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 개의 적
박해울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1월
평점 :
서영하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 인해 동생 영상을 잃었다. 새벽녘에 들어온 아버지가 영하와 영상을 깨워 할머니 집에 가자고 해서 길을 나섰는데, 그는 두 아이와 함께 탄 차를 물속에 처박는 살해, 자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이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영하는 눈을 떠보니 물속이라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나가려던 중에 영하를 데리고 가려 했으나 결국 그녀만 살아남았다. 죄 없는 동생 영하는 자식과 스스로를 죽이려던 아버지로 인해 그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영하는 '센타릭사'의 로봇부의 부장으로 일하며 인공지능 로봇 시리즈 EL을 만들어냈다. 그중 EL-C9은 동생 영상이 성인이 된 후의 모습을 상상하며 외형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간병 보조 로봇인 C9이 어떤 사건에 관련되면서 헛소문이 퍼져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EL 모델 전부 폐기될 위기에서 구해준 건 영하와 어릴 때부터 친한 언니 정도민 덕분이었다. 센타릭사의 모델로 활동하다 회사에서 일하게 된 도민은 '아이포튬'의 생산지인 '차페크' 행성에 함께 가서 EL들에게 일을 시키자고 했다. 마침 차페크에는 영하를 키워준 지제 삼촌이 환경보전부 팀장으로 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선뜻 도민의 뜻을 따라 그곳으로 향했다.
영하에게는 어린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 죄책감이 성인이 된 그녀가 C9을 만들 아픈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병원에서 일하던 C9이 돌보던 노부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EL들은 더 이상 지구에서 살기 어려워졌다. C9이 노부부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이, 이미 C9은 사람을 죽인 살인 로봇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영하는 동생과 닮은 얼굴을 한 C9을 폐기하거나 이상한 곳에 팔려고 하는 걸 막기 위해 차라리 차페크로 가서 할 일을 찾아보는 게 낫겠다 여겼다. 차페크 행성의 후발대 본부장인 도민이 있었기에 영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고, 영상이 떠난 후 가족이 되어준 지제 삼촌이 있는 곳이기에 의지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영하가 차페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제가 일하는 환경보전부 사무실에 불이 난 것이었다. 지제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금세 빠져나올 수 있었겠지만, 그는 오래전에 다리를 크게 다쳐 휠체어를 타야만 했고 가뜩이나 사무실은 2층이었기에 지제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안 영하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영상이 세상을 떠난 후에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의지했던 사람인데 그마저 이제는 죽고 말았기에 영하는 자신과 상관없이 난 화재 사건임에도 스스로를 자책하고 말았다.
그런데 사건에 관해 알아보던 그녀는 불이 났을 때쯤 지제의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이 CCTV에 찍힌 걸 보게 된다. 영하는 간부급인 도민의 도움을 받아 그녀에 대해 알아보던 중에 은폐된 사건을 맞닥뜨리게 된다.
처음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땐 이제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과 관련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전체적인 그림으로는 그게 맞긴 했으나 세부적으로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도 담아내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가상의 국가, 인종들을 언급하며 당연하게 여기는 차별이 있었고, 소설 속에서 중요한 자원으로 언급된 아이포튬을 캐내는 어려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죽음까지 방관하거나 덮어버리는 비인간적인 태도가 만연했다. 차별은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에 읽는 내내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러는 한편으로 소설 후반에는 반전이 펼쳐지는데, 사실 어떤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부터 왠지 마음에 안 들더라니 그렇게 이어진 걸 보며 오랜만에 촉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명령에만 따를 뿐 배신은 하지 않는 로봇과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에는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며 의미를 남겼다. 유한한 존재와 거의 무한한 존재의 공존은 이렇게 이루어질 수도 있구나 싶어 조금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로봇을 경계심 없이 계속 사용하다 보면 언젠가 우리의 자리도 로봇이 대체할 겁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사라지고, 이 땅엔 로봇만 남겠죠." - P32
"그럼 살아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중략) "자유로운 거. 마음대로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는 거. 마음이 내키는 대로 선택하는 거. 그러고 보니 궁금하구나. 넌 원하는 뭔가를 선택할 수 있게 만들어졌니?" - P135.136
"고장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라면, 그것은 고장이 아니라 성장이겠지. EL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성장하게 만들어졌으니까. 어쩌면 그 성장이 예상치 못한 방향일 수도 있겠지. 넌 수리받지 않아도 돼. 설령 그것을 선택할 수 없었더라도, 두 가지 선택지를 보았다면 그건 성장이야. 단지 넌 스스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거야." - P2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