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바다로 간다면 - NASA의 과학자, 우주의 심해에서 외계 생명체를 찾다
케빈 피터 핸드 지음, 조은영 옮김 / 해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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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생명체가 살 수 있고 실제 번성하고 있는 행성으로 지구가 유일하다는 믿음은 보편적일 것이다. 우리 태양계에서 지구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 생명체를 찾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꼽으라면 아마 가장 가까운 화성이 유력할 테지만, 1976년 7월 20일과 9월 3일 쌍둥이 화성 착륙선 바이킹이 생명체의 증거를 찾아 화성 표면에 내려앉았을 때 전송한 사진에는 황량한 사막뿐이었다. 가까운 화성도 이러한데 더 멀리 있는 목성과 토성의 얼어붙은 위성들을 유력한 후보군으로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러나 이후 반세기 동안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생명체를 찾던 과학자들에게 급격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났다. 우주의 많은 별 가운데 지구만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갖추었다는 생각은 더 이상 지배적일 수 없게 되었다. 지구처럼 강우 주기가 분명하고, 지표수가 풍부하고, 증발 주기가 있는 온화한 세계의 표면에 사는 우리와 비슷한 환경의 세계를 찾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구 표면의 71%가 물로 덮인 바다 환경에 살고 있었기에 역사적으로 인간은 자신들의 세계가 늘 바다와 함께한다는 잠재의식을 지녀왔다. 실제로 달의 크고 평평한 평원에는 초기 망원경 관찰에 근거한 상상 속 바다뿐 아니라 호수, 만, 늪으로 정의하고 온갖 명칭을 붙여놓았다. 이렇게 지구 이외에도 생명체가 있길 바라는 강렬한 염원을 반영하듯, 고성능 천체 망원경과 진일보한 탐사선 등 우리는 액체 상태의 물을 지닌 행성을 찾아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확보하게 되었다. 지구상의 생명은 바다에서 비롯되었으며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기원이기 때문에, 물이 생명체의 존속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라는 생각은 당연하다. 태양계의 이웃한 내행성들 가운데 지구와 인접하여 유사한 환경을 지녔으리라 짐작했던 두 행성을 보자. 수성은 그저 척박한 바윗덩어리일 뿐이고, 금성과 화성은 먼 과거에 바다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현재는 거의 완전히 메마른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드디어 외계 생명체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태양계 너머 먼 곳을 바라보면서, 인류는 지구의 바다가 유일한 바다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태양계 바깥의 거대한 가스 행성인 목성과 토성 주위를 도는 위성들은 두꺼운 얼음에 덮인 지하 바다를 가지고 있다. 소행성대의 유일한 왜행성인 세레스에는 한때 액체 상태의 물이 있었을 것이고 명왕성이나 그 위성인 카론 역시 지하 바다를 품고 있을 것이다. 토성의 달 타이탄에는 표면에 탄화수소 호수가 있고 그 아래에 물이 많은 바다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눈덩이 지구’ 시나리오처럼, 행성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우리는 지구의 바다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녹색 또는 파란색 구체가 아니라 목성이나 토성의 위성처럼 수억 년 동안 얼음에 덮인 상태였을지도 모른다는 추론도 있다. 그러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생명 활동은 지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에 바다가 태양계 전반에 걸쳐 공통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 이외에도 우리는 지구의 수십 킬로 심해에도 생명체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전에는 열수 분출구 근처에서 이들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머지않아 이들 생태계가 번성하는 조건이 우리가 외계 행성에도 바다가 존재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유사함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지구상의 생명체가 그런 곳에서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지구가 다른 행성의 기후 조건과 매우 다를지 몰라도 만일 바다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해양 세계는 지구의 열수구 환경과 매우 비슷할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드디어 저자 케빈 핸드와 같은 과학자들이 여기서 등장한다. 