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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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와 나쓰코, 일명 낫 짱은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였다. 사에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특히 남자친구 문제에 관해 나쓰코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며 그녀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 두터운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사에와 나쓰코는 서로를 베스트 프렌드라 여기며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올 수 있었다.


현재.

나쓰코는 리리를 키우며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미용 학교에 다니다 다카오를 만나 사귀면서 임신이 되어 그녀는 곧바로 결혼을 해 육아와 집안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오로지 다카오가 벌어오는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었기에 육아를 비롯한 모든 집안일은 전적으로 나쓰코의 몫이었다.

사에는 조산사인 동생 마리에가 일하는 조산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다. 그녀 역시 결혼해 남편 다이시와 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몇 년째 아기를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도통 생기질 않는다. 그러다 사에는 다이시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걸 알게 되고, 비밀이 없는 나쓰코에게 그 사실을 말한다.




나쓰코와 사에는 굉장히 친밀한 친구 사이처럼 보였다. 고등학생 때뿐만 아니라 그 이전인 초등학생 때의 이야기도 나왔던 걸로 봐서 두 사람의 우정은 웬만한 친구들이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듯했다. 그로 인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한 현재까지도 둘의 관계는 돈독했고, 각자의 남편보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각자의 남편과 알게 된 시간보다 사에와 나쓰코가 서로를 알고 지낸 시간이 훨씬 더 길었으니 말이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사에는 아기를 갖고 싶어서 갖은 노력을 하고 있어도 임신이 되지 않는 반면에 나쓰코는 임신으로 결혼에 성공한 케이스라 그녀에게는 쉬워 보였다는 것이다. 그 임신이라는 부분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회생활 경험에 대한 유무도 나뉘고 있었다. 그 점만 아니면 두 사람의 관계는 너무나 좋아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게 있기도 했다.

사에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것까지 나쓰코에게 말했는데, 사회생활의 어려움 같은 건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쓰코는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자신에게 공감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쓰코 또한 사에에게 말하지 않았던 게 있었다. 리리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독박 육아로 인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사에에게는 얼른 아기를 낳아야 한다고 긍정적인 방향의 얘기만 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가까워 보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상대를 향한 부정적인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이 관계가 조금은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러다 바람을 피운 사에의 남편이 죽으면서, 하필이면 나쓰코와 마주 앉아 있을 때 죽게 되면서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그 상황만 놓고 봤을 땐 나쓰코가 사에의 남편을 죽인 걸로 보였다. 눈앞에서 그가 죽어가는데도 나쓰코는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고, 그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뒤에는 사체를 처리할 생각만 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이라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아 소설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당연하게 여겼던 무언가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게 밝혀져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전에 읽은 몇 권의 일본 소설이 떠오르게 하는 그런 반전이 뒤통수를 때렸다.

그렇게 뒤통수를 맞고 난 후에는 놀라움이 차츰 가라앉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처음부터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관계, 가깝지만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관계의 이면에 사랑과 헌신이라는 당연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전 소설이지만 씁쓸함까지 덤으로 안긴 책이었다.

이 아이의 앞길에 행복만 있기를.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 - P325

by. 나쓰코
아이를 낳기만 하면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자기 자신보다 아이를 먼저 챙기고, 그러한 삶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는 존재. 나도 연애나 일을 질릴 만큼 하고서 이제는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어 심사숙고한 끝에 아이를 낳았다면 좀 더 예뻐할 수 있었을까. 분명 그럴 것이라는 확신과, 몇 살을 먹어도 변함없을 것이라는 체념이 동시에 들었다. - P13

by. 사에
농담과 잡담을 섞어가며 걸핏하면 출산을 강조해 온 나쓰코의 말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일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주제에 잘난 척은, 하고 겨우 깔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허무함이 솟구쳤다. - P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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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가족
한요셉 지음, 박지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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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조는 이곳으로 이민을 온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얼마 전까지 오빠 제이컵도 부모님의 음식점 '델리카트슨'을 도우며 함께 살았었지만, 6개월 전 부모님의 고향인 한국으로 가 영어 강사를 하겠다고 떠났다. 결국 델리의 일손을 돕는 건 그레이스의 몫이 되어 그녀는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에 한국의 뉴스를 보게 되었다. DMZ에서 웬 미국계 한국인 남성이 북으로 가려다가 붙잡혔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조 씨 가족의 아들 제이컵이었다.


