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적
박해울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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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하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 인해 동생 영상을 잃었다. 새벽녘에 들어온 아버지가 영하와 영상을 깨워 할머니 집에 가자고 해서 길을 나섰는데, 그는 두 아이와 함께 탄 차를 물속에 처박는 살해, 자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이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영하는 눈을 떠보니 물속이라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나가려던 중에 영하를 데리고 가려 했으나 결국 그녀만 살아남았다. 죄 없는 동생 영하는 자식과 스스로를 죽이려던 아버지로 인해 그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영하는 '센타릭사'의 로봇부의 부장으로 일하며 인공지능 로봇 시리즈 EL을 만들어냈다. 그중 EL-C9은 동생 영상이 성인이 된 후의 모습을 상상하며 외형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간병 보조 로봇인 C9이 어떤 사건에 관련되면서 헛소문이 퍼져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EL 모델 전부 폐기될 위기에서 구해준 건 영하와 어릴 때부터 친한 언니 정도민 덕분이었다. 센타릭사의 모델로 활동하다 회사에서 일하게 된 도민은 '아이포튬'의 생산지인 '차페크' 행성에 함께 가서 EL들에게 일을 시키자고 했다. 마침 차페크에는 영하를 키워준 지제 삼촌이 환경보전부 팀장으로 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선뜻 도민의 뜻을 따라 그곳으로 향했다.




영하에게는 어린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 죄책감이 성인이 된 그녀가 C9을 만들 아픈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병원에서 일하던 C9이 돌보던 노부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EL들은 더 이상 지구에서 살기 어려워졌다. C9이 노부부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이, 이미 C9은 사람을 죽인 살인 로봇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영하는 동생과 닮은 얼굴을 한 C9을 폐기하거나 이상한 곳에 팔려고 하는 걸 막기 위해 차라리 차페크로 가서 할 일을 찾아보는 게 낫겠다 여겼다. 차페크 행성의 후발대 본부장인 도민이 있었기에 영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고, 영상이 떠난 후 가족이 되어준 지제 삼촌이 있는 곳이기에 의지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영하가 차페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제가 일하는 환경보전부 사무실에 불이 난 것이었다. 지제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금세 빠져나올 수 있었겠지만, 그는 오래전에 다리를 크게 다쳐 휠체어를 타야만 했고 가뜩이나 사무실은 2층이었기에 지제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안 영하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영상이 세상을 떠난 후에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의지했던 사람인데 그마저 이제는 죽고 말았기에 영하는 자신과 상관없이 난 화재 사건임에도 스스로를 자책하고 말았다.

그런데 사건에 관해 알아보던 그녀는 불이 났을 때쯤 지제의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이 CCTV에 찍힌 걸 보게 된다. 영하는 간부급인 도민의 도움을 받아 그녀에 대해 알아보던 중에 은폐된 사건을 맞닥뜨리게 된다.

처음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땐 이제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과 관련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전체적인 그림으로는 그게 맞긴 했으나 세부적으로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도 담아내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가상의 국가, 인종들을 언급하며 당연하게 여기는 차별이 있었고, 소설 속에서 중요한 자원으로 언급된 아이포튬을 캐내는 어려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죽음까지 방관하거나 덮어버리는 비인간적인 태도가 만연했다. 차별은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에 읽는 내내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러는 한편으로 소설 후반에는 반전이 펼쳐지는데, 사실 어떤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부터 왠지 마음에 안 들더라니 그렇게 이어진 걸 보며 오랜만에 촉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명령에만 따를 뿐 배신은 하지 않는 로봇과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에는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며 의미를 남겼다. 유한한 존재와 거의 무한한 존재의 공존은 이렇게 이루어질 수도 있구나 싶어 조금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로봇을 경계심 없이 계속 사용하다 보면 언젠가 우리의 자리도 로봇이 대체할 겁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사라지고, 이 땅엔 로봇만 남겠죠." - P32

"그럼 살아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중략)
"자유로운 거. 마음대로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는 거. 마음이 내키는 대로 선택하는 거. 그러고 보니 궁금하구나. 넌 원하는 뭔가를 선택할 수 있게 만들어졌니?" - P135.136

