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몬스터
이두온 지음 / 창비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복지 회관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려던 허인회는 그 순간 정전이 되는 바람에 풀 안에서 허우적대다가 발목을 접질린다. 그런 그녀를 구해준 사람은 강사 조우경이었다. 수영 강사답게 눈길을 사로잡는 건장한 체격으로 자신을 구해준 우경에게 인회는 대뜸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말을 했다. 인회의 남편 오진홍은 결혼 전에 차였던 여자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인회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진홍과 이혼하지 않으며 오랜 시간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경이 자신을 구해준 순간 이후 그에게 단번에 빠져들어 사랑을 느끼게 된다.

엄지민은 엄마 염보라가 자신의 이름으로 대출받고선 갚지 않는 바람에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엄마는 도통 나타나질 않았다. 연락을 해봐도 받지 않았고, 엄마가 보내온 문자는 그녀가 쓴 것이 아니라고 의심될 정도였다. 그래서 집을 뒤지다가 엄마가 혈액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엄마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진 지민은 그녀가 다녔다던 수영장을 다니며 잠복을 시작했다.
그렇게 엄마의 흔적은 찾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던 어느 날, 집에 누군가가 찾아온다. 엄마와 바람이 난 아저씨의 아내 인회였다.



소설은 몇몇 인물들의 시점으로 진행되었다. 암에 걸린 엄마를 찾기 위해 수영장에 다니는 지민과 같은 수영장에서 젊은 수영 강사에게 빠져버린 50대 여성 인회였다. 그리고 소설이 조금 진행된 후에는 수영 강사 우경의 시점이 추가되었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수영장의 나이 든 여성 회원들의 정체가 밝혀진 뒤에는 고미선의 시선도 등장했다.
이렇게 연령과 성별이 다른 여러 캐릭터들이 모이게 된 건 복지 회관의 수영장이었다. 이 수영장에 관한 특이점은 소설 도입에서부터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도시의 미혼 남녀의 결혼을 위해 수영장이 이용됐다는 것이다. 구청에서 주관하는 단체 미팅 같은 행사라는 명분이 정말 말도 안 되게 느껴졌다. 다 읽은 후에 소설의 시작을 장식한 이 장면이 소설 전반에 대한 통찰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나 재력 등의 조건만으로 뽑힌 사람들만 참석할 수 있는 행사에 사랑이 있을 수 없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이 이상한 수영장을 배경으로 저마다 미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해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가만 보면 이들은 사랑에 크게 데인 적이 있어서 이렇게 미쳐버린 것 같은, 목마른 사랑을 하는 거라고 느껴졌다.
지민은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한 후에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 그로 인해 도망치기만 하는 사랑을 했다.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친구 태이에게서 도망친 게 그 시작이었을 터였다. 성인이 된 후에는 엄마에게서도 도망치는 선택을 한 걸 보면 지민의 마음에 남은 상처가 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뒤늦게 엄마의 병을 알고 백방으로 찾아다니긴 했지만 말이다.
인회는 처음부터 사랑 없는 결혼을 시작했기에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남편이 바람이 난 후에는 사랑에 대한 그 굶주림은 갈구가 되어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이 관심이나 눈빛만으로도 사랑에 빠져버릴 수 있는 듯했다.

그리고 지민의 엄마 보라에게 사랑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녀와 비슷하게 우경 역시 뚱뚱했던 시절에서 벗어나 멋진 몸매를 유지하는 자신의 존재를 타인의 시선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게 사랑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우경의 사랑은 등장한 캐릭터들의 사랑과는 다르게 품지 않고 내치며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어딘가 망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수영장과 그 수영장의 골수 회원들, 그리고 조우경의 관계까지 얽히고설켜 나중엔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로 나아갔다. 사랑에 미친 사람들이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놀랍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졌고, 나중엔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소설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사랑에 미쳐버린 자들이 한데 모여 나아가는 결말은 뭔가 그들 답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대책 없는 그들이 그 순간의 행복을 만끽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느껴졌다.

그야말로 미친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 놀라웠다.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로 인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게 죄가 될 순 없으니 그들 나름의 사랑을 이해하기로 했다.