그레이스와는 다르게 제이컵은 한국어를 잘 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숨기는 성격으로 인해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는 어느 날 문득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한국에는 엄마의 가족인 정 할머니와 정 이모가 있었기에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어 학원에 강사로 일하면서도 여전했던 제이컵은 어느 날 갑자기 죽은 할아버지 혼령을 보기 시작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태우라는 이름을 가진 그 할아버지가 제이컵의 몸 안에 들어와 마음대로 행동하게 된다.




소설은 혼령인 태우의 시점으로 시작되었다. 나이가 많은 그는 교회 주차장의 주차 요원으로 일하다 갑자기 쓰러져서 깨어났는데, 몸과 분리된 것을 보고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는 건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테지만, 죽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향인 북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태우는 북으로 가기 위해 전망대에 올랐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태우가 북쪽으로 가는 걸 막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실향민 혼령들을 모아 벽을 뛰어넘기 위해 수백 명의 목말을 태워 보았지만 넘을 수가 없었다.


이후 그레이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환되었다. 그녀의 가족은 외국인의 입맛에 맞는 한식을 파는 델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조 할아버지가 가게를 시작했고, 아빠가 물려받아 자식들인 그레이스와 제이컵이 돕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점은 부모와 제이컵은 한국에서 태어나 이민을 왔지만, 그레이스는 하와이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현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는데 그녀는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거기다 델리 일에 지쳐가고 있었던 상황에 오빠마저 떠나버려서 가족과 가족의 일이 모두 그녀의 어깨 위에 놓였다. 가족이 분명 하와이에 사는 주민이었지만 한국인의 특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레이스의 고충이 피부로 와닿았다.


한편 한국에 있던 제이컵은 할아버지인 태우의 혼령을 보게 된 이후 그에게 몸을 내어주게 된다. 계속해서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히게 두기보다는 원하는 게 있으면 몸에 들어와 빨리 해치우고 떠나라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게 북으로 가는 것일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할아버지 태우의 행동이 너무 민폐라 불쾌하기까지 했다. 북에서 결혼 후 가족을 남겨두고 남으로 와서 정 할머니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고, 그런 가족을 다시 버리고 나가 세상을 떠난 태우였다. 그래놓고 손자의 몸을 빌려 북으로 가려고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 기준에서 고향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인지 태우의 행동이 이기적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 결과 DMZ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붙잡혀 오랫동안 취조 비슷한 걸 당해야 했던 제이컵의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보상해 주지도 못할 할아버지로 인해 화가 나기도 했다.

다행히 제이컵은 한국으로 돌아와 가족의 품에서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가족들 역시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결말을 맺어 다행이었다.

실향민인 태우 할아버지, 언제까지나 이방인 취급을 받는 조 씨 가족들 사이에는 확실한 연결고리가 있긴 했다. 고향을 떠나왔다는 점, 쉽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 그랬다. 태우는 죽어서도 고향에 갈 수 없었기에 그리워했으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게는 고향이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아니기에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번이나 가족을 버린 이가 고향만큼은 그리워했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여겨졌다. 결국 내가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건 그레이스였다. 해외에 거주하지만 영락없이 한국인 가정의 딸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그녀의 스트레스가 와닿았다.

서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가족이 마지막엔 함께 웃어서 다행이었다.

"우리들 중에는 미련을 버리고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할머니가 제이컵에게 말했다. "절대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하지만 시간이 끌고 가기 때문에 나아가는 거야." - P274

문제는 태우가 남쪽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산 자들의 정치와 죽은 자들의 법에 따르면, 그는 북쪽에서 죽을 수 없었고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 P21.22

나를 관광객으로 오해하지 말아요. 난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인이니까. 난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에요. - P324

그레이스는 이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그들이 음식을 함께 먹고 아파트 벽에 바싹 붙어서 전자 담배를 나눠 피우고 웃음소리가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동안 계속되었다. 그들은 평소 조용했던 가족이 만들어낸 갑작스러운 소음에 마음이 활짝 열렸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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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
박연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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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 다니는 여름이는 피아노 학원을 하는 고모네 집에서 지냈다. 아빠는 가끔씩만 고모네 집에 들어왔고 엄마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서 여름이의 교육은 고모의 몫이었는데, 고모는 예의 바른 걸 중시하는 사람이라 여름이는 늘 꾸중을 들으며 혼이 나야 했다. 그리고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고모로 인해 여름이는 동시를 베껴 쓰거나 책을 읽는 등 조용히 지내야 했다. 고모에게 혼이 날 때면 사촌 언니인 겨울이가 편이 되어주어 다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함께 살 단칸방을 구했다고 하며 여름이를 데리고 갔다. 새엄마도 함께 살았는데, 새엄마는 여름이를 몹시 미워하며 타박했지만 여름이는 그럴수록 더욱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였다.