그는 생명체를 찾는 NASA 제트추진연구소의 우주 임무를 위해 일하는 물리학자이자 엔지니어 그리고 탐험가로, 영화 <에일리언>으로 유명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함께 심해 잠수정을 타고 남극해에서 생명체를 찾기도 했고 목성의 얼음 위성 유로파에 착륙하여 얼음 아래 바다에서 생명체의 증거를 찾는 우주 임무를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저자의 연구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목성의 달인 유로파이지만, 외계 행성의 많은 위성에는 지표면 아래에 바다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가장 유망한 별은 유로파와 함께 토성의 달인 엔셀라두스, 타이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위성들에 생명을 예측하게 했을까? 태양에서 지구보다 더 멀리 떨어진 별에서 지표면 아래 바다가 발견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는 한편으로 큰 행성들과 그들의 위성들 사이 조석력의 존재와 영향을 이해하지 못했다. 위성과 거대행성 사이에 존재하는 중력의 차이와 위성의 타원 궤도가 합심하여 위성 내부의 조석 마찰을 일으키는데, 이러한 마찰은 표면 자체가 꽁꽁 얼어붙은 상태에서도 물이 표면 아래 액체 상태로 유지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위성 내부를 가열할 수 있다. 그 결과 단단히 얼어붙은 표면 지각이 액체의 지하 바다를 덮고, 적어도 일부 위성에서는 내부에서 액체 바다로 탄소와 같은 물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암석층이 형성된다.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한 생명체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암석과 해양의 상호작용이라는 변수가 중요하다. 물 자체에 존재하지 않거나 다른 화학 반응을 거치지 않는 한 물과 분리할 수 없는 구성 요소에는 원천재료가 필요하다. 즉, 물 자체는 생명을 지탱하는 화학 반응에 필요한 용매이자 매개체이지만, 생명체가 존속하려면 화합물의 재료가 필요하며 이들 원소는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인, 황을 합쳐서 약자인 CHNOPS로 알려졌다. 얼어붙지 않은 지구와 달 사이의 조석 가열로 인한 결과가 공전 동기화로 인해 이렇다 할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지구 심해의 열수 분출구의 존재와 그 중요성 역시 간과해왔다. 그러나 만일 위성들의 얼음 덮개 아래 액체 상태의 바다에도 열수구가 존재한다면 생명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어 저자는 유로파, 엔셀라두스, 타이탄의 해저 해양의 발견을 시작으로 세 가지 퍼즐로 이름 지은 분광학, 중력 측정, 자기장 검출 및 측정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추측과 발견을 단계별로 안내한다. 유로파와 엔셀라두스의 경우, 과학자들은 갈릴레오와 카시니 탐사선뿐만 아니라 더 최신형인 주노 탐사선의 플라이바이 flyby 에 의존한다. 호이겐스 착륙선에서 근접 촬영으로 탐사한 타이탄은 지표면 아래 바다뿐만 아니라 자체 증발 주기, 지표면 액체, 강우량 등을 가진 기괴한 표면 환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표면수는 물이 아닌 메탄 성분이다. 저자는 가니메데, 칼리스토, 트리톤, 심지어 명왕성을 포함한 지표면 아래에 바다가 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하지 않는다.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추측과 더불어 생명체에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구상의 생명체와 비교하여 해저 해양 생물이 어떤 특별한 특징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탐험의 미래에 관해 말한다. 현실적으로 미래의 탐사선들이 궤도에서 위성을 분석하고, 착륙선들이 표면과 내부를 조사하고, 얼어붙은 표면을 녹이거나 뚫고 들어가 잠수정으로 바다를 탐험하는 임무를 구체화하려면 NASA와 국제 교류를 통한 자금 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이 책은 지구의 바다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관한 오랜 역사와 지구 이외의 행성에도 존재할지 모르는 바다를 주제로 삼는다. 지구 이외에 다른 곳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그리고 그러한 세계가 생명체에게 호의적일까? 이것이 이 책이 제시하는 두 가지 큰 질문이다. 우주 생물학 질문의 핵심은, 지구상 생명체의 진화가 우연의 결과인지, 아니면 유리한 조건이라면 어디든지 생명체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인지에 있다. NASA 제트추진연구소의 과학자이며 태양계 탐사 부책임자인 저자는 과학사의 큰 줄기를 바탕으로 이 답변에 대한 매우 깔끔한 틀을 제시한다. 수 세기에 걸쳐 우리는 물리, 화학, 지질학의 법칙이 지구 너머에서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생물학에 관한 한, 우리는 아직 그 비약을 이루지 못했다. 지구 너머에서도 생물학이 과연 작동할까? 우리가 알기로 생명체에게는 절대적으로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 분분하기는 해도 바다야말로 태초의 생명이 시작된 곳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가장 먼저 바다에서 답을 찾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맞다.