"고장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라면, 그것은 고장이 아니라 성장이겠지. EL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성장하게 만들어졌으니까. 어쩌면 그 성장이 예상치 못한 방향일 수도 있겠지. 넌 수리받지 않아도 돼. 설령 그것을 선택할 수 없었더라도, 두 가지 선택지를 보았다면 그건 성장이야. 단지 넌 스스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거야."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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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넘 숲
엘리너 캐턴 지음, 권진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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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미라 번팅은 버려진 땅에서 작물을 키우는 게릴라 가드닝 단체 '버넘 숲'을 설립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미라의 곁에는 그녀의 일을 가장 잘 이해해 주고 도와주는 셸리가 있어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셸리는 이제 버넘 숲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미라의 눈에 산사태로 고립된 지역인 '손다이크 목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홀로 방문한 그녀는 곧 작위를 받을 예정인 목장 주인 오언 경에게서 땅을 사기로 약속한 로버트 르모인을 우연히 만났다. 미라는 미국인 억만장자인 로버트가 이곳에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로버트가 뉴질랜드의 구석진 목장에 눈독을 들인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감추기 위해 미라를 이용하기로 하고 버넘 숲에 후원을 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버넘 숲의 의도는 좋았다. 버려진 땅, 노는 땅에 작물을 키우고 소비하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판매해 자급자족하는 목표는 환경적으로 이상적이었으니 말이다. 한 가지 걸리는 건 다른 사람 소유의 땅, 혹은 집 마당 같은 데에 허락 없이 활동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경범죄 정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었기에 그들의 활동을 마냥 응원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 미라가 로버트를 만나 후원을 받기로 하면서 버넘 숲의 의도가 본의 아니게 흐려지고 있다고 보였다. 자급자족하는 친환경 가드닝 단체였지만 그들은 재정적인 문제가 심각했었다. 회원들이 각자 일을 하며 버넘 숲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버넘 숲만으로는 경제적 이익을 얻기가 어려웠다. 여기에서부터 버넘 숲의 목적을 이뤄나가기 어려워졌다. 어느 단체든지 활동을 하려면 재정적인 부분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친환경 단체라고 해도 최소한의 경제적 이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로버트의 후원은 버넘 숲에 온 천재일우였을 터였다.

하지만 정작 로버트를 우연히 만나 후원을 받기로 한 당사자이자 버넘 숲의 설립자인 미라는 갈수록 이 상황이 부담스러워졌다. 여느 때의 활동과 비슷하고 규모만 좀 커졌을 뿐인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 와중에 버넘 숲을 나가려고 했던 셸리는 과거 미라와 묘한 관계였던 토니가 돌아왔을 때 그에게 호감을 느끼며 같이 밤을 보내겠다는 다짐을 했었고, 로버트를 만난 이후에는 그에게로 관심을 기울였다. 셸리에게는 남자, 그것도 미라와 가까운 남자의 관심을 바라는 묘한 심리를 갖고 있었다.

버넘 숲의 회원이었지만 해외에 나갔다가 돌아온 토니는 로버트와 관련된 사항을 전해 듣고 격앙되어 의견을 피력하다가 제명되다시피했다. 그 이후 토니는 부유한 자들에 관한 고발 기사를 쓰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로버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경제적 상류층의 스테레오 타입처럼 보였다. 가만 보면 토니와 로버트는 대척점에 있는 관계였으나 자신이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은 같았다.

그리고 이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던 오언 경은 자신이 대외적으로 추구하는 환경보호론자 이미지와 맞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보여줬다. 대외적으로는 나이브한 이미지를 꾸며냈지만, 로버트에게는 본래의 가치보다 월등히 높은 액수를 받고 목장을 팔았던 걸 보면 말이다.


다섯 캐릭터의 모습을 보며 요즘 사회가 추구하는 인간의 형태를 소설 안에 펼쳐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꾸민 오언 경 같은 인간도 있을 테고, 원하는 게 무엇이고 원하지 않는 건 또 뭔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셸리와 미라도 있었다. 그리고 원하는 걸 확신하는 로버트와 토니도 존재했다.

이런 이들이 후반에 손다이크 목장과 그 주변에 모였을 때 상상도 못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소설은 급박한 전개를 띠며 각 캐릭터의 숨은 면, 숨기고 싶은 면을 드러내 당혹스럽게 했다. 한편으로는 우려스럽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는 예상 그대로라 놀랍지도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과 결말은 내가 잘 아는 건 아님에도 현실적이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개운치가 않았다.


