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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도 리콜이 되나요? - 우리가 영화를 애정하는 방법들
김도훈 외 지음 / 푸른숲 / 2022년 8월
평점 :

“영화, 좋아하세요?”
꼭 이성과의 교제 때문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해봤을 만한 질문이다. 여가와 문화생활을 한꺼번에 충족하는 수단으로 아마 영화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 매체도 없을 것이다. 학교 단체관람이나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에서 벗어나 이제 영화는 주말 아침마다 영화를 소개하는 공중파 방송을 비롯해 우리의 일상에 매우 깊숙이 들어와 있다. 예전 가정용 비디오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온 식구가 토요일 밤마다 TV 앞에 모여앉아 투게더 아이스크림 한 통을 비워가며 주말의 명화를 보고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기 일쑤였다. 비디오 재생기가 신혼살림 목록에 오른 이후로는 주말 아침마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동네 비디오방을 들락거렸고, 조금 더 지나 DVD (Digital Versatile Disc)가 보편화되면서 보다 고화질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안방에서 편안하게 영화 전문 케이블 채널로 취향에 맞는 VOD (Video On Demand) 또는 OTT (Over The Top)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아, 옛날이여~!
과거 영화가 선진국의 문물로 우대받던 시절, 국산 영화는 ‘방화’라는 용어로 격하되었고 스크린 쿼터제로 외국 영화에 대항하여 용케 버티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를 세계에 널리 알린 영화 <기생충>이나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을 통해 우리는 전 지구적 문화강국의 면모를 보며 차오르는 국뽕을 자주 맛보곤 한다. 잘 만들어진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뿐만 아니라, 수출로 더 큰 수입을 올리기도 하고 리메이크되어 감독과 작품의 인지도가 한층 높아지기도 한다. 혹자는 영화 산업이 일찍 발달했던 서구의 경우 소재로 쓸만한 내용이 갈수록 고갈되고 제작 기술이 상향 평준화 되면서 상대적으로 풍부한 후발주자 국가들의 콘텐츠가 주목받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과거에 비해 질적 양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는데 이견은 없을 듯하다.

【작품을 만드는 이들의 몫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분석하고, 의도를 듣고, 의미를 짚어내고, 가치를 평가하고, 새로운 창작자들을 발굴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이즈음 우리 영화계가 다양한 매체와 함께 교류하며 얻은 경험이다. (p.93)】
한 사람의 인생에 잘 만들어진 영화를 접하는 것처럼 신비롭고 위대한 간접 경험은 없을 것 같다. 영화라는 문화 자본이 빈약했던 1960년대 초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람 인원 22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이만희 감독의 작품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의 촬영기사로 일하셨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극장에서 보았던 천연색 영화가 바로 <메리 포핀스>(1964)였다. 참고로 당시 초대형 프로젝트로 주목받으며 유수 영화제의 수상을 휩쓸었던 이 영화는 특수효과를 도입한 최초의 실사영화이자 애니메이션과 합성이라는 혁신적 시도, 시대를 앞서간 당찬 여주인공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주인공 남매가 장성하여 부모가 되었다는 설정으로 2019년 <메리 포핀스 리턴즈>로 리메이크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공중파 TV는 흑백화면으로만 볼 수 있던 때라 환상적인 총천연색 화면과 함께 등장하던 펭귄들의 애니메이션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관람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심지어 남자 주인공이 부르던 굴뚝 청소부의 주제가는 지금도 기억하고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이후로도 극장을 자주 찾게 되면서 자주 영어권 영화에 노출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밥벌이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다고 억측해본다.
이런 긍정적인 영향을 의식하여 필자 역시 두 딸에게 그와 유사한 환경에 노출하려 의도적으로 시도해 본 적이 있다. 당시 인기를 누리던 영어권 애니메이션으로 디즈니의 <토이 스토리1, 2(1995)> 시리즈나 <몬스터 주식회사’(2001)>를 자주 보여주었는데, 결과적으로 역효과만 거두었을 뿐이다. 영어 발음에 익숙해지기는커녕 아이들을 겁주는 무서운 괴물들에게 ‘정말로’ 놀라기만 했기 때문이다. 눈높이 노출에 흥행 실패한 이후 아이들은 대체재로 보여준 아기자기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에 몰입했는데, 큰 아이는 자막 없이도 일본어 대사를 절반 정도는 그냥 듣고 이해할 정도는 된다고 하고 작은 아이는 자기 선택으로 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니 그런데, 저자들처럼 나에게도 ‘영화’라는 단어 하나에 이렇게 풀어놓을 사담이 있었다니?