 

우주 생물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지구와 태양까지의 거리(1AU)에 근거하여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조건에 딱 들어맞는 골디락스 영역에 대한 개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동명의 동화 주인공에서 따온 골디락스가 죽 세 그릇을 놓고 선택하면서 너무 차갑거나 뜨겁지도 않은 적절한 온도의 그릇을 택했다는데서 연유하듯, 태양에 너무 가까워 불타오르지도 않고 너무 멀어 얼어붙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로지 지구만이 골디락스 영역에 해당한다는 생각은 1979년 목성의 큰 위성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에서 거대한 액체 상태의 물바다를 발견한 NASA의 보이저 탐사선에 의해 뒤집혔다. 얼음에 덮여있지만, 조석력에 의해 아래로부터 가열된 바다의 부피는 지구 바다의 부피보다 10배 이상 더 작다. 2005년, 토성의 작은 위성 엔셀라두스의 얼음 밑 바다는 수백 킬로미터 상공의 우주로 액체 상태의 물 분수를 쏘아올리는 놀라운 형태로 나사의 카시니 탐사선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엔셀라두스의 남극 얼음 덮개의 갈라진 틈을 통해 분출된 간헐천은 눈으로 변했고, 이 간헐천은 다시 내려와 달의 남극을 덮었다. 이러한 관측을 바탕으로 토성의 거대 위성 타이탄은 메탄-에탄 성분의 바다 아래에 얼음으로 덮인 물바다가 있으며,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주변에는 아마도 많은 얼음 바다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케플러 우주 망원경은 다른 별들을 돌고 있는 무수한 얼음 바다를 발견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성간 공간을 순항하기 위해 행성 간의 상호작용으로 방출된 것이다.

 

중간 태양계의 큰 위성들, 즉 타이탄, 칼리스토, 가니메데, 트리톤, 유로파, 엔셀라두스와 같은 위성 중 일부는 지표면을 강타하는 치명적인 태양풍으로부터 물을 보호하는 두꺼운 지각 또는 얼음층 아래에 갇힌 매우 큰 바다의 본거지일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 지하 바다가 지난 수백만 년 동안 미생물의 가장 작은 씨앗을 뿌려왔고, 지열에 의해 내부에서 따뜻해졌으며, 비록 생명체가 발달하기 가장 쉬운 조건은 아니지만 물과 최소한의 영양소를 공급받고, 강한 방사선으로부터 보호받는다면 새로운 ‘골디락스 존’의 개념에 잘 들어맞는 것이다. 저 멀고 어두운 외계 바다의 깊이가 우리 바다의 가장 깊은 지역과 비슷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면서, 저자는 이 얼음으로 덮인 바다에 해변이나 모래사장은 없지만, 잠재적으로 훌륭한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라고 말한다. 이 책은 특히 이상하게 생긴 생물들이 먹이활동을 하고, 짝짓기하고, 엄청난 수압을 견디면서 진화하며 지구 바다의 가장 어둡고 가장 살기 힘든 깊숙한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묘사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외계 바다를 관통하는 고무적인 주제는 바로 삶의 순수한 끈기에 대한 확신으로, 이는 저자 자신이 진정한 신봉자라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 그는 금성의 고대 바다에서 명왕성 내부 액체의 기이한 화학적 혼합에 이르기까지, 만약 생명체 기원의 화학 작용이 보편적 현상이라면 생명 그 자체도 보편적 현상의 일부라고 말한다.