소설 <버넘 숲>은 과작을 하는 작가인 엘리너 캐턴의 신작이다. <루미너리스>를 무척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시대극인 전작과는 다르게 이번 소설은 현대를 배경으로 갈수록 현실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결말이 현실과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집단 감시는 전체주의적이고 억압적이죠. 억만장자 계급은 그 존재만으로 연대를 잠식합니다. 그건 근본적으로 지속 불가능하고 시대에 역행하고 정의에 반해요. 시민권을 팔고 사면 안 됩니다. 저항 행위가 의뢰 가능한 일이 되어서는 안 돼요.」 - P164

「뭐가 옳은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잖아. 내 말은, 뭐가 옳은지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안다고 자신에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선택하는 시점에는, 그러니까 그 순간에는 절대 확신하지 못하잖아. 그냥 바랄 뿐이지. 그냥 일단 행동하고 최선의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거지. 지나고 보면, 그게 옳은 일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아닐 경우에는, 적어도 노력은 했다고 말할 수밖에. 하지만 잘못된 일은 말이야, 종종 훨씬 분명해. 잘못된 일은 많은 경우 옳은 일보다 더 잘 보여. 더 명확해. 이건 내가 안 넘을 걸 아는 선, 이건 내가 절대 하지 않을 일, 이런 식으로.」 - P33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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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클레이머
르네 나이트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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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캐서린과 남편 로버트는 이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들 니콜라스를 독립시킨 후에 큰 집에서 더는 살지 않아도 될 거란 생각에 조금 작은 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로버트와 캐서린이 일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짐을 다 풀지 못한 상태로 일단 살고 있었다.

그래서 캐서린이 '낯선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을 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당연히 로버트의 책인 줄로만 알고 집어 들어 읽기 시작한 그녀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다르긴 하지만, 이 책이 20년 전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게 된다.


스티븐은 아내 낸시를 7년 전에 떠나보냈고,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몸담았던 교직에서도 해임되었다. 사랑하는 낸시를 이제는 떠나보내야 할 것 같아 그녀의 물건들을 추려서 중고품 가게에 기부를 했다. 아직 쓸 수 있는 물건들은 다 기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옷장에서 낸시의 핸드백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가방을 열어본 스티븐은 아내가 자신도 모르게 꽁꽁 감춰둔 사진 뭉텅이를 발견해 깜짝 놀란다.

이후 스티븐은 낸시가 죽기 전까지 지냈던 아들 조나단의 집에 찾아가 그녀가 쓴 원고를 발견했고, 그걸 소설로 써서 출판한다. 고통받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잘 살고 있는 그 여자에게 복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이름이 알려진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다. 그래서 사회 고발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최근에는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캐서린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책 '낯선 사람'의 저자를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20년 전의 사건을 절대로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누가 말도 안 되는 이 책을 써서 자신을 두렵게 하는지, 남편 로버트와 아들 니콜라스에게까지 더러운 손길을 내미는 건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스티븐은 마침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해임됐기 때문에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구상하는 척하며 그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집과 연락처, 오래전에 딱 한 번 만났던 그의 아내 낸시에 대해서도 캐서린은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소설이 자신의 선에서만 끝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작자가 아들 니콜라스에게는 물론이고 로버트에게까지 보내 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캐서린이 그랬듯 로버트 역시 다른 이름임에도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봤기 때문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캐서린이 하는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녀에게 화를 냈고 나중엔 외면하는 일이 일어났다.




스티븐은 혼자 사는 평범한 노인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의 내면에는 여러 원망과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아내는 암에 걸려 죽기 직전까지 스티븐의 곁이 아니라 조나단의 집에서 지냈기에 낸시를 간호할 수도,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그로 인해 스티븐은 아내를 사랑하지만 원망하는 감정도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조나단은 19살이었던 20년 전 여행을 갔다가 익사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에 애틋한 슬픔만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에 발견한 사진과 낸시의 원고는 그의 감정에 불을 지필 수단이 되었다. 책이라는 작은 불씨로 시작한 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캐서린으로 인해 곁에까지 불을 번지게 두었다. 로버트에게 책을 보내 분노의 화살을 향하게 했고, 제 엄마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니콜라스가 알게 했다.


