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로 읽는 5분 세계사 - 생활 속 단어로 풀어낸 역사 한 편! 단어로 읽는 5분 역사
장한업 지음 / 글담출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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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보다는 빈도수가 적게 접하는 세계사를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일 것 같아 골랐다. 단어로 알아보는 세계사라는 점에서 소소한 상식에 도움도 되고 말이다.





 

현명한 조언자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멘토(mentor)는 신화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타카 섬의 왕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떠나며 친구 멘토르에게 자신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맡겼다고 한다. 멘토르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선생님이자 상담자, 친구, 때로는 아버지 역할을 하며 텔레마코스를 보살펴주었던 덕분에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이후 멘토르라는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주는 지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가지 덧붙인 것은 멘토와 붙어 다니는 '멘티'라는 단어는 공식 영어가 아닌 사람들이 인위로 만든 단어라는 걸 알아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태껏 영어로 알고 있었던 게 잘못된 표현이었다니 꼭 기억해야겠다.

신혼부부가 떠나는 신혼여행은 영어로 허니문(honeymoon)이다. 그런데 허니문의 어원은 고대 스칸디나비아 근처에서 널리 행해진 약탈혼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많이 놀랐다. 신부가 될 사람을 납치해 얼마간 몸을 숨겨야 했는데, 추적자들을 피해 숨어지내는 것에서 허니문, 즉 신혼여행이란 단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신부가 쓰는 베일 역시 얼굴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니 여러모로 충격이다.

악수(handshake)의 기원은 우호적인 게 아니었다고 한다. 오래전 사람들은 짐승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살았기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다녔다. 길을 가다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를 해칠 의도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맨손을 보여주며 상대 역시 무기를 들지 못하도록 손을 잡는 게 기원이라고 한다. 요즘엔 긍정의 인사가 아주 오래전엔 불신에서 시작되었다니 묘한 변화라는 생각이 든다.

향수(perfume)는 '멀리(per)'라는 뜻과 '연기를 피우다(fume)'라는 의미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향수의 역사는 대략 5000년 정도인데, 최초의 향수는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식물이나 나무를 태워 그 향이 몸에 배게 한 다음 제사를 지낸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연기를 멀리 보내다'라는 뜻의 향수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살롱(salon)과 마담(madame)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 와서 의미가 퇴색되었다. 이탈리아어로 넓은 홀을 의미하는 살로네(salone)에서 유래된 살롱은 접견실, 상류 계층의 모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루브르 궁전에서 열린 예술 전시회나 고급 미용실도 살롱이라 불렀다. 그리고 마담의 어원은 라틴어 메아 도미나(mea domina)인데, 나의 여신 내지는 황후, 지배하는 여자, 안주인, 여주인 등의 의미라고 한다. 12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여성 왕족과 귀족을 지칭하는 존칭이었다.
저자는 두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부정적인 의미, 퇴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워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하는 건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에티켓(etiquette)은 어려운 식탁 예절을 잘 습득하기 위한 커닝 페이퍼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재미있었고, 계급에 따라 사형 제도가 달랐던 프랑스에서 평등한 죽음을 위해 만들어진 단두대(guillotine)는 개발하자고 제안한 사람인 기요탱의 이름을 붙인 건 좀 잔인한 처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기요탱의 자녀들은 정부에 명칭을 바꿔줄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성을 바꿔야만 했다니 말이다. 참고로 기요탱이 단두대로 처형당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존 몬테규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에서 비롯된 샌드위치(sandwich), 토머스 모어가 만들어낸 단어 유토피아(utopia)는 알고 있던 것이라 반가웠다. 유토피아가 그리스어로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사(u)와 장소(topos)에서 파생한 명사 토피아가 만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 즉 '이상향'이라는 단어가 되었다는 어원을 자세히 알게 됐다.