 

이 책은 지구와 다른 세계의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생명체를 찾는 방법에 대한 입문서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생명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통찰을 제공하지만,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생명체를 찾을 수 있는 다양한 도구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일단 생명체를 찾는 방법과 대상을 알게 되면 어려운 일이 다가온다. 잠수정이나 우주선처럼 어디론가 보낼 수 있는 작은 틀에 모든 것을 기술적으로 압축하는 것이다. 우주 임무란 전반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위험한데다 복잡하며 매우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로 무언가를 발견할 가능성이 큰 곳부터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나사는 지구 너머 생명체의 존재를 찾아 우주 탐사선으로 낯선 세계를 방문하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다른 많은 별을 지나치며 공전 궤도를 돌기도 하고, 지구와 매우 유사한 조건의 별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우리는 한 세기 동안 과학으로 무장한 채 다른 곳에서 생명을 찾고 있으며, 반세기 동안 본격적으로 우주의 생명을 찾고 있다. 데이터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생명체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아직 유로파, 엔셀라두스, 타이탄, 가니메데, 세레스, 트리톤, 명왕성과 같은 행성에서 살아있는 생명체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이 책의 전반적인 초점이다.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무엇이며,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은 무엇인가?

 

가까운 미래에 다른 행성에 대한 탐사는 대부분 우주 생물학 드로이드를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탐사 로봇을 제작하고 작동하는 방식은 전자 공학이나 로봇 공학보다는 예전 인간이 우리 세계, 즉 지구를 탐험했던 방식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드로이드는 초저온, 진공상태, 방사선의 맹폭 조건에서도 작동할 수 있지만 그들을 어디로 보내고 무슨 일을 시킬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탐험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결국, 이러한 탐험 임무에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열수구처럼 우리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곳에 다녀왔고, 그곳에 사는 생물에 대한 경외감과 경이로움 속에서 과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수행해 왔다. 그리하여 이 책에는 우리가 이미 배운 것, 현재 배우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배워야 할 것에 대한 여과 없는 열정과 경외심이 담겨 있다. 우주 탐사에 흥미를 느끼는 모든 독자님께 일독을 권해드린다.

 

#천문학 #우주의바다로간다면 #우주생물학 #행성과학 #우주생명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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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바다로 간다면 - NASA의 과학자, 우주의 심해에서 외계 생명체를 찾다
케빈 피터 핸드 지음, 조은영 옮김 / 해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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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미 배운 것, 현재 배우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배워야 할 것에 대한 우주 생물학자의 여과없는 열정과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담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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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도 리콜이 되나요? - 우리가 영화를 애정하는 방법들
김도훈 외 지음 / 푸른숲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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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좋아하세요?”

 

꼭 이성과의 교제 때문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해봤을 만한 질문이다. 여가와 문화생활을 한꺼번에 충족하는 수단으로 아마 영화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 매체도 없을 것이다. 학교 단체관람이나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에서 벗어나 이제 영화는 주말 아침마다 영화를 소개하는 공중파 방송을 비롯해 우리의 일상에 매우 깊숙이 들어와 있다. 예전 가정용 비디오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온 식구가 토요일 밤마다 TV 앞에 모여앉아 투게더 아이스크림 한 통을 비워가며 주말의 명화를 보고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기 일쑤였다. 비디오 재생기가 신혼살림 목록에 오른 이후로는 주말 아침마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동네 비디오방을 들락거렸고, 조금 더 지나 DVD (Digital Versatile Disc)가 보편화되면서 보다 고화질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안방에서 편안하게 영화 전문 케이블 채널로 취향에 맞는 VOD (Video On Demand) 또는 OTT (Over The Top)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아, 옛날이여~!

 

과거 영화가 선진국의 문물로 우대받던 시절, 국산 영화는 ‘방화’라는 용어로 격하되었고 스크린 쿼터제로 외국 영화에 대항하여 용케 버티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를 세계에 널리 알린 영화 <기생충>이나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을 통해 우리는 전 지구적 문화강국의 면모를 보며 차오르는 국뽕을 자주 맛보곤 한다. 잘 만들어진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뿐만 아니라, 수출로 더 큰 수입을 올리기도 하고 리메이크되어 감독과 작품의 인지도가 한층 높아지기도 한다. 혹자는 영화 산업이 일찍 발달했던 서구의 경우 소재로 쓸만한 내용이 갈수록 고갈되고 제작 기술이 상향 평준화 되면서 상대적으로 풍부한 후발주자 국가들의 콘텐츠가 주목받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과거에 비해 질적 양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는데 이견은 없을 듯하다.