세 명의 영화 전문 기자, 예능프로 제작자, 음악 평론가로 구성된, 무엇보다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인 다섯 인사가 ‘영화를 애정하는 그들만의 방법’에 관한 글을 모아 낸 이 책은 전체 4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이 판에 발을 들이게 된 건’에서는 의도치 않았지만, 생계 수단으로서의 영화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운명 같은 영화 사랑 이야기 또는 어린 시절의 인연을 회고한다. 2장 ‘시네필 시대의 낭만과 사랑’에서는 영화계에 종사하면서도 정작 영화계 인사로는 대우받지 못하는 본격적인 밥벌이 현장에서의 좌충우돌 경험담을 들려준다. 여기서 공동 저자 5인의 삶은 하나같이 지고지순한 영화 사랑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3장 ‘영화 사담’에서는 가장 인상적이거나 영감을 얻었던 영화 장면과 대사를 소개하며 이에 얽힌 개인사를 털어놓는다. 영화라는 그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사랑한 대가(?)를 생애를 통해 톡톡히 치르는 셈이다. 4장 ‘영화로 먹고사는 일’에서는 영화잡지 기사를 쓰고 감독을 인터뷰하고 배경 음악을 소개하는 등 직접 영화를 제작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영화계에 몸담은 그들의 세계를 말한다. 서로 종사하는 구체적인 분야는 조금씩 다르지만, 영화판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숨겨진 직업적 일상 이야기에서는 애증이 교차한다. 그리고 각 장의 중간에는 첫 직장, 좋아하던 극장과 돈 주고 본 첫 번째 영화, 가장 많이 본 영화와 그 횟수, 잠 못 이루게 만든 배우,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대사, 자기만 싫어하는 영화, 이 책의 예상 판매 부수를 묻는 직설적인 설문지를 넣어 다섯 저자의 개성 넘치는 답변을 들을 수 있도록 엮었다.

【어쨌든 고된 마감 노동을 업으로 삼는 그 한 줌 소수의 직군인 우리는 그래도 덕업일치를 이룬 행운아라고 스스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남들이 다 복지와 부동산을 챙길 때, 20년째 복지부동으로 오르지 않는 글 값을 받으며 일해왔다. 한창 기고를 하다가 잡지가 없어지면 원고비를 떼이기도 하고, 경영난으로 밀린 일도 적지 않았다. (p.230)】
이 책의 공저자인 김도훈, 김미연, 배순탁, 이화정, 주성철의 공통분모를 찾으라면 JTBC 종편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인 <방구석1열>로 압축된다. 주로 주말 아침에 영화를 소재로 하는 기존의 프로그램들이 개봉작을 소개하는데 집중했던 반면, 이 프로에서는 이미 개봉한 작품 중에 호평받은 작품을 깊이 파고든다. 매주 선정하여 발표하는 해당 영화의 관계자가 출연하거나 해당 주제에 맞는 사람들이 나와 영화와 관련된 깊은 이야기를 풀어주는 재미가 있다. 타 영화프로그램에 비해 단순한 줄거리 소개를 넘어선 상황별 토크 형식을 활용해 영화 및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담긴 인문학적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이 프로를 제작하거나 인문학 콘텐츠의 전문가로 출연하는 공저자들 덕분에 시청자는 영화 보는 심미안을 덤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자기 분야의 책을 저술한 전문가이자 수십 년을 영화와 함께해온 덕후(德厚,オタク)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공저자들의 수다 크래프트(Star Craft 게임명을 차용한 신조어)를 통하여 우리가 어릴 적부터 보았던 영화 제목과 유명 배우들의 이름을 듣고 그들의 멋진 대사와 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아련한 향수에 젖는다. 주윤발이 미소 짓는 입에 이리저리 옮겨 물던 그 멋진 이쑤시개, 명절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던 성룡 형님의 코믹 액션, 이소룡의 절권도에 반해 학교 옥상에서 “와다~!” 소리와 함께 쌍절곤으로 애꿎은 화분을 박살 내다 학주에게 들켜 내 뒤통수가 박살 나던 일, 지금은 사라진 시내 모처의 유명 극장들과 극장 앞 빵집에서 첫인사를 나누었던 소개팅녀, 수업 땡땡이치고 컵라면을 후룩거리며 담배를 뻐끔대던 동시상영 극장, 매표소 앞 늘어선 줄 사이를 비집고 다니던 암표상, 화면에 공룡이 나올 때마다 내 의자 등받이를 발로 차며 발악하듯 괴성을 지르던 어느 집 꼬마의 기억들 역시 소환해본다. 끝으로 우리가 문화 소비자로서 영화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기까지 영화계 사람들의 숨은 노력과 수많은 사연이 깔려있었으며,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누군가는 피땀 흘려 고생하고 있음을 또한 알게 된다. 자신이 영화 애호가이든 아니든 간에 기왕이면 그들이 기울인 노고는 알고 즐기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는지.
#에세이 #영화평도리콜이되나요? #방구석1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