단어의 어원을 통해 역사를 알게 되었다. 잘못 알고 있던 것들, 몰랐던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어 좋았다. 단어를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 또한 이 책을 통해 인식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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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 종말이 오다 - 종말문학 공모전 신체강탈자 문학 공모전 수상작품집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3
최경빈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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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빈 × 10개월 크리스마스 때부터 여자가 남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여성이 자고 일어나면 남자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변하는 시기가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아직 여자로 남은 사람들은 모든 남성들에게 주목을 받는다. 그러다 그런 여자들마저 세상에서 사라져가자 이제는 임산부들에게 시선이 향했다. 아기를 가진 여성들만은 남자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병현 × 베르테르 증상 갑자기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물을 마시지 않거나 닿지 않을 수 있는 경우는 없었기에 자살률은 자꾸만 높아져 간다.
진위명 × 귀환
항성 간 무인 탐사선 오디세이가 궤도를 이탈해 43년 만에 지구 궤도에 도착했다. 지구에서 귀환 답신이 없을 때 탐사를 하라는 프로그래머들의 장난스러운 명령으로 인해 탐색선은 지구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김보람 × 미래도둑
어느 날부터 외계인이 사람의 몸을 빌려 태어나기 시작했다. 이 외계인은 아기 때는 영화에서 볼 법한 흉한 외형을 하고 있다가 어마어마하게 빠르게 성장하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외계인이 부모와 꼭 닮은 모습으로 성장해 그들을 죽이고서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박해로 × 운수 나쁜 날
인력거꾼 박첨지는 오늘도 공칠 운명인가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수상쩍은 양복쟁이를 태우게 됐다. 그는 돈을 많이 줄 테니 광동학교로 가달라고 했지만, 일본 순사에게 쫓겨 죽임을 당한다. 양복쟁이는 죽기 전 박첨지에게 광동학교의 B 사감에게 무언가를 전달해달라고 하며, 다음에 만나게 되면 자신은 지금 보는 자기가 아닐 거라고 말했다.
원상이 × 금연클럽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 금연클럽이 열렸다. 외부 강연자가 꽤 능력 있다는 말에 솔깃해진 '나'는 같은 팀 대리가 참석하는 걸 몰래 구경하러 갔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최철진 × HOOK
가출했던 아버지가 걸그룹의 팬클럽 회장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보이그룹의 팬클럽이라 중간에 낀 아들은 골치가 아프기만 하다. 이 상황이 이상해진다고 깨닫게 된 건 걸그룹이 일주일 만에 스타가 된 것이고, 심지어는 그들을 모델로 한 화폐까지 발행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일곱 편의 단편 소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미래도둑>이었다.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난 외계인이 급속도로 성장해 부모와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을 하고서 그들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는다는 설정이 너무나 섬뜩했다. 처음엔 갓 태어난 아기가 외계인이라 충격을 받아 자살한 아내와 외계인 자식을 버리려던 남편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시작부터 너무 세게 나간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주인공이 바뀌어 둘째 딸을 낳은 엄마의 시점을 보여줬는데, 그때부터 섬뜩함은 배가 되었다. 1살인데 20살로 보이는 둘째 딸이자 외계인인 은혜를 보는 엄마는 자신과 닮은 모습에 살의를 느낄만했다. 그런데 남편이란 작자는 젊었을 적 아내와 닮았다는 개소리를 시전하더니 급기야는 아기를 갖게 만들었고, 큰딸은 둘째 딸을 엄마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정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런 상황이 소설이라 다행이지만, 영화로 나온다면 정말이지 너무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닮은 외계인 자식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설정이 공포 영화로 딱 좋았다.

<10개월>은 여자들이 남자로 변해가면서 사람들의 심리보다는 사회적인 문제점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자들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벌어질 거라 예상할 수 있는 당연한 범죄들이 일어나 진저리 치게 만들었다. 이성에 대한 욕구가 동물적인 것으로 변해버린 건지 건드려서는 안 될 임산부까지 납치하는 일도 일어났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까지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놈의 욕구가 대체 뭐길래 말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욕구에 지배되지 않는 사람이 있었고, 나쁜 마음을 먹었다가 생각을 바꾼 사람도 존재했다. 그리고 외형은 남자로 변했지만 여자였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도 있었고 말이다. 그 덕분에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결말이었다.

<운수 나쁜 날>은 유명한 소설 <운수 좋은 날>을 패러디한 신체 강탈자 문학이었다. <금연클럽> 역시 담배를 끔찍해하는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이용해 뭔가 색다른 느낌을 줬다.

신선한 장르의 단편 소설이라 가볍게 읽기 좋았다. 재미있고 섬뜩한 기억이 더러 남을 것 같다.