 

【작품을 만드는 이들의 몫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분석하고, 의도를 듣고, 의미를 짚어내고, 가치를 평가하고, 새로운 창작자들을 발굴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이즈음 우리 영화계가 다양한 매체와 함께 교류하며 얻은 경험이다. (p.93)】

 

한 사람의 인생에 잘 만들어진 영화를 접하는 것처럼 신비롭고 위대한 간접 경험은 없을 것 같다. 영화라는 문화 자본이 빈약했던 1960년대 초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람 인원 22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이만희 감독의 작품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의 촬영기사로 일하셨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극장에서 보았던 천연색 영화가 바로 <메리 포핀스>(1964)였다. 참고로 당시 초대형 프로젝트로 주목받으며 유수 영화제의 수상을 휩쓸었던 이 영화는 특수효과를 도입한 최초의 실사영화이자 애니메이션과 합성이라는 혁신적 시도, 시대를 앞서간 당찬 여주인공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주인공 남매가 장성하여 부모가 되었다는 설정으로 2019년 <메리 포핀스 리턴즈>로 리메이크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공중파 TV는 흑백화면으로만 볼 수 있던 때라 환상적인 총천연색 화면과 함께 등장하던 펭귄들의 애니메이션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관람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심지어 남자 주인공이 부르던 굴뚝 청소부의 주제가는 지금도 기억하고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이후로도 극장을 자주 찾게 되면서 자주 영어권 영화에 노출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밥벌이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다고 억측해본다.

 

이런 긍정적인 영향을 의식하여 필자 역시 두 딸에게 그와 유사한 환경에 노출하려 의도적으로 시도해 본 적이 있다. 당시 인기를 누리던 영어권 애니메이션으로 디즈니의 <토이 스토리1, 2(1995)> 시리즈나 <몬스터 주식회사’(2001)>를 자주 보여주었는데, 결과적으로 역효과만 거두었을 뿐이다. 영어 발음에 익숙해지기는커녕 아이들을 겁주는 무서운 괴물들에게 ‘정말로’ 놀라기만 했기 때문이다. 눈높이 노출에 흥행 실패한 이후 아이들은 대체재로 보여준 아기자기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에 몰입했는데, 큰 아이는 자막 없이도 일본어 대사를 절반 정도는 그냥 듣고 이해할 정도는 된다고 하고 작은 아이는 자기 선택으로 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니 그런데, 저자들처럼 나에게도 ‘영화’라는 단어 하나에 이렇게 풀어놓을 사담이 있었다니?



 

세 명의 영화 전문 기자, 예능프로 제작자, 음악 평론가로 구성된, 무엇보다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인 다섯 인사가 ‘영화를 애정하는 그들만의 방법’에 관한 글을 모아 낸 이 책은 전체 4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이 판에 발을 들이게 된 건’에서는 의도치 않았지만, 생계 수단으로서의 영화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운명 같은 영화 사랑 이야기 또는 어린 시절의 인연을 회고한다. 2장 ‘시네필 시대의 낭만과 사랑’에서는 영화계에 종사하면서도 정작 영화계 인사로는 대우받지 못하는 본격적인 밥벌이 현장에서의 좌충우돌 경험담을 들려준다. 여기서 공동 저자 5인의 삶은 하나같이 지고지순한 영화 사랑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3장 ‘영화 사담’에서는 가장 인상적이거나 영감을 얻었던 영화 장면과 대사를 소개하며 이에 얽힌 개인사를 털어놓는다. 영화라는 그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사랑한 대가(?)를 생애를 통해 톡톡히 치르는 셈이다. 4장 ‘영화로 먹고사는 일’에서는 영화잡지 기사를 쓰고 감독을 인터뷰하고 배경 음악을 소개하는 등 직접 영화를 제작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영화계에 몸담은 그들의 세계를 말한다. 서로 종사하는 구체적인 분야는 조금씩 다르지만, 영화판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숨겨진 직업적 일상 이야기에서는 애증이 교차한다. 그리고 각 장의 중간에는 첫 직장, 좋아하던 극장과 돈 주고 본 첫 번째 영화, 가장 많이 본 영화와 그 횟수, 잠 못 이루게 만든 배우,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대사, 자기만 싫어하는 영화, 이 책의 예상 판매 부수를 묻는 직설적인 설문지를 넣어 다섯 저자의 개성 넘치는 답변을 들을 수 있도록 엮었다.