​​​​​​​

누군가가 나를 위해 죽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여준다면 어떨까. 나는 바로 사랑에 빠지고 말 텐데. - P157

​인회는 자신의 삶이 늘 그런 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이 없어서 버려진 자루를 뒤집어쓰기에 급급한 삶. 한번 옷을 잃고 나면 자신에게 맞는 옷을 되찾기가 쉽지 않아서 포대 따위에 연연하게 된다. 그저 배가 고픈 사람이 된다. 검은 산을 헤매는 사람이 된다. 사랑에, 아니 사랑의 진위에 왜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랑을 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그렇게 아무 포대나 걸치지 않아도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74

지민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마음을 열면서도 반쯤은 닫았다. 다가가면서도 도망칠 궁리를 했다. 그래서, 그렇게 사귀었던 사람들을 좋아했냐고 묻는다면, 그때는 그랬던 것 같은데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좀처럼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마음을 채울 수도 없었다. - P88

그녀는 늘 확인받고 싶어 했다. 아직 예쁘고, 사람들이 뭔가를 쥐여주고 싶어 할 만큼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싶어 했다. - P52

애정 관계라는 것은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면 할수록 장벽이 올라가고 포가 날아오는, 사람을 고독한 전시 상태로 몰아넣는 어떤 것으로, 사랑이 그를 외로운 죽음에 이르게 하리라는 사실을 조우경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 P1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20년대, 뉴욕.
젊은 나이에 주식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앤드루 베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투자를 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어떤 회사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그 업적을 이뤄내 더욱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로 인해 앤드루와 친분을 쌓아 투자 조언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그를 사교계에 초대했지만, 언제나 그는 거절을 했기에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인물이 되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걸 거부하던 앤드루는 밀드레드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앤드루가 투자로 벌어들인 돈을 밀드레드가 문화 전반에 걸쳐 후원을 하게 된 이후 두 사람은 사교계의 귀감이 되었지만, 밀드레드가 정신병을 얻어 스위스로 요양을 간 이후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둘의 결혼생활도 끝이 났다.

앤드루와 밀드레드의 결혼생활과 투자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가 해럴드 배너의 소설과 앤드루의 자서전, 그 자서전의 대필 작가 아이다 파르텐자의 회고록으로 서술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밀드레드의 숨겨진 일기장을 통해 진실이 밝혀진다.



책 내용은 소설 속의 소설로 시작되었다. 해럴드 배너가 쓴 '채권'이라는 책은 투자의 귀재인 벤저민 래스크와 그의 아내 헬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실명과 다른 이름으로 쓴 소설이었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들이 앤드루와 밀드레드를 지칭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소설은 실존 인물들의 실화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물론 실제 인물인 앤드루는 소설 '채권'에 대해 반박하는 입장이었다. 투자의 귀재이지만 사교성이 없는 냉소적인 사람으로 그려진 소설 속 캐릭터인 벤저민과 자신을 다르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아내 밀드레드가 정신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는 부분은 절대적으로 반발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앤드루는 자서전을 통해 사실과 다른 점을 인식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다음 화자인 아이다 파르텐자가 앤드루의 자서전을 대필했다고 밝혔다는 점이다. 노인이 된 아이다가 젊었을 때 앤드루의 투자회사에 취직하게 되는 과정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됐는데, 그녀가 쓴 글을 본 앤드루는 자서전 대필을 맡겼다. 물론 그녀가 하는 일에 관해서는 대외비라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소설은 실제 주인공을 모델로 쓴 소설과 주인공 본인의 자서전, 오랜 시간이 지나 자서전을 대필했다고 밝힌 작가의 회고록이라는 독특한 내용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마지막에 밀드레드의 내밀한 일기가 드러났다. 앞서 모든 이야기가 앤드루의 시선으로 진행됐다면, 오로지 한 개인의 시선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진실한 일기를 통해 여태껏 펼쳐진 이야기를 뒤집는 반전을 선사했다.