겨울이 언니도 없이, 그리고 사랑하는 할머니도 미국으로 떠난 이후 곁에 아무도 없던 여름이에게 루비가 나타났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자신을 꼬집는 걸 가만히 참고 있던 여름이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나서준 친구였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를 것 같지만 다 알고 있었다. 오히려 더 잘 아는 경우가 있다. 여름이처럼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온 아이는 더욱 그랬다. 고모가 통화하는 내용으로 아빠가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고 때려치우고선 현재는 여러 여자들이나 만나고 다니는 걸 알았고, 나중엔 루비의 엄마가 동네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알았다고 해도 어딘가에다 말하지는 않았기에 어른스럽게만 보였다. 그 어른스러움은 어린아이가 살면서 터득한 삶의 방식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어른스러운 여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루비와 우연찮게 가까워졌다. 루비는 여름이와는 다르게 친구가 별로 없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서 그랬다. 남자애들은 루비의 집을 알아내기 위해 따라다니며 뒤에서 놀려대기도 했지만 루비는 그런 걸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친구가 없어도, 아이들이 놀려대도 자존감이 높아서 그런 듯했다.

반면에 여름이는 학교 안에서 루비와 말을 섞지 않았다. 하교 후에는 루비네 집에 자주 놀러 갔음에도 학교 안에서, 혹은 거리에 다른 아이들이 있을 때면 루비를 외면했다.




아무래도 여름이는 어렸을 때부터 온전히 편이 되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없었고 아빠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할머니는 여름이를 너무나 사랑했는데, 때때로 할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해 넋이 나가 있을 때가 있었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겨울이 언니도 여름이를 아끼고 챙겨줬지만 고모에게 혼날 때는 똑같은 처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사랑받지 못해서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도 어려웠던 여름이가 안쓰러웠다. 루비를 친구로서 사랑하지만 몇 년에 걸쳐 가까워지고 나니 나중엔 다른 태도를 보여 결국 친구를 잃고 말았으니 말이다. 물론 루비는 엄마를 따라 떠난 거지만 관계는 그 이전에 한 번 끊겼기에 여름이가 애처롭게 여겨졌다.


어른스러운 아이가 주인공이라 읽는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속이 깊어진 게 환경의 영향이 커서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이 생이 주는 가혹함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 십 년도 채 안 살았는데 삶이 바닥을 보여주다니. 단맛, 짠맛, 신맛 따위는 있으나 마나. 내겐 씁쓸함과 아린 맛, 혹은 무미, 그런 게 다였다. - P109

나는 깜빡인다, 세상에서, 아주 작은 점처럼 깜빡이며 존재한다. 늘 존재할 수는 없다. 욕심쟁이들만 늘 존재한다. 나는 존재하는 것을 깜빡 잊는다. 잊는다는 것을 또 잊는다. 자주 울고, 웃는 걸 잊었다고 생각할 때만, 잠깐 웃는다. 사람들은 나를 고장 난 신호등을 보듯 바라본다. - P19.20

나는 친구가 많았고 루비는 나 말고는 친구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비밀 속에서만 친했다. 너무 오랫동안 루비는 내 삶의 내벽을 이루며 커졌다. 밖에서 루비는 늘 혼자이고 침울하고 두려움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걸 모른 척, 보이지 않는 척했다. - P192

어둠 속에서, 내가 홀로 언덕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뒷문에 서 있던 루비가 엎드린 내 언덕을 바라보다 천천히, 자기 언덕으로 돌아가는 풍경이 보였다. 나는 혼자였다. 이제 루비가 없는 이 언덕을 내려가야 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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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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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6년 뉴욕.

'나'는 법을 이용해 소유권을 양도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대고모의 집을 불법 전대해 지내며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예 창작 워크숍을 듣고 있다. 학비와 집세, 생활비 등은 이혼 후에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아버지가 대신 내주고 있다. 덕분에 나는 물가가 미친 듯이 비싼 뉴욕에서 돈 걱정 없이 지내고 있다.


그렇게 소설가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던 나는 합평 수업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비평을 듣는데,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빌리만이 내가 쓴 소설을 지지해 주었다. 빌리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나 역시 그의 소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교열을 봐주었다.