스티븐이 낸시의 원고를 각색해 쓴 소설이자 캐서린이 겪은 일은 20년 전에 일어났었다. 캐서린과 로버트, 5살 니콜라스는 스페인으로 여행을 갔었는데, 로버트가 일 때문에 먼저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캐서린은 여행을 접고 함께 돌아가려고 했지만, 로버트는 호텔 경비를 모두 처리했으니 남은 휴가를 즐기다 오라고 했다. 니콜라스와 함께 휴가를 보내던 캐서린은 우연히 술집에서 눈이 마주친 조나단에게 인사로 웃음을 지어 보였고, 이후 두 사람은 동선이 겹쳐 여러 번 마주치게 되었다.

스티븐이 쓴 소설 내용이 먼저 등장했기에 당연히 그걸 곧이곧대로 믿으며 캐서린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러고도 항변하는 모습에 화가 났었다. 로버트가 캐서린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 경멸스러워하는 게 이해가 됐을 정도였다. 그렇게 이어지던 소설은 캐서린이 극단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녀가 끝끝내 밝히지 않으려 했던 진실이 비로소 드러나 큰 충격을 안겼다. 로버트처럼 캐서린을 원망하고 화를 냈던 부정적인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미안함으로 바뀌었던 건 당연했다.


진실이 밝혀진 뒤의 이야기를 보며 로버트는 물론이고 이 모든 사태를 만든 스티븐 역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진실로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버트는 20년 넘게 결혼 생활을 해온 캐서린을 믿기보다 누군가가 던진 불씨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스티븐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외면하고 올곧게 아들을 믿기만 한 낸시의 뜻에 따라 작은 진실에 많은 거짓이 섞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캐서린이었다. 너무 많은 고통이 그녀를 잠식해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했지만, 진실이 드러난 이후 체념한 그녀는 그래도 한결 편해 보였다는 게 다행이었다. 지워낼 수 없는 과거로 전전긍긍했었지만 이제는 밝혀진 그 과거를 발판 삼아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살아가게 될 것 같았다.


<디스클레이머>는 내가 좋아하는 케이트 블란쳇이 출연한 애플TV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다. 나중에 애플TV를 구독하게 되면 잊지 않고 꼭 챙겨 보리라 마음먹었다. 흥미롭게 읽었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을 외면한 이들의 행동으로 인해 단 한 사람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괴롭게 남았다.

누군가의 일그러진 상상력이 캐서린을 고통에 빠뜨린 것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그보다 훨씬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녀는 그 단락을 읽는 순간 즉시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창작일 리는 없었다. 그녀가 과거에 직접 경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일어난 사건 그대로였고 그녀는 바로 그 현장에 있었다. 사건의 장본인이자 주인공으로. 캐서린은 느닷없이 책 속에 갇혀 있던 그녀 자신을 만났다. - P8.9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반질반질한 코닥 사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내 손으로 여자의 목을 졸라 죽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장냈을 것이다. 그 녀석이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없었다. 모든 것들 멈추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 한심한 늙은이는 그 일이 생긴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야 사진을 보게 됐다. 나는 클립을 집어 들고 뾰족한 끝으로 여자의 웃는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사진이 갈기갈기 찢어질 때까지.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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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 댄서
타네히시 코츠 지음, 강동혁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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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람 워커는 농장주인 백인 아버지와 노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이람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팔아버린 뒤 그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한 번 보거나 들은 건 모조리 기억한다는 특징이 있었는데, 팔려간 어머니만큼은 기억나는 게 없었다.

농장에서 홀로 살아가다 테나와 함께 지내게 된 하이람을 주인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던 아버지가 데리고 집으로 갔다. 그의 아들 메이너드를 보필하는 일을 하이람에게 맡긴 것이었다. 어린 하이람은 형이자 주인님이 된 메이너드를 보살피는 데 온 신경을 다 썼지만, 부유한 백인 남자가 그렇듯 그는 주변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행동했다.


그러다 하이람과 메이너드가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다 물에 빠졌고, 기적적으로 하이람은 강에서 빠져나왔다. 이후 하이람의 인생은 메이너드와 결혼 예정이었던 코린 퀸으로 인해 많은 게 바뀌게 된다.