사실 소설은 후반부의 반전을 위해 모든 걸 쌓아 올리는 과정이었다. 소설의 두 가지 쟁점은 투자로 성공한 앤드루와 밀드레드와의 결혼생활이었다.
앤드루가 어떻게 돈을 벌게 됐는지에 관한 과정을 통해 그가 천재 투자자임을 일깨웠다. 1929년 10월 24일 주식 시장이 붕괴한 '검은 목요일'에도 수익을 얻어냈을 만큼 그에게는 투자의 재능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그와 친하게 지내고자 했던 사교계의 인사들은 그를 손가락질하는 계기가 됐지만 말이다.
그리고 밀드레드와의 결혼생활은 서로 윈윈하는 계기가 됐음을 이야기했다. 해럴드 배너의 소설에서도, 앤드루의 자서전이나 아이다의 회고록 중반까지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앤드루의 묘한 점을 눈치챈 이후 분위기는 바뀌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다가 밀드레드의 일기를 발견하면서 진실이 드러났다. 이 진실은 앞서 일어난 내용 대부분을 뒤집는 반전이고, 시대를 생각하면 화가 날 만큼 비겁한 행동에 대한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술자의 입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내용이 반복되었다는 게 단점이었다. 거기다 회고록을 쓴 아이다의 파트가 굉장히 길었는데, 앤드루와 관련된 이야기 외에 이민 1세대인 아버지와 연인 잭에 관한 내용을 상당 부분 할애했고 그 부분이 썩 재미있지 않아서 지루하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마지막에서야 밀드레드의 일기를 통해 진실이 밝혀졌기에 크게 놀랍지도, 와닿지도 않았다.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고, 여러 유명 인사들의 추천사가 있어서 기대했으나 그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소설이었다. 거의 일주일 동안 붙잡고 있던 소설인데 만족을 주지 못해서 아쉽기만 하다.


​​​​​​​

by. 해럴드 배너 장편소설 ‘채권‘
벤저민이 재산을 불려가는 속도와 헬렌이 그 재산을 나눠주는 현명함은 둘의 긴밀한 유대가 공개적으로 표현된 결과로 여겨졌다. 여기에 둘의 신비주의까지 더해지자, 부부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경멸하는 뉴욕 사교계의 신비로운 생물이 되었다. 둘의 엄청난 위상은 둘이 보이는 무관심 때문에 더욱 높아져만 갔다. 하지만 그들의 가정생활은 화목한 부부라는 이미지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았다. - P84.85

by. 앤드루 베벨 자서전 ‘나의 인생‘
그녀는 이 세상에 어울리기에는 너무도 약하고 너무도 착한 사람이었고, 너무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내가 그녀를 얼마나 깊이 그리워하는지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내가 살면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그녀의 곁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그녀가 나를 구원했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녀는 인간성과 온기로 나를 구원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친절함으로 나를 구원했다. 나에게 가정을 만들어줌으로써 나를 구원했다. - P184

