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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평점 :
흰 밤과 푸른 달 반은 염소, 반은 악마인 외계 생명체 '크람푸스'가 지구를 침공해 사람들은 늑대 유전자를 주입한 인간을 만들어 내 그들과 싸우게 했다. 그렇게 4년 2개월의 전쟁이 끝난 후 인간을 위해 싸웠던 존재들은 골칫거리가 된다. 이후 인간들은 늑대 인간을 훈련이라는 명분으로 시설에 가둬둔다.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명월을 보기 위해 강설은 시설을 찾아간다.
바키타 배아통을 실은 우주선이 지구에 불시착했다. 우주비행사는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바키타를 보게 된다. 오래전 바키타가 지구에 왔을 때 그들은 침략이 목적이 아닌 인공화합물을 먹는 게 목적이었기에 인간들은 그들과 함께 공존했다. 그러다 바키타가 어느 순간 이후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을 먹어 치우면서 그곳을 떠나게 된 과정이 떠올랐다.
푸른 점 지구와 닮은 행성을 찾아 떠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우주로 나간 '사투르호'의 함장 시에라는 다른 대원들보다 조금 일찍 냉동 수면에서 깨어났다. 엄마가 그토록 사랑했던 푸른 점 지구를 잠시 동안이나마 혼자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선체 외부에 가벼운 충격이 가해져 우주선의 인공지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에라가 직접 수리를 하기 위해 우주로 나갔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야 만다.
옥수수밭과 형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천재 자폐증 소년 푸코는 형이 너무나도 좋고, 학교에 갔다가 집에 일찍 돌아와 형과 함께 옥수수밭에서 하는 소풍도 즐겁기만 하다. 그렇게 사랑하는 형이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푸코는 형이 없다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슬펐는데, 이틀 후에 옥수수밭에서 형을 다시 만나게 됐다. 발목에 숫자 9가 새겨진 형은 푸코가 알던 바로 그 형이었다.
제, 재 해리성 인격 장애가 있는 천재 재는 또 다른 인격인 제와 한 몸을 쓰고 있다. 두 인격은 잠을 잠으로써 교대로 다른 인격이 깨어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천재인 재는 과학의 발전을 위해 수면제를 먹으면서까지 해야 할 일을 해놓고 잠에 들었고, 재와는 달리 제는 만화를 그리는 걸 좋아할 뿐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뜬 제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다.
이름 없는 몸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사람이 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나'는 그곳에서 도망쳐 도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고 장례를 마친 후에 도망쳤던 집으로 향했다.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던 노인들이 득시글거리던 그 마을이 왠지 모르게 스산하고 조용했다.
-에게 '나'는 이름을 잊어서 저승차사가 부르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해 성불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 그러다 광화문에서 잊지 않겠다며 이름을 구호처럼 외치는 많은 여성들을 마주하게 된다.
우주를 날아가는 새 이제 지구는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곳을 떠나고 있다. 절에서 동자승으로 자란 효원은 동생들을 먼저 수송선에 태워 보내고 떠나지 않겠다고 한 효종 스님의 곁을 지킨다.
두 세계 유라는 소설을 현실처럼 즐길 수 있는 '노랜드'에서 판매되는 책 <아락스>에 오류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인공 아락스가 원래의 결말과는 다르게 목을 매 자살을 한 결말이었다는 것이다. 유라는 관리자로 그 책에 접속하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고 나중엔 시스템 전체가 비어버린 걸 알게 된다. 유라는 최근에 <아락스>를 구매한 독자를 찾다가 35번이나 완독한 신규영을 만난다.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지구를 침략한 외계 생명체와의 전쟁에 참전한 군인 이인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유일하게 가까웠던 미군 친구 벤을 마지막으로 추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를 타고 달리던 도중 이인은 사고가 나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열 편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집은 SF 장르가 두드러졌는데, 차갑게만 느껴지는 SF가 아니라 천선란 작가의 따스함이 듬뿍 담긴 SF가 몇 편 있어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흰 밤과 푸른 달>, <푸른 점>, <우주를 날아가는 새>가 유독 감성적인 느낌을 풍겼다.
<흰 밤과 푸른 달>은 지구를 침략하러 나타난 외계 생명체에 대항하기 위해 유전자 변이 시술을 받은 이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언제든 떠날 것처럼 느껴졌던 명월이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우주 밖으로까지 나가게 되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러 온 강설은 하고 싶었던 말을 나쁘게 들리도록 하고서 돌아섰지만, 속내는 그게 아니라는 걸 다시 말해줘야 했다. 그래서 다시 찾아가 한 말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푸른 점>은 엄마의 기억이 생생한 시에라가 새로운 지구를 찾아 나서는 내용이었는데, 이 이야기의 끝부분에는 큰 반전이 있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엄마가 사랑했던 푸른 점을 똑같은 마음으로 여긴 시에라에게 그 사실은 절망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른 대원들을 위해 엄마가 남긴 유언과도 같은 선택을 한 게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졌다.
<우주를 날아가는 새> 역시 <푸른 점>과 같이 지구를 떠나는 이야기였는데, 전자와는 다르게 남겨진 이의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더욱 쓸쓸함이 느껴졌다. 회상과 현재의 시점을 오갔던 이야기의 마지막은 그런 상황임에도 남은 이를 신경 쓰던 효종 스님의 걱정이 애틋하게 다가와 눈물이 나기도 했다.
감성적인 이야기만 담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에서 때때로 환기가 되었다.
<옥수수밭과 형>은 마지막에 너무 소름이 돋아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제, 재>는 해리성 인격 장애를 가진 자의 이야기였는데, 한쪽 인격에게만 치우친 두뇌로 인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밝혀져 큰 충격을 안겼다. 그리고 <이름 없는 몸>은 주인공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늙은 노인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을 하고서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는 눈빛을 상상하니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다. 이후 마을로 다시 돌아갔을 때 옆집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뜯어먹고 있었다는 장면 역시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이 세계보다는 다른 세계에 살고 싶어 했던 유라의 쌍둥이 유진과 소설 속 아락스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천선란 작가의 책은 장편이든 단편이든 모두 다 내 마음을 사로잡고 만다. 이 책 역시 너무나 좋았다.
아주 어색한 만남이 될 것이다. 같은 종족의, 같은 나이였던 두 소녀는 70년 후 늑대와 할머니로 만나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강설은 기다릴 만하다고 생각했다. 모래 알갱이보다 작아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쳐다보는 곳 어딘가 명월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면, 영원히 떠난 사람들을 그리워했던 시간에 비해 훨씬 기다릴 만했다. <흰 밤과 푸른 달> - P56
떠나는 것이 아니라 쫓겨나는 중이다. 옷을 갈아입으려는 지구로부터. 격변을 버틸 수 있는 많은 대안을 세웠으나 모든 시뮬레이션이 실패로 끝났다. 판이 뒤집히는 대혼란 속에서 생명체는 하늘에서도, 땅속에서도, 바닷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슬퍼하고 억울해할 것도 없었다. 공룡이 사라졌듯 인간도 사라져야 할 때가 다가왔을 뿐이므로. <푸른 점> - P90
잠을 자지 않으면 깨어 있는 동안 몸을 통제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인격을 바꾸는 방식은 무의식이었다. 잠들지 않으면, 깊이 자지 않으면 한없이 몸을 차지할 수 있었다. <제, 재>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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