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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은 어디에
재클린 부블리츠 지음, 송섬별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5월
평점 :
절판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앨리스 리는 600달러와 잭슨 선생님에게서 훔친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뉴욕에 왔다. 앨리스가 살던 곳에서는 더 이상 그녀를 따스하게 보듬어줄 사람도, 가족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앨리스는 방을 빌려준다는 사람을 찾아냈고 연락을 취해 그의 집으로 갔다. 우려와는 다르게 노신사였던 노아가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마음이 놓였다. 노아의 집에서 방을 빌려 생활하면서부터 앨리스는 이제 이 새로운 도시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조금씩 갈피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폭풍우가 치던 날 아침에 사진을 찍기 위해 허드슨강의 리버사이드 파크에 간 앨리스는 어떤 남자에게 머리를 카메라로 얻어맞고, 목이 졸려 죽었고, 시체마저 욕보이게 됐다.
호주에 살던 서른여섯 살 루비 존스는 문득 떠나고 싶어졌다. 오랫동안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였던 애시가 약혼녀와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도 루비와의 관계를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끌어모아 떠나게 된 곳은 뉴욕이었다. 뉴욕에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늘 외로운 나날만 보내게 됐다. 더군다나 애시가 자꾸만 연락을 하는데 기다렸다는 듯 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일기도 했다.
그래서 비가 쏟아지던 날, 루비는 허드슨 강가에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한참을 달리기에 몰입해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온 루비는 되돌아가려다가 근처 자갈밭에 묘한 자세로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게 된다.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는 그녀가 이상하게 여겨져 911에 신고한 루비는 그 이후 '리버사이드 제인'이라 불리게 된 앨리스를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다.
보통의 추리 소설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뒤 범인을 찾는 일에 집중한다. 때로는 범인의 시점으로 진행되어 사이코패스의 시선을 따라가기도 하고, 어떨 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피해자의 시선을 통해 트라우마를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이런 보편적인 추리 소설과는 다르게 이 소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앨리스와 그런 앨리스가 처참하게 죽어있는 걸 발견한 목격자 루비의 시선으로 진행되었다. 루비의 입장에서는 범인이 누구일지 거듭 생각하다가 문득 범인보다는 이름 없는 피해자를 기억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앨리스는 영혼의 모습을 하고선 자신을 발견한 루비와 살아있을 때 진심으로 보살펴줬던 노아를 걱정했고, 나중엔 범인을 밝혀내기 위해 단서를 던져주는 역할을 했다.
가만 보면 앨리스와 루비는 묘한 공통점들이 많았다. 18살과 36살이라는 두 배의 나이 차이는 우연이었을 테지만, 남자에게 상처를 받고 살던 곳을 떠나 뉴욕으로 왔다는 점이 너무나 닮아있었다. 뉴욕으로 왔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까지 비슷했다. 그로 인해 어쩌면 그녀들이 살아있을 때 서로 만났더라면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친구 사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노아와 앨리스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런 관계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후였으니, 앨리스의 영혼이 아무리 루비의 곁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고 범인으로부터 지켜내려고 안달을 하고 있더라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루비가 뭔가 꺼림칙한 느낌만 받게 했을 뿐이었다.
책을 읽으며 여러 번 울컥하게 만들었던 건 삶이 자신의 것이라 여겼던 한 소녀가 채 피어나지도 못하고 타인에 의해 삶이 끊어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18살밖에 되지 않았던 앨리스에게 죽음은 까마득히 먼 것이었다. 그녀 나이대의 예상 평균 수명이 79.1살이라고 했는데 그것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삶을 살다가 허망하게 모조리 빼앗겼다. 어떻게 누군가의 삶을, 인생의 수많은 길을 끊어버릴 수가 있는 건지 너무나 화가 났고, 앨리스를 생각하면 안타까워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루비가 왜 그렇게 앨리스의 존재를 알아내려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몽타주를 뿌려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아 한동안 가명으로 불렸던 앨리스를 그녀라도 기억하고 싶었다. 살아있을 땐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닿은 인연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이 괜스레 고맙기도 했다.
전개 방식이 독특했던 소설은 나중엔 루비를 중심으로 흘러가며 그녀의 개인적인 혼란스러움을 보여줬고, 한편으로는 앨리스와 관련된 일로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영혼 상태인 앨리스가 루비를 보며 간절했던 만큼 나도 같은 마음을 느꼈다. 루비가 뉴욕에 와서 만난 '데스클럽'의 멤버들과 앨리스의 신원이 밝혀졌을 때 찾아간 노아 덕분에 앨리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었던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현실에서도 세상을 떠난 이를 기억하기보다는 타인을 해하고 죽인 자에게 더 관심이 집중된다. 죽어 마땅한 이보다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을 대변한 듯한 소설이라 의미가 있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어제이고, 그들이 어깨 너머를 돌아보거나 손으로 열쇠를 움켜쥐며 보낸 모든 밤들이 남긴 그림자야. - P219
나는 앨리스 리이고, 이건 그 남자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야. - P437
루비는 평생 죽은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심했어. 죽은 자들 중에서도 그냥 소리 소문 없이 잊힐 뻔했던 이들을 찾아내 당신은 소중한 존재였다고 말해주고 싶었지. 가능한 한 그들의 존재를 이루는 이름의 음절들을 또박또박 명징하게 발음해 불러주면서. - P267
이제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지 않아. 오늘 밤부터 그들은 나에 대해 궁금해 하는 대신 기억하게 되었지.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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