by. 밀드레드 베벨 일기 ‘선물‘
돌이켜보면, 사업적으로 협력하던 시기를 제외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다. 우린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 P464.4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까지 가자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론제과에 다니고 있는 정다해는 공채 사원이 아니라 비공채로 입사하게 된 특이한 케이스이다. 회사 내에서 이도 저도 아닌 입장이라 애매했지만, 마침 같은 시기에 비공채로 입사한 은상 언니, 지송이와 친해진 덕분에 힘든 회사도 묵묵히 다닐 수 있다.
그녀는 아직 학자금 대출이 남았고, 월세 원룸에서 생활하며 월급날 직전에는 텅 빈 통장 잔고로 인해 허덕이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고향 아산에서 마을버스를 운전하는 엄마는 노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나름 알아주는 제과 회사지만 월급은 생각보다 짜서 허무하지만, 그래도 매달 월급이 나오는 회사에 다니는 게 어디냐는 생각이 든다. 다해와 마찬가지로 은상 언니와 지송이의 처지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던 중, 평소에도 돈을 좋아하는 티를 팍팍 냈었던 은상 언니가 볼 때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뭔가 이상했다. 알고 보니 언니는 코인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집을 옮겨야 하는 처지에 있던 다해가 언니의 꼬드김에 넘어가 이더리움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듯한 흙수저 여자 셋의 회사 생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어느 정도는 그게 맞긴 했다. 함께 외근을 나갈 때마다 사고를 일으키는 팀장이라든지, 월급이 짜디짠 회사라든지, 점심시간의 짧은 행복 같은 것들이 앞부분을 장식했다.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야기라 꾸며낸 소설임에도 진짜처럼 와닿았다. 그래서인지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료와 몰래 상사 욕을 하는 것처럼 키득키득 웃으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해, 은상, 지송이의 사생활에 관한 부분이 드러나면서 짠한 마음과 일정 부분 공감대를 또다시 형성했다. 버는 족족 나가는 월세와 생활비, 거기에 월급날이 다가오면 통장이 아니라 텅장이 되는 현실은 내 과거의 어떤 시기를 떠오르게 했다. 남들은 다 잘 사는 것 같고, 여유롭게만 보이는데 왜 나만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는지 자괴감이 드는 현실마저 소설 속 세 인물들과 닮아 있었다. 어마어마한 부자가 못 되는 건 진작 알고 있으니 조금은 여유롭게, 적어도 매일 돈 걱정을 하면서 살진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해와 은상, 지송은 그렇게 한줄기의 햇살도 비치지 않는 삶이 계속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소설 속 표현을 인용하자면 어떤 포털이 열렸다. 코인이라는 낯설고도 두려운 포털이었다. 은상이 먼저 이더리움에 탑승해 한창 돈을 모았을 때, 다해가 마침 월세 계약 만기로 집을 보러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은상은 다해를 앞에 앉혀두고 아이패드를 통해 이더리움, 가상화폐 등등을 이야기했고, 나중엔 대출금을 그 자리에서 전부 상환하는 걸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하는데 귀가 팔랑거리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 그래야 소설이 진행될 테고, 재미가 더해지니 말이다.
반면에 나였더라면 아무리 그래도 안 넘어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간이 작아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투자를 한다는 게 좀처럼 신뢰가 가질 않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변액 보험에 가입했다가 본전도 못 찾은 경험이 있어서 이후로는 돈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렇게 다해까지 이더리움에 탑승해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세 사람 중 막내인 지송이는 끝까지 안 하겠다고 버팅겼다. 언니들과 함께 있는 단톡방에서 코인 얘기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지송이 역시 앞날이 캄캄하기는 마찬가지라 결국 코인 열차에 탑승한다.
회사에서 직급조차 없는 여자 셋의 코인 열차 탑승 이야기는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주변 사람들 몇몇이 코인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소설임에도 몰입하게 됐고, 금액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마치 내가 코인을 하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더 오를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면 지금 팔아야 할까 하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다른 사람이 코인을 하는 이야기가 이런 즐거움을 줄 줄은 몰랐다. 과연 그들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는데, 다행히 평범한 직장인들에겐 판타지와 같은 결말로 끝이 나 대리만족을 주었다. 내가 코인으로 돈을 번 건 아니지만 우리의 주인공들이 이렇게라도 대신 벌어서 기쁘기까지 했다.

코인에 대해 하나도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던 소설이었다. 추리 소설이 아닌데도 긴장하며 읽기는 오랜만인 것 같다.



​​​​​​​

한 푼 두 푼 모은 전 재산을 가상화폐에 걸어두고 퇴사를 꿈꾸며 점쟁이에게 미래를 물어보려는 내 인생…… 대체 실체가 있는 게 하나도 없잖아? 스스로가 너무 황당해서 쓴웃음이 났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 P129