​​​​​​​

세상은, 아니 인류는 멸망해 가고 있다. 천천히, 혹은 빠르게, 인류는 번식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더 이상 후손을 남길 수 없는 상태로, 죽어갈 것이다. 사라져갈 것이다. 여자가 사라져 간다. 12월 25일 이후, 모든 신생아는 남자로 태어나고 여자들은 소녀건 할머니건 남자로 변해가고 있다. 더 이상 태아는 수정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그렇다. 최경빈 <10개월> - P18

내 품을 파고드는 작은 몸이 두려웠다. 나는 내 자식을 안아줄 수도, 뿌리칠 수도 없었다. 내 자식을 움직이게 한 것은 확신이 아닌 선택이었다. 내가 엄마라서가 아니라, 엄마로 나를 골랐기 때문에 은혜를 공격했다는 것을 알았다. 고맙고 무서운 일이었다. 김보람 <미래도둑> - P223

인격을 형성하는 것은 기억이다. 결국 내 밑에 깔린 채 헐떡거리며 발버둥 치는 것도 나인 셈이다. 때문에 죽여야 한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 나는 한 명이어야 한다. 김보람 <미래도둑>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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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의 낯선 자들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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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가이는 3년째 별거 중인 아내 미리엄을 만나러 가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이혼을 하려고 마음먹게 된 건 미리엄이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고, 그와 결혼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가이 역시 현재 교제 중인 앤과 결혼을 하고 싶었기에 이혼을 해야만 했다.
가는 동안 기차에서 책을 읽으려던 가이는 자세를 바꾸려다 맞은편에 앉은 젊은 남자를 건드리게 됐는데, 그때부터 그 남자 브루노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혼에 대해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보고 싶었던 가이는 브루노를 거절했지만, 그는 자신의 특별 전용실이 조용하다면서 함께 가기를 권했다. 가이는 계속 거절을 하기가 뭐 해서 브루노를 따라가게 됐다.

조용한 특별실에서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됐다. 가이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미리엄과의 이혼에 대한 바람을 드러냈고, 브루노는 증오하는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브루노는 가이에게 상대가 증오하는 사람을 서로 죽여주면 되겠다는 제안을 했다. 자신은 미리엄을, 가이는 브루노의 아버지를 죽인다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거라면서 말이다. 브루노의 제안에 가이는 놀라고 당황하여 거절의 뜻을 내비친 뒤 기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이는 앤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미리엄이 놀이공원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분명 브루노의 짓일 거라 확신했는데, 그때부터 가이는 브루노에게 압박을 받기 시작한다. 자신이 미리엄을 죽였으니 가이가 브루노의 아버지를 죽일 차례라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 가깝게 지내는 아는 사람에게 말하기보다는 한 번 보고 말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속을 털어놓으면 좋을 때가 있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과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야겠지만 말이다.
가이가 브루노에게 미리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브루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진 인간이었다. 자신이 혐오하는 아버지가 있고, 가이에겐 미리엄이란 존재가 있으니 서로 대상을 바꿔 살해하면 되겠다는 기이한 논리를 펼쳤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이가 경악하는 건 당연했다. 미리엄이 골치를 아프게 만들기는 하지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자라 결혼까지 했었는데 죽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이는 거절 의사를 내비치고 기차에서 내렸지만 브루노는 거절이라는 뜻을 받아들일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부정보다는 긍정의 뜻으로 알고 미리엄을 어떻게든 찾아내 죽이게 됐으니 말이다.
미리엄이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불리해진 건 당연히 가이였다. 두 사람이 이혼을 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별거 중에 미리엄이 바람을 피워 임신했다는 사실 또한 알려진 것이었다. 남편의 입장에선 살의가 생길 수 있는 상황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다행히 가이는 앤과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함께 있었기에 알리바이가 확실했던 덕분에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후부터 브루노의 압박이 시작되어 가이는 미리엄이 죽기 전보다 더 골치가 아파졌다. 브루노는 자꾸만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해대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면 경찰에 교환 살인에 대해 말할 거라고 협박을 했다. 거기다 앤에게까지 편지를 보낸 탓에 가이의 괴로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가이는 브루노를 달래기도 하고 화를 내 보기도 하지만 그는 포기하질 않았다. 오히려 살인을 한 후에 가이를 자신의 소울메이트, 잃어버린 형제 내지는 반쪽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서로 닮았다면서 말이다. 브루노의 끈질긴 압박에 가이는 그의 아버지를 찾아가 죽이게 되면서 끝인 줄 알았지만 절대 끊어낼 수 없는 관계라는 게 더욱 분명해졌다.

