자 두 명 중 한 명인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알 수 없었다. 딸과 닮은 나영이 같은 사건의 피해자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석주는 나영을 조금은 애틋한 마음과 원망 비슷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소설은 석주와 나영을 중심으로 흐르며 여러 번의 살인사건과 실종사건이 등장했다. 이정현이라는 주부가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과 이후 그녀의 내연남 김철안의 살인사건이 있었다. 1997년 실종된 김지현이 공소시효가 만료된 후 시랍 상태로 발견된 사건, 1973년 지리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이 유족을 찾아달라고 한 사건까지 등장했다. 하나같이 의문스러운 사건들이었는데, 때로 석주가 사진을 찍으면서 범인을 찾아내기도 했다. 인물을 주로 찍는 사진작가의 남다른 통찰력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소설이 후반부로 이어지며 석주의 딸 은혜와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비밀이 등장했고, 이어 내내 언급만 되던 나영의 아버지 김정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제목인 '붉은 소파'와의 연관성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다.
은혜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했을 때 의심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설마 그럴까 싶어 마음을 졸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게 진실임이 밝혀져 씁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세상에 그런 맨얼굴을 숨기고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 진짜 있을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소설을 읽으며 내포하고 있던 메시지인 공소시효에 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2015년 태완이법으로 공소시효가 사라졌지만 범인을 잡아도 저지른 죄에 마땅한 처벌을 내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를 갑작스럽게 잃은 유족을 위해 처벌 법 자체에 대한 개정이 필요하다. 미국처럼 가석방 없이 몇 백 년씩 수감시키든지, 아니면 교도소를 낙후시켜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소설은 여러 사건을 이어가며 주인공 석주와 은혜, 나영에 관한 진실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연작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독성이 좋은 소설이라 페이지가 훌훌 잘 넘어간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면서 비밀과 결말을 위해 서사를 잘 쌓아나간 소설이라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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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소파는 일종의 미끼였다.
한 남자가 ‘누군가‘를 찾기 위한, 그리고 그 ‘누군가‘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기 위한 유일무이한 도구였다. - P12

"이제 곧 모든 게 끝납니다. 오늘 밤 24시면 공소시효가 만료되거든요. 사진작가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시효가 만료되면 이 고통도 만료될까. 딸을 잃은 슬픔을 잊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작가의 마음속 공소시효는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이후로도 사진작가는 붉은 소파를 갖고 다닐 겁니다. 매일 사진을 찍을 겁니다. 범인이 잡히길 바라며, 그 범인을 만나 묻기 위하여, 왜 하필 내 딸이었냐고, 내 딸한테 꼭 그래야만 했냐고, 그리고…… 내가 오랜 시간 사진을 찍으며 당신을 찾는 동안 진심으로 사죄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느냐고." - P132.133

"이미 시효가 끝났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은 아주 오래전 일이에요. 이 사건을 해결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달라져요."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사람들이 억울해하는 그 마음이 계속되었기에, 시효 제도가 폐지된 거 아닐까요."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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