그냥, 인생 자체가 그랬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해가 지날수록, 한 살 더 먹을수록 늘 전보다는 조금 나았고 또 동시에 조금 별로였다. 마치 서투른 박음질 같았다. 전진과 뒷걸음질을 반복했지만 그나마 앞으로 나아갈 땐 한 땀, 뒤로 돌아갈 땐 번 땀 이어서 그래도 제자리걸음만은 아닌 그런 느낌으로. 그렇게 아주 조금씩…… 천천히…… 서서히…… 차츰차츰…… 매일매일…… 하루하루…… 그뿐이었다. 대체 무엇을 감히 더 바랄 수 있을까? - P98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러니까 몇천만 원 가량의 숫자가 내 휴대폰에 찍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이지 언니의 표현대로라면 ‘약간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가상 지갑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게 내 은행 잔고처럼 여겨졌으니까. - P1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드뷔시 전주곡 - 휠체어 탐정의 사건 파일, <안녕, 드뷔시> 외전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휠체어 탐정의 모험 가스모리 겐지는 자신이 짓고 있던 집에서 살해된 채 발견됐다. 열쇠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창문뿐만 아니라 누군가 들어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기에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고즈키 겐타로는 자신의 땅에서 벌어진 사건이기에 당연히 관심을 가진다. 겐타로의 요양보호사인 쓰즈키 미치코가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휠체어 탐정의 생환 새해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겐타로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지만, 후유증이 남아 하반신 마비 증세가 남았고 말하는 것도 어눌해졌다. 요양보호사 미치코는 이때부터 겐타로를 담당하게 된다. 재활요양센터에서 겐타로가 잘하고 또 좋아하는 모형 전함 만들기로 재활을 하던 중에 그와 비슷하게 오른쪽이 마비되어 재활에 참여하고 있는 노인 소헤이를 만난다.

휠체어 탐정의 추격
마을에 사는 노인들을 노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뒤에서 따라가다 슬쩍 위협하면 산책하던 노인들이 놀라 쓰러져 가벼운 타박상이나 찰과상 등을 입는 사건이었다. 얼마 전에 새 휠체어를 산 겐타로는 이번엔 자신이 미끼가 되어 범인을 잡고자 한다.
휠체어 탐정과 네 개의 서명
돈을 인출하기 위해 은행을 찾은 겐타로와 미치코는 10대로 추정되는 은행강도 네 명의 습격을 받아 그곳에 있던 은행원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인질로 잡혔다. 미치코는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겐타로는 은행강도의 인질이 된 게 재미있는 듯하다.
휠체어 탐정의 마지막 인사
오랜 세월 원수처럼 지내던 친구가 집에서 청산가리에 의해 독살됐다는 소식을 들은 겐타로는 미치코와 함께 그 집을 방문한다. 음악에 취미가 있어 레코드판을 수집하던 친구가 음악을 듣다가 독살되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래서 겐타로는 최근 세입자로 입주한 음대 강사 미사키 요스케에게 도움을 청한다.




<안녕, 드뷔시>에서 짧은 출연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겐타로 할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외전이다. 겐타로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이야기, 자신의 땅에서 일어난 밀실 살인 사건, 은행강도에게 인질로 잡히고 친구의 죽음을 해결하는 등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의 1편에서도 느꼈었지만, 겐타로는 정말이지 자기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해야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속에 담아두지 못하는 스타일인데, 워낙 나이도 많고 일단은 사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그의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은 어쩔 수 없이 주눅이 들고 만다. 겐타로가 자기 고집만 부리는 사람이었다면 미운 할아버지 캐릭터가 되었겠지만, 그는 옳은 말만 했다. 옳은 말로 상대의 폐부를 찌르곤 해서 당해낼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겐타로의 전담 요양보호사가 된 미치코는 그와 가까워진 이후에 은근히 말리면서도 나중엔 놀리는 등의 모습을 보여 재미있는 콤비가 되어주었다.

단편이라 가볍게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인데, 각각의 사건들은 사회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기도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노인 요양 보호 문제나 사회적인 시스템 같은 부분이 있었고, 마지막에 등장한 이야기에서는 시리즈의 주인공 미사키 요스케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 조명했다.
장편도 재미있지만 단편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겐타로 할아버지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건 아쉽지만 말이다.



