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디스클레이머
르네 나이트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3월
평점 :
2013년.
캐서린과 남편 로버트는 이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들 니콜라스를 독립시킨 후에 큰 집에서 더는 살지 않아도 될 거란 생각에 조금 작은 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로버트와 캐서린이 일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짐을 다 풀지 못한 상태로 일단 살고 있었다.
그래서 캐서린이 '낯선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을 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당연히 로버트의 책인 줄로만 알고 집어 들어 읽기 시작한 그녀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다르긴 하지만, 이 책이 20년 전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게 된다.
스티븐은 아내 낸시를 7년 전에 떠나보냈고,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몸담았던 교직에서도 해임되었다. 사랑하는 낸시를 이제는 떠나보내야 할 것 같아 그녀의 물건들을 추려서 중고품 가게에 기부를 했다. 아직 쓸 수 있는 물건들은 다 기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옷장에서 낸시의 핸드백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가방을 열어본 스티븐은 아내가 자신도 모르게 꽁꽁 감춰둔 사진 뭉텅이를 발견해 깜짝 놀란다.
이후 스티븐은 낸시가 죽기 전까지 지냈던 아들 조나단의 집에 찾아가 그녀가 쓴 원고를 발견했고, 그걸 소설로 써서 출판한다. 고통받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잘 살고 있는 그 여자에게 복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이름이 알려진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다. 그래서 사회 고발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최근에는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캐서린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책 '낯선 사람'의 저자를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20년 전의 사건을 절대로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누가 말도 안 되는 이 책을 써서 자신을 두렵게 하는지, 남편 로버트와 아들 니콜라스에게까지 더러운 손길을 내미는 건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스티븐은 마침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해임됐기 때문에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구상하는 척하며 그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집과 연락처, 오래전에 딱 한 번 만났던 그의 아내 낸시에 대해서도 캐서린은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소설이 자신의 선에서만 끝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작자가 아들 니콜라스에게는 물론이고 로버트에게까지 보내 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캐서린이 그랬듯 로버트 역시 다른 이름임에도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봤기 때문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캐서린이 하는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녀에게 화를 냈고 나중엔 외면하는 일이 일어났다.
스티븐은 혼자 사는 평범한 노인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의 내면에는 여러 원망과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아내는 암에 걸려 죽기 직전까지 스티븐의 곁이 아니라 조나단의 집에서 지냈기에 낸시를 간호할 수도,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그로 인해 스티븐은 아내를 사랑하지만 원망하는 감정도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조나단은 19살이었던 20년 전 여행을 갔다가 익사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에 애틋한 슬픔만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에 발견한 사진과 낸시의 원고는 그의 감정에 불을 지필 수단이 되었다. 책이라는 작은 불씨로 시작한 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캐서린으로 인해 곁에까지 불을 번지게 두었다. 로버트에게 책을 보내 분노의 화살을 향하게 했고, 제 엄마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니콜라스가 알게 했다.
스티븐이 낸시의 원고를 각색해 쓴 소설이자 캐서린이 겪은 일은 20년 전에 일어났었다. 캐서린과 로버트, 5살 니콜라스는 스페인으로 여행을 갔었는데, 로버트가 일 때문에 먼저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캐서린은 여행을 접고 함께 돌아가려고 했지만, 로버트는 호텔 경비를 모두 처리했으니 남은 휴가를 즐기다 오라고 했다. 니콜라스와 함께 휴가를 보내던 캐서린은 우연히 술집에서 눈이 마주친 조나단에게 인사로 웃음을 지어 보였고, 이후 두 사람은 동선이 겹쳐 여러 번 마주치게 되었다.
스티븐이 쓴 소설 내용이 먼저 등장했기에 당연히 그걸 곧이곧대로 믿으며 캐서린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러고도 항변하는 모습에 화가 났었다. 로버트가 캐서린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 경멸스러워하는 게 이해가 됐을 정도였다. 그렇게 이어지던 소설은 캐서린이 극단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녀가 끝끝내 밝히지 않으려 했던 진실이 비로소 드러나 큰 충격을 안겼다. 로버트처럼 캐서린을 원망하고 화를 냈던 부정적인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미안함으로 바뀌었던 건 당연했다.
진실이 밝혀진 뒤의 이야기를 보며 로버트는 물론이고 이 모든 사태를 만든 스티븐 역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진실로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버트는 20년 넘게 결혼 생활을 해온 캐서린을 믿기보다 누군가가 던진 불씨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스티븐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외면하고 올곧게 아들을 믿기만 한 낸시의 뜻에 따라 작은 진실에 많은 거짓이 섞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캐서린이었다. 너무 많은 고통이 그녀를 잠식해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했지만, 진실이 드러난 이후 체념한 그녀는 그래도 한결 편해 보였다는 게 다행이었다. 지워낼 수 없는 과거로 전전긍긍했었지만 이제는 밝혀진 그 과거를 발판 삼아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살아가게 될 것 같았다.
<디스클레이머>는 내가 좋아하는 케이트 블란쳇이 출연한 애플TV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다. 나중에 애플TV를 구독하게 되면 잊지 않고 꼭 챙겨 보리라 마음먹었다. 흥미롭게 읽었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을 외면한 이들의 행동으로 인해 단 한 사람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괴롭게 남았다.
누군가의 일그러진 상상력이 캐서린을 고통에 빠뜨린 것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그보다 훨씬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녀는 그 단락을 읽는 순간 즉시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창작일 리는 없었다. 그녀가 과거에 직접 경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일어난 사건 그대로였고 그녀는 바로 그 현장에 있었다. 사건의 장본인이자 주인공으로. 캐서린은 느닷없이 책 속에 갇혀 있던 그녀 자신을 만났다. - P8.9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반질반질한 코닥 사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내 손으로 여자의 목을 졸라 죽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장냈을 것이다. 그 녀석이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없었다. 모든 것들 멈추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 한심한 늙은이는 그 일이 생긴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야 사진을 보게 됐다. 나는 클립을 집어 들고 뾰족한 끝으로 여자의 웃는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사진이 갈기갈기 찢어질 때까지. - P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