내 소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서 시작된 빌리를 향한 호감은 이내 그의 문학적 재능으로 이어졌다. 빌리가 술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곳 창고에서 지내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빈 방에 들어와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처음부터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소설 속 화자는 24살의 젊은 남자였다. 소설가를 꿈꾸며 워크숍 프로그램에 등록한 그는 처음엔 그저 집 때문에 혼자라고 생각했다. 맨해튼의 무슨 법으로 인해 불법 전대해 살고 있다는 걸 관계당국에 들키면 집에서 쫓겨날뿐더러 벌금까지 맞아야 했으니 미국에서 흔히 여는 파티는 물론이고 집에 누구도 데려오지 못했으니 말이다. 조심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그런데 빌리와 가까워지면서 그런 법적인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여겨졌나 보다. 재능 있는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물가가 비싼 뉴욕에서의 생활을 견디고 있는 걸 안타까워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글을 써야 했던 빌리의 재능을 화자는 알아본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에게 아파트에서 룸메이트로 함께 지내는 걸 제안했을 터였다.


빌리는 본인 말대로 촌구석 출신이었는데,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다들 비웃을 동네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뉴욕으로 왔지만 엄청난 물가로 인해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화자처럼 뉴욕의 비싼 아파트를 빌려줄 대고모가 없었고, 학비와 생활비 등의 비용을 전부 대줄 아버지도 없었다. 빌리는 혈혈단신으로 이 모든 걸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그때 화자가 내밀어 준 룸메이트 제안은 굉장히 솔깃한 것이었을 게 분명했다. 지출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당연히 도움이 되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집세에 대한 파격적인 제안이었으니 말이다. 화자가 그저 청소만 해주고 요리를 못하는 자신 대신 음식을 만들어 주는 걸로 생활비와 집세는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빌리는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 어떻게든 화자에게 보답을 하려고 했다.


처음에 두 사람의 관계는 너무나 이상적이었다. 화자가 말했던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처럼 서로에게 문학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도움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생활면에서도 건강한 친구 사이로 수업 시간은 물론이고 여가시간 또한 함께 즐겁게 보냈다.

그런데 사실은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한쪽으로 극명하게 기울어져 있다고 보였다. 자신의 것이 아니지만 일단은 주인이나 다름없는 화자가 빌리보다 권력의 우위에 있었다. 화자가 가진 것에 대한 힘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도 빌리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는 한편으로 화자가 빌리의 남성성에 묘한 시선을 던지던 장면이 종종 등장했던 걸로 봐서 그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은 내가 오해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결말의 암시로 보아 오해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 부분을 빌리도 눈치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중반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사건이 하나 일어나면서 화자에게 기울어져 있던 권력은 빌리에게로 옮겨갔다. 화자가 갖고 있던 것처럼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친구 사이이긴 해도 그 관계에 목을 매는 자가 약자가 되는 권력이었다. 여태껏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없는 듯했던 화자가 매달리는 꼴이 된 건 당연했다. 그리고 이 관계가 완전히 소원해지기 직전에 일어난 집과 관련된 사건으로 끝내 파국이 찾아왔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관계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되새기고 곱씹었을 만큼 화자에게는 아쉬운 나날들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동시에 현재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화자가 변하지 않은 걸 보며 그는 여전히 많은 것을 놓치며 자기만의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순전히 화자의 입장에서만 진행된 소설이라 그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빌리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던 걸 보면 이 미묘한 관계를 한쪽의 말만 듣고도 이해하게끔 잘 표현했다고 본다.

그때까지, 나는 거의 모든 사람이 내면에 일정량의 외로움을 품고 살고, 그건 그냥 평생 동안 하나의 육체와 정신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인간의 조건이며, 그러니 내가 느끼는 어떤 고립감이든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거라고 여겨왔다.
(……중략)
내 고립감에 남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고 독특하고 괴상하다는, 외로움 중에서도 외로운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03.104

전에는 그저 그의 동료 수강생이 되어 서서히 영향을 받으며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지만, 이제는 이것이 대학원 생활이 내게 선사하길 바랐던 친밀하면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예술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내가 늘 생각해온,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처럼 상호보완적인 한 쌍의 관계로 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 P48

"나한테서 뭔가가 빠져 있다고?"

"아니면 너의 어떤 부분이 네 소설에서는 빠져 있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빌리가 말했다. "네 글에는 네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가 항상 드러나지는 않잖아. 그리고 모두들 얘기하는 건 네가 집어넣은 다른 요소들이, 반전이나 암시나 뭐 그런 것들 말이야, 약간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는 느낌이라는 거야." - P222

그는 어떤 승부에서든 이겼다. 글쓰기, 여자, 친구 모두 다. 빌리가 혜택받지 못한 환경 출신일지는 몰라도, 그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이유로든 그가 그 환경을 극복하도록 돕고 싶어했고, 겉으로는 정부의 무료 지원에 반대하면서도 그는 그들이, 혹은 내가 후하게 베푸는 것들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일은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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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5 - 완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5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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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일으키려는 친구들에게 동참한 마리우스는 경찰과 대치 상태에 있다. 그런 와중에 자베르는 혁명 일당들에게 붙잡혀 자신의 앞날을 알 수 없게 되었고, 마리우스가 코제트에게 보낸 편지를 받아든 장 발장은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와 그들의 편에 섰다. 그리고 어린 가브로슈는 공격을 받고서 누나 에포닌을 따라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경찰들에게 공격을 받은 마리우스의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마리우스 역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장 발장이 죽어가는 그를 데리고 지하 하수도로 향했다.