노예 해방에 관한 몇몇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지난한 삶을 살다 가족과 친구, 연인을 잃은 고통, 무자비한 주인으로 인해 도망쳐야 희망 없는 기대를 품은 그런 소설들 말이다.

그런데 <워터 댄서> 주인공 하이람이 내가 읽은 여느 소설 속 노예 신분과 달랐던 건 그가 노예이긴 해도 물라토였기 때문이다. 농장주 아버지 하월 워커와 흑인 노예 어머니 로즈 사이에서 태어난 하이람은 다른 노예들보다 밝은 피부색을 가졌기 때문에 모순적이지만 조금은 자유로웠던 게 아닌가 싶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일을 해야만 하는 흑인 노예의 중노동에서 살짝 벗어난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더구나 하이람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신비로운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하이람이 아버지의 집에서 메이너드를 보필하다가 파티가 있던 날 손님들 앞에서 뛰어난 기억력을 재주로 선보인 이후 그는 메이너드의 가정교사 필즈와 정식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노예 신분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교육을 받으며, 진정한 후계자인 메이너드를 동생인 그가 보필하는 일을 아버지는 믿고 맡겼지만 하이람은 노예지만 노예가 아닌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메이너드가 아버지의 농장의 진정한 주인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메이너드를 너무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그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하라며 풀어주는 바람에 망나니가 되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도 결혼을 약속한 부유한 상속녀 코린 퀸도 있었고 말이다.

불만이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던 하이람은 술에 취한 메이너드를 마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말을 강 쪽으로 몰아 일부러 사고를 냈다. 그 사고로 메이너드는 죽고 하이람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그것도 코린 퀸의 하인 호킨스에게 구조되었다. 이후 코린 퀸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된 그는 아들을 잃은 상실로 좌절한 아버지로 인해 그녀에게 양도될 예정이었으나, 사랑하는 소피아와 도망치고 싶어서 '언더그라운드'라고 알려진 아저씨에게 탈출을 부탁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꿈은 다른 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이람이 진짜 언더그라운드에 소속되면서 '인도'라고 불리는 신비한 능력을 체득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언더그라운드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상상도 못한 비밀이어서 정말 깜짝 놀랐다. 그들에게 소속되어 북부 지부로 보내져 자유로운 삶을 살다가 여러 사건을 겪고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하이람은 다시 남부 아버지의 농장으로 돌아와 자신을 어머니처럼 키워준 테나와 소피아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는 과정까지 이어졌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흑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은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후반에 인도를 하는 장면은 그 시절 자유를 열망하던 노예의 기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아쉬운 건 인상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버지니아는 한 인종 전체가 사슬에 굴복하리라는 믿음이 건재한 곳이며, 바로 그 인종이 정확한 비율로 철을 주조하고 계산하여 대리석을 조각해낼 능력이 있다 해도 그들을 계속 짐승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 순간 그녀를 팔아버리는 곳이었다. - P101

"넌 내가 아까 그놈들을 죽인 게 살인이라고 했지. 하지만 너한테 해줄 말은, 내가 한 일은 누군지도 모를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었다는 거다. 너를 살해할 사람들, 너를 가족과 친구로부터 떼어놓을 사람들, 그러고도 전혀 기억하지 못할 사람들." - P302

"모두가 뭘 더 사랑해야 할지 결정해야 해. 사랑스럽거나 고약한 것 중에서. 자기 눈앞에 놓인 것들을 사랑하든지, 자신의 분노와 평판을 더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나는 이 세상의 진창을 선택했어, 소피아. 나는 모든 현실을 받아들였어." - P474.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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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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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사람들은 어릴 때 알파와 오메가로 분리되어 각각 알파, 오메가 지역에서 따로 자랐다. '트윈'이라 불리는 상태에서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분리됐던 알파와 오메가가 다시 하나가 되는데, 기억은 온전히 갖게 되어도 신체적 특징 같은 건 무작위 선별된다.