 

【어쨌든 고된 마감 노동을 업으로 삼는 그 한 줌 소수의 직군인 우리는 그래도 덕업일치를 이룬 행운아라고 스스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남들이 다 복지와 부동산을 챙길 때, 20년째 복지부동으로 오르지 않는 글 값을 받으며 일해왔다. 한창 기고를 하다가 잡지가 없어지면 원고비를 떼이기도 하고, 경영난으로 밀린 일도 적지 않았다. (p.230)】

 

이 책의 공저자인 김도훈, 김미연, 배순탁, 이화정, 주성철의 공통분모를 찾으라면 JTBC 종편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인 <방구석1열>로 압축된다. 주로 주말 아침에 영화를 소재로 하는 기존의 프로그램들이 개봉작을 소개하는데 집중했던 반면, 이 프로에서는 이미 개봉한 작품 중에 호평받은 작품을 깊이 파고든다. 매주 선정하여 발표하는 해당 영화의 관계자가 출연하거나 해당 주제에 맞는 사람들이 나와 영화와 관련된 깊은 이야기를 풀어주는 재미가 있다. 타 영화프로그램에 비해 단순한 줄거리 소개를 넘어선 상황별 토크 형식을 활용해 영화 및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담긴 인문학적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이 프로를 제작하거나 인문학 콘텐츠의 전문가로 출연하는 공저자들 덕분에 시청자는 영화 보는 심미안을 덤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자기 분야의 책을 저술한 전문가이자 수십 년을 영화와 함께해온 덕후(德厚,オタク)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공저자들의 수다 크래프트(Star Craft 게임명을 차용한 신조어)를 통하여 우리가 어릴 적부터 보았던 영화 제목과 유명 배우들의 이름을 듣고 그들의 멋진 대사와 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아련한 향수에 젖는다. 주윤발이 미소 짓는 입에 이리저리 옮겨 물던 그 멋진 이쑤시개, 명절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던 성룡 형님의 코믹 액션, 이소룡의 절권도에 반해 학교 옥상에서 “와다~!” 소리와 함께 쌍절곤으로 애꿎은 화분을 박살 내다 학주에게 들켜 내 뒤통수가 박살 나던 일, 지금은 사라진 시내 모처의 유명 극장들과 극장 앞 빵집에서 첫인사를 나누었던 소개팅녀, 수업 땡땡이치고 컵라면을 후룩거리며 담배를 뻐끔대던 동시상영 극장, 매표소 앞 늘어선 줄 사이를 비집고 다니던 암표상, 화면에 공룡이 나올 때마다 내 의자 등받이를 발로 차며 발악하듯 괴성을 지르던 어느 집 꼬마의 기억들 역시 소환해본다. 끝으로 우리가 문화 소비자로서 영화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기까지 영화계 사람들의 숨은 노력과 수많은 사연이 깔려있었으며,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누군가는 피땀 흘려 고생하고 있음을 또한 알게 된다. 자신이 영화 애호가이든 아니든 간에 기왕이면 그들이 기울인 노고는 알고 즐기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는지.

 

#에세이 #영화평도리콜이되나요? #방구석1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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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도 리콜이 되나요? - 우리가 영화를 애정하는 방법들
김도훈 외 지음 / 푸른숲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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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 - 생물학과 유전학의 역사를 바꾼 숨은 주인공, 개정판
마틴 브룩스 지음, 이충호 옮김 / 갈매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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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일이면 암컷 초파리 한 마리가 지구 전체 인구보다 더 많은 자손을 퍼트릴 수 있다. 과학자들이 ‘켄과 바비’라고 이름 붙인, 생식기 없이 태어난 돌연변이도 있고 어떤 녀석들은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리를 이고 태어난다. 초파리에 관해 미처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연구를 목적으로 이들은 인간에 의해 집단 처형(?)당하기도 하고 맛난 과일로 훈련받은 대가를 보상받기도 한다. 사람과 매우 비슷하게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일과 휴식 시간을 따로 갖는다. 마약 성분에 중독되어 마이클 잭슨처럼 뒤로 걷거나(Moon Walking) 빙빙 돌다 어지럼증 아니면 배고픔으로 죽는다. 수컷의 정액에는 독성분의 단백질이 있어 암컷의 뇌 속에서 행동을 조종하며 너무 잦은 짝짓기로 일찍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외부와 단절된 하와이 제도의 초파리는 무려 1,000종이 넘는다.

