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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정호승 지음 / 시공사 / 2022년 4월
평점 :

어떤 수의 수의 상설 전시장에 사는 수의는 이곳에 온 지 몇 년 되었다. 다른 옷으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던 때가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하다. 이 수의가 특별했던 건 주머니가 있다는 점이었다. 전시장 주인 김 씨가 특별한 이유로 주머니가 있는 수의를 만들어 판매를 했던 것이다.
룸비니 부처님 네팔 룸비니에서 태어난 기념품인 '나'는 잘 팔려나가는 다른 기념품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인해 오랫동안 팔리지 않고 이곳에 살았다. 그러다 중년 남성에게 팔려 그곳을 떠나 한국으로 오게 된다.
참나무 이야기 가야산 다람쥐의 겨울 양식이었던 도토리는 봄이 되어 살아남았다. 도토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며 참나무가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어느덧 크게 자란 참나무는 대웅전 대들보가 되어 부처님을 모시기를 희망한다.
플라타너스 아파트가 들어설 때 정문 입구 자리에 있던 플라타너스가 베이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아파트 사람들 모두 그 나무를 아꼈는데, 그중에서 문학소녀인 학생이 유독 그 나무를 사랑하며 나의 나무라 칭했다. 그러다 소녀가 그곳을 떠나 이사를 가자 플라타너스는 소녀가 보고 싶어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바람과 새 새는 자신이 새라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늘이 아름다운 건 자신이 날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만하기까지 했다. 그런 새의 오만함을 바람이 꾸짖자, 새는 가소롭다는 듯 바람을 무시했다.
걸레 사각 트렁크 팬티로 태어난 '나'는 주인인 남자의 사랑을 받는 바람에 늘 더러웠다. 세탁도 하지 않고 며칠씩 입는 바람에 스스로가 비참해지기까지 했지만 남자는 팬티를 잘 빨지 않았다. 그러다 남자의 아내가 구멍 난 팬티를 발견하곤 걸레로 쓰기 시작했다.
숫돌 칼을 가는 남자의 숫돌은 점점 자신의 몸이 닳아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햇살에게서 듣고 알게 됐다. 자신의 몸이 사라지는 게 불안했던 숫돌은 더 이상은 칼을 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첨성대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첨성대에는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머물다 가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아라연꽃 백제군의 침공으로 아라가야에 사는 백성들은 고통을 받는다. 아라공주가 도망을 치는 모습을 발견한 아라연꽃은 그녀를 자신의 몸으로 숨겨준다.
한 알의 밀 밀을 수확하고 난 뒤 곳간 바닥에 밀알이 떨어졌다. 답답한 자루 안에 들어가지 않게 되어 안심한 밀은 자신과 함께 떨어진 다른 밀이 쥐에게 잡혀먹히는 걸 보고 자루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다행히 농부에게 발견되어 자루 안에 들어가 안심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루 안의 삶이 갑갑해진다.
추기경의 손 김수환 추기경의 오른손과 왼손은 이웃들을 돌보고 돕느라 바쁘신 그를 대신해 몰래 사람들을 도우러 다닌다.
선암사 해우소 순천 선암사 야생 차밭에 있던 바윗돌은 그곳에서 사는 게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깝게 지내던 스님이 바윗돌을 해우소로 데려가야겠다고 말한다.
진실 사람들이 더 이상 진실을 믿지 않고 거짓을 일삼게 됐다. 그래서 진실은 인간의 곁을 떠나 백합조개의 가슴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지나 진실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은 진실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네모난 수박 일본에서 네모난 수박이 탄생한 뒤 경북에서 수박 농사를 짓는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네모난 수박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한다.
흰이마기러기 겨울이 되자 흰이마기러기는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남쪽으로 떠난다. 힘든 여행을 하던 중 동생이 이제 더 이상 날기 힘들다며 포기를 하려고 한다.
낙산사 동종 낙산사의 종으로 오랫동안 살아온 그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타종될 때의 고통으로 인해 스님께 쉬고 싶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의상대 소나무로 인해 점점 화가 나는 일이 일어나 빌어선 안 될 소원을 빌게 된다.
하동 송림 장승 1745년부터 하동 송림에서 살았던 소나무에게는 두 개의 총알이 몸에 박혔다. 아무도 그의 몸에 있는 총알을 빼내주지 않아 점점 고통스러워졌고, 오래 지나지 않아 쓰러지고 만다.
17편의 우화를 담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진실>이었다. 다른 이야기들처럼 동물이나 식물, 사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명사를 주인공으로 하여 공감되는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진실보다는 거짓을 더 믿고 올바른 것을 바로 보지 않으려 하는 게 퍽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진실이 인간을 떠나게 되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진실의 가치를 깨닫고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진실을 되찾고자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사람들의 폭력적인 모습은 다시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결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걸레>와 <숫돌>, <한 알의 밀>, <선암사 해우소>는 궁극적으로 존재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다 다르지만 저마다의 쓰임새가 있기 마련이고, 때로는 처음과는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되기도 하지만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룸비니 부처님>과 <추기경의 손>처럼 종교를 넘나드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존재해왔던 문화유산, 유적지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우화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화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이솝 이야기>를 어렸을 때 몇 편 읽었던 것 같긴 한데, 제대로 된 기억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낯설기 때문인지 사물과 동물, 자연을 주인공으로 세워 교훈을 주는 짧은 이야기가 신선했고 주제 의식이 깔끔하고 담백했다. 짧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매력 있던 책이었다.
* 이 리뷰는 펍스테이션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진실은 늘 맑고 순결했다. 더럽지도 때 묻지도 않았다. 진실은 존재 그 자체로서 고결하고 숭고했다.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 <진실> - P195
"우리는 각자의 몫대로 쓰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나는 먹물을 생산해내는 역할을 해야 하고, 넌 칼 가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거야. 그게 우리 존재의 가치야." <숫돌>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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