드디어 기나긴 이야기의 끝에 다다랐다. 코제트가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를 떠날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마리우스는 좌절한 나머지 혁명을 일으키려는 친구들의 편에 섰다. 그러면서도 코제트가 걱정할까 봐 그녀에게 마지막을 암시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 편지는 장 발장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전까지 마리우스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긴 장 발장이었으나 무슨 영문인지 그는 바리케이드 안에 들어가 그들의 편에 섰다. 장 발장은 그들에게서 건네받은 총을 들고 있긴 했으나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러다 마침 그곳에 붙잡혀 있던 자베르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 뒤에 거짓으로 총을 쏜 뒤 풀어주었다. 끈질기게 자신을 추적하며 법의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경찰을 풀어줌으로써 용서를 건넨 것이었다.

이후 마리우스가 숨이 끊어지려 할 때에 장 발장은 그를 데리고 바리케이드를 탈출해 지하도로 내려갔다. 오물이 들어찬 공간에서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건 개의치 않고 마리우스를 어떻게든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한 장 발장의 희생정신이 눈물겨웠다. 그의 숨이 아직은 붙어있는 동안 제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 하수도에서 장 발장은 테나르디에를 마주하게 됐고, 하수도를 빠져나온 직후에는 끈질긴 자베르와도 대면하게 되었다. 장 발장의 부탁으로 마리우스를 할아버지 질노르망의 집에 데려다주었고, 이후 마지막으로 코제트를 보려고 하는 청 역시 자베르는 들어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베르는 장 발장이 코제트를 보러 들어갔을 때 홀연히 사라져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부분이 가장 의외였던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자베르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살아온 인생이 부정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장 발장을 쫓는 자베르가 없어졌고 죽을 줄만 알았던 마리우스는 노인 질노르망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에 회복되었다. 그로 인해 결혼 허락까지 받게 되어 코제트와 행복해질 날만 남았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지 못했던 장 발장의 고백으로 인해 마리우스는 그를 멀리하게 되었고, 아내가 된 코제트 또한 아버지 장 발장의 갑작스러운 냉대로 인해 서서히 멀어졌다. 그로 인해 장 발장이 마음의 병이 커져만 가서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던 찰나 기회주의자 테나르디에 덕분에 마리우스는 모든 진실을 알고 코제트와 함께 용서를 빌러 간다. 덕분에 장 발장은 사랑하는 코제트의 곁에서 마음의 짐을 덜어버리고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기나긴 소설을 읽고 나니 장 발장이 너무나 가엽고 안타까운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카들을 먹이기 위해 빵 하나를 훔치고 탈옥 시도를 하다 19년이나 감옥살이를 했고, 세상으로 나온 뒤에는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다. 그러다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을 땐 자신보다는 다른 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며 이후엔 코제트를 위한 인생의 길을 걸었다. 이런 와중에 자베르는 계속해서 장 발장을 쫓았으니 그는 평생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었던 게 당연했다. 마지막엔 코제트를 결혼시킨 이후에도 가슴 앓이를 하다 극적으로 슬픔을 떨쳐내고 세상을 떠나 애처로웠다. 회개한 이후에는 온전히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으니 장 발장은 성인이 맞았다.


긴 소설을 드디어 끝내서 후련하기도 하고 결말로 인해 헛헛한 마음도 든다.

"옛날에는 살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쳤는데, 오늘은 살기 위해 이름 하나를 훔치고 싶지 않소." - P381

"내가 이 아이를 결혼시킨 날, 일은 다 끝났소. 나는 그녀가 행복한 것을 보았고,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고, 거기에 착한 노인 한 분이 계시고, 두 천사들의 부부가 있고, 그 집에 온갖 기쁨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다 잘 된 것을 보았으며, 나는 생각했소. ‘너는 들어가지 마라.‘라고." - P375

"그녀의 행복, 그것은 내 인생의 목적이었다. 이제 하느님은 나에게 퇴출을 허락하셔도 좋다. 코제트, 너는 행복하다. 내 시대는 끝났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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