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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사진작가 정석주는 15년 전 '303 연쇄살인'으로 애지중지 키운 딸 은혜를 잃었다. 이후 공소시효 만료를 코앞에 두고 있는 현재까지 석주는 딸의 주검이 발견된 붉은 소파를 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 소파에 앉은 누군가를 카메라에 담는다면 범인을 알아볼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석주는 범인을 찾아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런 석주를 수제자이자 사위인 이재혁이 찾아온다. 이대로 가다간 석주가 스튜디오에서 내쫓길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15년 전 은혜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내내 재혁을 원망하고 의심하고 있었던 석주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처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혁이 물어온 일을 하게 됐는데, 그 일이라는 게 살인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 사체를 사진으로 찍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라는 걸 모르고 현장에 도착한 석주는 다른 이유로 다시금 놀라게 된다.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 김나영이 죽은 딸 은혜와 아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몇 번의 촬영으로 나영과 조금은 가까워진 석주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듣게 되어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딸 은혜를 잃고 범인조차 찾지 못해 유랑하며 떠도는 석주의 모습으로 소설이 시작됐다. 범인을 잡고 싶다는 일념이 얼마나 간절한지 느낄 수 있었다. 곧 그를 찾아온 재혁과 얼굴을 마주했을 때 왜 은근한 적의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됐든 은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 예감할 수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은혜와 재혁의 관계가 밝혀졌고 곧이어 형사 김나영과의 연관성까지 드러났다. 석주가 왜 그런 의심을 하게 됐는지 심히 이해가 됐다.
그러면서 나영에 대한 감정은 조금씩 복잡해졌다는 게 소설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영을 처음 보고서 연예인 뺨치는 매력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몇 번의 일을 의뢰받으며 가까워지니 은혜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303 연쇄살인'의 다섯 번째 피해자였던 은혜 이전에 나영이 네 번째 피해자이자 두 명 중 한 명인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알 수 없었다. 딸과 닮은 나영이 같은 사건의 피해자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석주는 나영을 조금은 애틋한 마음과 원망 비슷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소설은 석주와 나영을 중심으로 흐르며 여러 번의 살인사건과 실종사건이 등장했다. 이정현이라는 주부가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과 이후 그녀의 내연남 김철안의 살인사건이 있었다. 1997년 실종된 김지현이 공소시효가 만료된 후 시랍 상태로 발견된 사건, 1973년 지리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이 유족을 찾아달라고 한 사건까지 등장했다. 하나같이 의문스러운 사건들이었는데, 때로 석주가 사진을 찍으면서 범인을 찾아내기도 했다. 인물을 주로 찍는 사진작가의 남다른 통찰력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소설이 후반부로 이어지며 석주의 딸 은혜와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비밀이 등장했고, 이어 내내 언급만 되던 나영의 아버지 김정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제목인 '붉은 소파'와의 연관성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다.
은혜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했을 때 의심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설마 그럴까 싶어 마음을 졸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게 진실임이 밝혀져 씁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세상에 그런 맨얼굴을 숨기고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 진짜 있을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소설을 읽으며 내포하고 있던 메시지인 공소시효에 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2015년 태완이법으로 공소시효가 사라졌지만 범인을 잡아도 저지른 죄에 마땅한 처벌을 내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를 갑작스럽게 잃은 유족을 위해 처벌 법 자체에 대한 개정이 필요하다. 미국처럼 가석방 없이 몇 백 년씩 수감시키든지, 아니면 교도소를 낙후시켜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소설은 여러 사건을 이어가며 주인공 석주와 은혜, 나영에 관한 진실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연작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독성이 좋은 소설이라 페이지가 훌훌 잘 넘어간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면서 비밀과 결말을 위해 서사를 잘 쌓아나간 소설이라 재미있었다.
붉은 소파는 일종의 미끼였다. 한 남자가 ‘누군가‘를 찾기 위한, 그리고 그 ‘누군가‘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기 위한 유일무이한 도구였다. - P12
"이제 곧 모든 게 끝납니다. 오늘 밤 24시면 공소시효가 만료되거든요. 사진작가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시효가 만료되면 이 고통도 만료될까. 딸을 잃은 슬픔을 잊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작가의 마음속 공소시효는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이후로도 사진작가는 붉은 소파를 갖고 다닐 겁니다. 매일 사진을 찍을 겁니다. 범인이 잡히길 바라며, 그 범인을 만나 묻기 위하여, 왜 하필 내 딸이었냐고, 내 딸한테 꼭 그래야만 했냐고, 그리고…… 내가 오랜 시간 사진을 찍으며 당신을 찾는 동안 진심으로 사죄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느냐고." - P132.133
"이미 시효가 끝났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은 아주 오래전 일이에요. 이 사건을 해결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달라져요."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사람들이 억울해하는 그 마음이 계속되었기에, 시효 제도가 폐지된 거 아닐까요."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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