 

『초파리가 실험실에 정식으로 데뷔한 때는 1900년이고, 장소는 하버드대학교 교수 윌리엄 캐슬의 실험실이었다. (중략) 박물학의 굴레에서 벗어난 생물학은 동물행동학, 진화론, 생리학 등의 전문 분야로 분화해 가기 시작했다. 생물학자들은 수많은 새로운 개념들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용 생물로 적합한 동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초파리가 가장 적합한 후보로 입증되었다.』 (p.22-23)

 

오늘날 초파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생물학 분야는 거의 없다. 암 치료법을 찾는 방편으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한 조기 경고 시스템으로, 알츠하이머병과 헌팅턴병 같은 신경성 장애 연구법으로, 알코올과 약물 중독, 수면 장애, 시차증 등 유전학을 이해하는 데 사용된다. 100년도 넘게 초파리 연구는 유전학의 주요인으로 확립되었다.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 사실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한 이 책은 초파리를 실험 재료로 이용해온 과학사를 다룬 매력적인 소개서이다. 벌써 20년쯤 전에 출간된 책이라 과학이 고리타분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저자가 구사하는 유머는 요즘 말로 아재 개그 같지만, 다행히도 이야기의 큰 흐름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저자는 연구자로서 평생 실험실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어쩌다 학회에서 공짜로 보내주는 여행에 미소를 참지 못하는 자신을 웃음의 소재로 삼고, 초파리들만의 은밀한 성생활을 가벼운 어조의 농담으로 승화시킨다. 곤충학 관련 서적이 큰 소리로 자주 웃게 만드는 분야는 아니지만, 읽다 보면 익살스러운 표현을 자주 발견한다. 과일이 부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알코올 성분의 효모를 섭취해 날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걷는 초파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묘사하면서 인간이 그들에게 선사하는 고통에 유감을 표하기도 한다. 유익한 정보가 가득하여 과학에 진지한 관심을 둔 특정 독자층뿐 아니라 일반인 누구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과거 과학적 사고를 추동했던 초파리 연구의 틀을 통해 20세기 생물학적 사고가 어떻게 진화되었는가를 설명하면서, 여러 초파리 연구자들의 숨은 이야기와 함께 유전학이 진화론의 허점을 어떻게 보완해 왔는지를 소개한다. 그 결과 우리는 유전학의 탄생을 둘러싼 역사, 과학, 연구자들 사이의 대인관계 드라마에 대해 소소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배울 거리와 함께 진화와 자연철학이 서로 화해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초파리(small fruit fly)는 세계 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파리목 초파리과로 분류된다. 종류에 따라 서식지가 매우 다양하고 번데기 과정을 포함한 갖춘탈바꿈을 통해 자라며 한 세대가 매우 짧은 것이 특징이다. 초파리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과학적으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토마스 모건 (Thomas Hunt Morgan)의 돌연변이 연구로 유명한, ‘배가 검고 이슬을 사랑하는 동물’이란 뜻의 노랑초파리Drosophila melanogster는 유전학을 비롯한 다양한 생물학 분야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실험 재료로 취급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그 활용 폭이 더욱 넓어지고 있으며 특히 의료계에서는 알츠하이머, 헌팅턴병, 하반신 마비, 각종 암, 소아비만 등 치료가 어려운 병을 대상으로 치료법 개발을 위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초파리 실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쥐나 개·원숭이와 같은 동물 실험은 물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과 비교해 가성비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며, 동물 실험을 반대하는 단체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윤리적 비난을 잠재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초파리 연구의 선구자로 1933년 노벨 생리학상을 받은 토머스 모건을 빼놓을 수 없다. 1910~1915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초파리를 연구하던 그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염색체의 유전적 특징을 파악해낸다. 생물의 유전형질을 나타내는 유전자가 쌍을 이루어 염색체에 선상배열을 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유전 메커니즘인 염색체지도를 초파리의 실험으로 입증했다. 그의 공로로 이전까지 방향을 잡지 못했던 유전자 연구가 튼튼한 기반 위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모건 학파의 일원이었던 허먼 멀러(Hermann J. Muller) 역시 초파리 연구의 중요 인물이다. 그는 X선에 의한 인공 돌연변이 발생이 가능함을 최초로 입증하였으며 돌연변이 유발 효소를 결정화한 공로로 194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러시아 출신의 생물학자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는 유전학 연구에 집중되던 초파리의 세계를 진화와 결합해 진화유전학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작은 유전적 변화가 축적되어 발생하는 생식형 불일치가 종 사이의 경계를 정의한다고 보았다.