​​​​​​​

"탐정 흉내라도 낼 생각이세요?"
"안락의자 탐정이라는 것이 있다지. 현장에는 한 걸음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그렇지, 휠체어 탐정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군." - P47.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스트 원티드 맨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6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함부르크 기차역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지명수배가 내려진 남자가 나타난다. 고문당한 흔적이 역력한 삐쩍 마른 남자 이사는 터키 출신의 젊은이 멜릭을 따라다닌다. 권투선수인 멜릭은 그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을 알아채지만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자신과 어머니 레일라가 사는 집에 나타났을 때에는 황당했지만, 이슬람 청년인 이사를 가엽게 여긴 어머니의 뜻대로 그가 집안에 들어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변호사 아나벨 리히터가 이사를 찾아와 그가 이 나라에 온 이유를 듣고 도움을 주려고 한다. 이사의 목적을 위해 아나벨이 찾은 사람은 '브뤼 프레르 개인은행'의 행장인 토미 브뤼였다.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은행을 관리하던 토미는 아나벨을 만난 이후 '리피잰더' 계좌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한편, 헌법수호부의 해외자산국 소속 귄터 바흐만은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진 해커 팀원을 통해 이사가 함부르크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여러 나라에서 수배가 내려졌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그의 행적을 쫓기 시작하면서 아나벨과 접촉한다.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수감되어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9·11 이후 세계 여러 나라를 위협에 빠뜨리는 테러로 인해 의심을 당할 수밖에 없는 남자의 존재로 함부르크의 여러 사람들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사가 독일에 체류하면서 그가 원하는 의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는 변호사 아나벨, 이사의 아버지 그리고리 보리소비치 카르포프 대령이 아들에게 남긴 유산으로 인해 만나게 된 은행장 토미, 그리고 독일 스파이 귄터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소설 중반을 넘어간 이후에는 CIA와 영국정보부 요원 등까지 개입해 이사를 잡기 위해 뛰어들었다.
또한 당사자인 이사 역시 의심하고 또 의심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걸어나갔지만, 한편으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굴기도 했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나 국가적인 시선을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예민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다. 무슬림처럼 보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종교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이사의 존재 자체가 의문투성이였다.

이사가 멜릭과 레일라 모자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 이후 아나벨과 토미가 차례로 등장해 그가 함부르크에 온 이유가 밝혀졌다. 그 이후 국가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으로 각 정부에서 그를 예의 주시하면서 아나벨, 토미와 접선하게 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당사자보다는 주변인들을 설득함으로써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각 캐릭터가 추구하는 가치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아나벨은 인권 변호사이기에 그 무엇보다 이사의 안위를 우선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이전처럼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에 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설령 자신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련한 청년을 걱정했다. 아나벨과는 다르게 토미는 타인보다는 자신이 우선이긴 했다. 자신의 안전이나 물려받은 은행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토미는 순수한 소년 같은 목소리를 가진 아나벨에게 애정을 느끼며 그녀만큼은 무탈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사리사욕만 챙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사를 쫓는 입장인 귄터는 처음엔 호감이 가지 않았던 캐릭터였지만, 나중엔 테러리스트에게 협력한 자를 잡고 싶어 이 상황에 뛰어들었던 것으로 보여 초반과 후반의 이미지가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은 덕분에 결말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지만, 조금 다른 부분으로 인해 소설의 깊이가 느껴졌다. 각 개인이 살아가는 데 두는 가치가 저마다 다른데, 그 다름으로 인해 개인이 부딪히며 괴리가 생겨 원치 않았던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최악인 결과가 다른 이에게는 최고의 성과이기도 하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삶은 언제나 정의롭지만은 않다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 촘촘하게 진행되어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다 읽고 나니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

"놈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자들이 개인적인 죄책감과 집단적인 죄책감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놈들은 ‘당신도 착하고 나도 착하지만 여기 에르나는 전혀 착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착하지 않은 배교자, 신성모독범, 살인자, 간음한 자, 신을 증오하는 자이니 그냥 쳐버리자‘는 식이다. 그런 놈들한테 이 싸움은 서구와 이슬람의 대결이며, 중도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 P86

by. 아나벨
그녀는 자신이 언젠가 어떤 고객 때문에 그동안 마지못해 받아들이기는 했어도 어쨌든 지켜오던 직업적 원칙과 법적인 원칙들을 모두 버리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고, 이사가 바로 그 고객이었다. - P168

by. 토미
이사의 문제는, 그게 정말로 이사의 문제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사의 문제는 어지러운 역사와 관련된 거야. 어지러운 역사라는 게 무엇이든 간에. 우리 둘의 아버지들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어지러운 조각들. 뭐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바로 그 조각들이 우리 둘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어. - P225

by. 귄터
상냥한 미소를 띠며 곁눈질을 해대는 이 사람들 중에 오늘 그의 친구는 누구고, 적은 누구일까? 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암흑단체, 정부부처, 종교단체, 정당을 위해 일하고 있을까? - P3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