여기서부터 놀라웠던 건 가이의 심리였다. 기차 안에서 교환 살인이라는 브루노의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땐 경악하며 그런 제안을 한 그를 벌레 보듯 했었다. 그런데 브루노가 자꾸만 찾아와 압박을 가하자 가이는 마음이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를 죽인 뒤에는 마치 브루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브루노라는 존재가 가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욕망을 끄집어냈다고 말이다. 이로 인해 가이는 욕망에 충실한 자아와 정직한 자아가 대립을 벌이게 된 것 같았다.
어쩌면 브루노는 가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과 닮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죽이고 싶도록 미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것일 테고, 가이를 구제해 주기 위해 혹은 일깨우기 위해 미리엄을 죽인 것일 수도 있었다. 이후에는 아버지를 처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이가 자신과 같은 사람,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인해 그를 압박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낯선 타인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점점 비슷해지는 것 같은 묘한 상황이 긴장감 있게 흘러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끝내 달랐던 건 범죄를 잘못된 것으로 인지하느냐 아니냐에 따른 결말일 것이다. 혼란스러움으로 인생 전체가 뒤흔들린 가이가 그나마 브루노보다 나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은 놀랍게도 데뷔작이라고 한다. 첫 소설이 이렇게 대단한 작품이라니 천재적인 작가였음에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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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우리 둘이 서로를 위해 살인을 하는 겁니다. 난 당신의 아내를,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죽이는 거죠. 우린 기차에서 우연히 만났으니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라요. 완벽한 알리바이라고요!" - P37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바라던 일을 이룰 뿐 아니라 친구에게도 도움이 되는 살인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친구를 위해 하는 일이었으므로 몹시 기뻤다. 그리고 그에게 희생될 그녀는 죽어 마땅했다. 그는 앞으로 그녀를 만나게 될 많은 남자들을 구제해 주는 셈이었다! 브루노는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현혹되었고, 아주 오랫동안 기분 좋게 술에 취해 있었다. - P82

가이가 맞서야 하는 대상은 그의 전체적인 자아도, 브루노도, 그의 업무도 아니었다. 바로 그의 반쪽 자아였다. 그는 그 반쪽 자아를 때려 부수고 지금의 자아로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 P239

"가이가 늘 말하는, 모든 것에는 이중성이 있다는 생각이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나란히 있다는 생각, 모든 결정에는 그에 반대되는 이유가 있죠.
(…중략)
사람들, 감정들, 모든 것이 이중적이라는 거죠. 개개인의 마음속에 두 사람이 있는 거죠. 보이지 않는 당신의 일부처럼 당신과 정반대인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고, 숨어서 기다리고 있죠."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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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은 어디에
재클린 부블리츠 지음, 송섬별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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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앨리스 리는 600달러와 잭슨 선생님에게서 훔친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뉴욕에 왔다. 앨리스가 살던 곳에서는 더 이상 그녀를 따스하게 보듬어줄 사람도, 가족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앨리스는 방을 빌려준다는 사람을 찾아냈고 연락을 취해 그의 집으로 갔다. 우려와는 다르게 노신사였던 노아가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마음이 놓였다. 노아의 집에서 방을 빌려 생활하면서부터 앨리스는 이제 이 새로운 도시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조금씩 갈피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폭풍우가 치던 날 아침에 사진을 찍기 위해 허드슨강의 리버사이드 파크에 간 앨리스는 어떤 남자에게 머리를 카메라로 얻어맞고, 목이 졸려 죽었고, 시체마저 욕보이게 됐다.

호주에 살던 서른여섯 살 루비 존스는 문득 떠나고 싶어졌다. 오랫동안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였던 애시가 약혼녀와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도 루비와의 관계를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끌어모아 떠나게 된 곳은 뉴욕이었다. 뉴욕에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늘 외로운 나날만 보내게 됐다. 더군다나 애시가 자꾸만 연락을 하는데 기다렸다는 듯 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일기도 했다.
그래서 비가 쏟아지던 날, 루비는 허드슨 강가에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한참을 달리기에 몰입해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온 루비는 되돌아가려다가 근처 자갈밭에 묘한 자세로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게 된다.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는 그녀가 이상하게 여겨져 911에 신고한 루비는 그 이후 '리버사이드 제인'이라 불리게 된 앨리스를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다.