 

『도브잔스키는 두 개체군 사이에 유전적 차이가 축적되면서 몸 크기, 색깔, 생식기 구조, 행동 특이성, 그리고 그 밖의 수천 가지 특징에도 차이들이 축적되어 결국에는 두 종이 서로 짝짓기하길 싫어하거나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이렇게 뚜렷이 구별되는 유전적 특징의 차이들을 보면서 자신이 종의 기원이 발생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고 믿었다.』 (p.145)

 

사람의 유전형질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점 때문에 초파리는 유전학은 물론 의료 현장에 없어서는 안 될 실험용 동물이다. 초파리 연구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는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사람에게 발생하고 있는 질병들을 규명하였고, 마치 사람이 연가를 부르는 것과 같은 수컷과 암컷 사이의 애절한 구애 습성을 알아내기도 하였다. 초파리 유전자 연구를 통해 기대하는 분야는 불치병 치료로, 특히 헌팅턴병처럼 근육 간의 조정 능력, 인지능력이 저하되고 정신적인 문제가 동반되는 진행성의 신경계 퇴행성 질환과 관련해 치료의 실마리가 되는 원인을 찾는 중이다. 초파리는 유전학 이외에도 종 분화 과정과 같은 진화 연구, 행동과 생태에 관한 연구, 생리학, 세포 생물학과 발생에 관한 연구 등 생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적절한 실험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초파리는 심리학 연구에도 동원되고 있다. 초파리를 대상으로 유전자가 어떻게 행동을 조절하는지, 시간과 공간 감각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찾는 연구 등 행동 유전학에 활용되고 있다.

 

초파리는 몸집이 작고 다양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기 때문에, 좁은 장소에서 간단한 먹이로 많은 개체를 쉽게 기를 수 있다. 또한 돌연변이를 식별하는 방법이나 사육하는 기술이 어렵지 않다. 초파리 애벌레의 침샘에 있는 다사염색체(polytene chromosome)는 핵분열 없이 염색체가 반복적으로 복제되어 상당히 크기 때문에, 유전자의 관찰이 쉽고 유전자의 작용을 연구하기에 적당하다. 유전학 연구에 있어서 교배를 통한 실험은 필수적이기 때문에 한 세대가 짧고 번식을 많이 하는 초파리는 좋은 연구재료가 되고 있다. 생쥐나 예쁜꼬마선충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고의 만능 실험 동물로 남아있는 초파리를 통해 또 어떤 사실이 밝혀질지 지켜볼 일이다.

 

『신체가 맡은 주 임무는 생식을 할 때까지 충분히 오랫동안 개체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생식에 성공하고 나면 체세포는 돌연변이가 누적되고 늙어 갈 수 있다. 맡은 임무를 이미 완수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진화는 우리가 유성 생식을 하도록 만듦으로써 우리의 신체를 소모품으로 만든 것이다.』 (p.253)

 

결국, 이 놀라운 초파리는 과학 발전사에 큰 공을 세운 숨은 영웅이었다. 그런데도 금세기의 많은 위대한 발견물 가운데 초파리의 선구적인 역할에 대한 대중적 설명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은 유전학에서 진화학, 생리학에서 생태학, 의학에서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초파리의 짧고 굵은 삶을 통해 현대 생물학사를 들려줌으로써 부패한 음식물을 좋아하는 조그맣고 성가신 존재일 뿐이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바로잡아준다. 저자는 매우 독창적이고 재미있는 화법으로 초파리의 생애 주기를 단계별로 알려주며 생물학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중요한 의의를 찾는다. 배아에서 성체에 이르는 놀라운 여정부터 기억과 학습의 본질 그리고 노화의 이론적 배경에 이르기까지, 짧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의 삶이 인간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초파리 연구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초파리의 명성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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