성인식 전날 밤 '나' 알파의 오메가가 지역에서 무단이탈해 도망쳤다가 잡혀왔다. 그래서 다시 성인식을 준비하는 동안 한동안 알파와 오메가는 할머니와 함께 살아야 했다. 알파는 오메가의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고 몰래 알파 구역으로 온 오메가의 친구들까지도 너무 진절머리가 난다. 하지만 오메가의 친구를 좋아하게 되면서 오메가와 조금씩 가까워졌고 이해하게 된다.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사모아제도에서 발견된 풀 '아즈깔'에 중독되면 과거의 생 전부를 기억하게 된다. 그들을 '각성자'라 불렀는데, '나'는 그런 각성자들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삶에 대해 인터뷰하고 인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다.


긴 예지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한 어떤 게임으로 인해 효주는 예지에 대해 알게 된다. 돌보던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인 솔이가 그 게임을 너무나 잘했는데, 어느 날 솔이를 정부기관이라던 이들이 데리고 갔다. 그 후에 솔이를 생각하며 게임을 하던 효주에게 그 정부기관 사람인 도경이 찾아와 그녀 역시 데리고 갔다. 알고 보니 그 게임은 닥쳐올 미래 예지를 위해 만든 것이었는데, 그 확률 게임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예지 능력이 있음을 판단하고 보호 조치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솔이를 다시 만나 함께 생활하던 효주는 자신의 예지 능력이 여러 사람의 예지 능력에 못 미친다는 걸 알게 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의 예지 능력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깨달으며 세계를 구하고자 마음먹는다.


기도는 기적의 일부   어릴 때 수해 지역에서 기적을 보여준 '메시아' 유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성인이 된 그녀가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을 때 바다에 유출된 기름을 다시 배로 돌려보낸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녀의 존재를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후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유리는 인적은 드물지만 도움이 필요한 곳마다 나타난다.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시스템 매기 안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영화를 보며 모든 지식을 익힌 '나'는 영화를 만드는 혜경을 알게 되고, 그녀가 만든 캐릭터 승용과 합치되면서 혜경에게 기나긴 편지를 보낸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저마다 다른 다섯 가지 이야기지만, 어느 정도 관통하는 주제가 있을 텐데 그걸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곱씹다 보니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어느 정도 보였다. 타인에 대해, 더러는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불특정 다수, 혹은 인류에게 마음을 쓰는 내용이라고 말이다. <긴 예지>와 <기도는 기적의 일부>가 인류를 위한 이야기가 깊이 담겨 있었다.

<긴 예지>에서 효주가 베이비시터로 돌보던 아이 솔이와 가까운 사이가 된 도경을 위해 종말을 피할 수 없는 미래를 바꾸려고 과거를 보는 일을 시작했었다.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온 수십만 번의 삶은 마침내 인류를 향한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기도는 기적의 일부>를 통해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한 지구 환경에도 희망은 있다는 걸 보여줬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와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가결한 관계에 대해 말했다. 한 사람이 알파와 오메가로 나뉘어 10대를 보내고 난 후 성인식 때 다시 합쳐지는 내용을 담은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에서 한 사람이지만 완전히 다른 나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이야기를 했다.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은 모든 생을 기억하게 된 각성자가 나타나면서 그 사람과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모든 생에서 겹쳐지고 반복되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관계들이 더러는 섬뜩하면서도 어느 한편으로는 애틋하게 다가왔다는 게 독특한 느낌을 남겼다.


처음 읽어보는 우다영 작가의 SF 단편집은 여태껏 내가 읽은 SF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SF인데도 왠지 현실적인 느낌이 많이 들었다는 게 기이하고 묘했다. 매 이야기가 시작할 땐 너무나 건조했는데 마지막에는 은은한 온기를 남겼다.

"한 아이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 그런 강하고 놀라운 마음이 사람을 찾아올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요? 이 무질서한 세상에 그런 질서정연한 선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요." <긴 예지> - P163.164

"하나의 생을 과연 한 사람만으로 설명하는 게 가능할까? 당연히 그 생에서 맺고 있던 관계들을 말해야 그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건데."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 P92

수많은 생의 수많은 순간 중에 하나의 장면을 깊은 의식 속에서 길어 올려 들려주는 오래된 영혼의 마음을 나는 가끔 상상해본다. 찰나의 표정과 평범한 하루와 작은 약속을 기억하는 마음이란. 어떻게 이토록 사소한 기억이, 먼지 같은 이야기가 흩어지지 않고 마음에 남았을까?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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