보통의 추리 소설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뒤 범인을 찾는 일에 집중한다. 때로는 범인의 시점으로 진행되어 사이코패스의 시선을 따라가기도 하고, 어떨 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피해자의 시선을 통해 트라우마를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이런 보편적인 추리 소설과는 다르게 이 소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앨리스와 그런 앨리스가 처참하게 죽어있는 걸 발견한 목격자 루비의 시선으로 진행되었다. 루비의 입장에서는 범인이 누구일지 거듭 생각하다가 문득 범인보다는 이름 없는 피해자를 기억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앨리스는 영혼의 모습을 하고선 자신을 발견한 루비와 살아있을 때 진심으로 보살펴줬던 노아를 걱정했고, 나중엔 범인을 밝혀내기 위해 단서를 던져주는 역할을 했다.

가만 보면 앨리스와 루비는 묘한 공통점들이 많았다. 18살과 36살이라는 두 배의 나이 차이는 우연이었을 테지만, 남자에게 상처를 받고 살던 곳을 떠나 뉴욕으로 왔다는 점이 너무나 닮아있었다. 뉴욕으로 왔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까지 비슷했다. 그로 인해 어쩌면 그녀들이 살아있을 때 서로 만났더라면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친구 사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노아와 앨리스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런 관계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후였으니, 앨리스의 영혼이 아무리 루비의 곁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고 범인으로부터 지켜내려고 안달을 하고 있더라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루비가 뭔가 꺼림칙한 느낌만 받게 했을 뿐이었다.

책을 읽으며 여러 번 울컥하게 만들었던 건 삶이 자신의 것이라 여겼던 한 소녀가 채 피어나지도 못하고 타인에 의해 삶이 끊어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18살밖에 되지 않았던 앨리스에게 죽음은 까마득히 먼 것이었다. 그녀 나이대의 예상 평균 수명이 79.1살이라고 했는데 그것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삶을 살다가 허망하게 모조리 빼앗겼다. 어떻게 누군가의 삶을, 인생의 수많은 길을 끊어버릴 수가 있는 건지 너무나 화가 났고, 앨리스를 생각하면 안타까워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루비가 왜 그렇게 앨리스의 존재를 알아내려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몽타주를 뿌려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아 한동안 가명으로 불렸던 앨리스를 그녀라도 기억하고 싶었다. 살아있을 땐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닿은 인연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이 괜스레 고맙기도 했다.

전개 방식이 독특했던 소설은 나중엔 루비를 중심으로 흘러가며 그녀의 개인적인 혼란스러움을 보여줬고, 한편으로는 앨리스와 관련된 일로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영혼 상태인 앨리스가 루비를 보며 간절했던 만큼 나도 같은 마음을 느꼈다. 루비가 뉴욕에 와서 만난 '데스클럽'의 멤버들과 앨리스의 신원이 밝혀졌을 때 찾아간 노아 덕분에 앨리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었던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현실에서도 세상을 떠난 이를 기억하기보다는 타인을 해하고 죽인 자에게 더 관심이 집중된다. 죽어 마땅한 이보다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을 대변한 듯한 소설이라 의미가 있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어제이고, 그들이 어깨 너머를 돌아보거나 손으로 열쇠를 움켜쥐며 보낸 모든 밤들이 남긴 그림자야. - P219

나는 앨리스 리이고, 이건 그 남자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야. - P437

루비는 평생 죽은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심했어. 죽은 자들 중에서도 그냥 소리 소문 없이 잊힐 뻔했던 이들을 찾아내 당신은 소중한 존재였다고 말해주고 싶었지. 가능한 한 그들의 존재를 이루는 이름의 음절들을 또박또박 명징하게 발음해 불러주면서. - P267

이제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지 않아. 오늘 밤부터 그들은 나에 대해 궁금해 하는 대신 기억하게 되었지.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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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남자를 찾아드립니다 - 그웬과 아이리스의 런던 미스터리 결혼상담소
앨리슨 몽클레어 저자, 장성주 역자 / 시월이일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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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의 런던.
근처의 건물들 여럿이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을 때, 유일하게 멀쩡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 건물의 꼭대기인 5층에는 '바른 만남 결혼 상담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결혼 상담소에서는 여러 남녀 회원을 모집해 이상형을 비롯해 성격, 취미 따위를 자세하게 고려하여 서로 맺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미스 아이리스 스파크스와 미시즈 그웬덜린 베인브리지가 그 일을 함께 하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모험심이 강하고 독립적이며 비밀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었고, 그웬은 영락없이 상류층 부인처럼 보였으나 사람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대단했다. 두 사람은 서로 성격부터 자라온 환경까지 완전히 달랐지만 일하는 데에 있어서는 환상의 파트너였기에 벌써 일곱 쌍의 부부를 맺어줬다.

어느 날 틸리 라살이라는 여성이 그곳을 찾았다. 아이리스와 그웬은 그녀의 이상형을 포함한 여러 관련 사항을 상세하게 조사를 한 뒤에 잘 맞을 것 같은 남성 고객을 찾아내 편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녀가 다녀간 뒤 일주일이 지났을 때, 경찰이 결혼 상담소를 찾아왔다. 틸리가 지난밤에 살해당했는데, 결혼 상담소에서 소개해 준 남성이 혹시 용의자일 수도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경찰이 방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틸리에게 소개해 준 디키 트로워가 살해 혐의로 체포된다. 디키가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여긴 두 사람은 그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사업을 위해 그의 무죄를 밝혀내고자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언제 죽을지 모를 상황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이제 평범하고도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자 괜찮은 배우자를 찾아 결혼을 하려고 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괜찮은 이성을 만날 수 있는지 막막했던 이들이 결혼 상담소를 찾았다. 그웬과 아이리스는 서로에게 잘 맞을 것 같은 두 남녀를 맺어주는 일에 제법 능력이 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타인을 보는 시선이 조금은 다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들의 사업이 완전히 망해버릴 수도 있는 사건이 일어나고야 마는데, 여성 회원이 살해된 것도 모자라 용의자가 남성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그웬과 아이리스는 이 사업에 많은 걸 걸었기 때문에 진짜 범인을 찾아야만 했다.

범인을 찾기 위한 과정의 첫 시작은 피해자인 틸리의 뒤를 먼저 캐는 것이었다. 사실 틸리가 상담소를 처음 방문해 남편감을 찾기 위해 대화를 나눴을 때, 아이리스는 그녀가 평범하고 정직하게 살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그녀가 변을 당한 뒤 장례식장에 찾아가 친구들과 가까워져 대화를 나누고, 또 다른 자리에까지 조사가 이어지다 보니 비밀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로 인해 평범한 청년 디키가 틸리를 살해하지 않았을 거라 확신했지만, 경찰은 그 정도 가지고 움직일 리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틸리의 삶을 더 깊이 파고들어갔고, 한편으로는 디키에게 면회를 가고 그가 하숙하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틸리와 디키의 삶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의외의 면이 드러나 그웬과 아이리스의 의욕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런데 평범한 두 여성이 어떻게 진범을 잡는다는 건지 조금은 막막하게 느껴졌다. 아이리스는 소설 초반에 살짝 드러난 과거에서 전쟁 중에 굉장한 일을 했었다는 뉘앙스가 종종 등장했고, 중반을 넘어섰을 땐 진짜 엄청난 인물이라는 게 밝혀져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반면에 그웬은 상류층 여성이었고,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뒤 정서적인 충격으로 인해 요양원이라 불리는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었다. 퇴원 후에는 하나뿐인 아들의 양육권을 가져간 시부모님으로 인해 그들의 대저택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억압된 면이 보이는 여성이었기에 과연 어떤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조금은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의외로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았던 건 역시나 성격 덕분이었던 것 같다. 서로 다르기에 의외로 잘 맞을 수 있었던 그녀들이 진짜 범인을 찾기 위해 어디까지 향해 가는지 함께 따라가면서 예상외로 굉장한 능력을 보여줘서 놀라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결혼 상담소가 아니라 탐정 사무실을 차려도 될 정도였다.

그렇게 진범을 찾기 위한 과정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비밀에 흥미진진했고, 진짜 범인이 밝혀졌을 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라 깜짝 놀랐다. 워낙에 추리력이 형편없어서 범인을 잘 못 찾기도 하지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며 읽다 보니 범인 후보에서 아예 제외한 캐릭터였기에 더욱 놀랐던 것이기도 했다. 소소하게 뒤통수를 친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다.

두 여성이 활약하는 시대물 추리 소설이라는 설정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아이리스와 그웬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나면 너무나 아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행히도 두 사람의 활약을 담은 시리즈가 3편까지 출판되었고, 작가가 4편을 집필 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빨리 후속작들이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만약 디키 트로워가 교수대에 매달린다면, 우리가 야심 차게 차린 이 아담한 상담소는 재정적으로 끝장나고 말 거야. 우린 지금 궁지에 몰렸고, 난 궁지에 몰리면 싸우는 쪽이야. 그것도 아주 지저분하게, 손에 잡히는 무기는 뭐든 다 이용해서."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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