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언론 자랑 - ‘소멸’이 아니라 ‘삶’을 담는 지역 언론 이야기
윤유경 지음 / 사계절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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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낮 12시 10분, "빰빠빠 빰빠 빰~빠~" 경쾌한 시그널 음악과 함께 시작되던 국민 예능 <전국노래자랑>. 윤유경 작가의 『전국 언론 자랑』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자마자 그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책의 목차를 살피면서 작가가 왜 하필 수많은 제목 중에 이 친숙한 프로그램의 이름을 빌려왔는지 무릎을 '탁' 치며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전국노래자랑> 활자판 같다.

 

솔직히 요즘 TV나 포털 사이트 뉴스를 보면 한숨부터 나올 때가 많다. 매일 같이 싸우는 정치인들, 자극적인 사건 사고, 서울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같은 이야기들만 가득할 뿐, 정작 사람들이 하고픈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특히 지방으로 갈수록 뉴스는 십중팔구 ‘우울한 소식’뿐이다. 인구가 줄어서 마을이 통째로 사라질 위기라는 이른바 '지방 소멸' 이야기 말이다. 그래서 처음엔 '언론'이라는 단어 때문에 좀 딱딱하고 지루한 책이 아닐까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역 소멸’이라는 알맹이 없는 말 대신 우리는 ‘서울 중심주의’, ‘실패한 지방 분권’,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의 불균형’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수도권을 중심에 둔 우리의 시선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중략) 많은 사람들이 언론과 기자를 불신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정보를 요구하고, 기사에 오류나 왜곡이 있어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다. (73쪽)

 

<전국노래자랑>의 진짜 매력이 화려한 가창력을 뽐내는 가수가 아니라, 우리 앞집 세탁소 아저씨, 뒷집 반찬가게 할머니가 무대에 올라와 마이크를 잡고 춤추는 그 '사람 냄새'에 있는 것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동네 신문과 지역 방송의 주인공들 역시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다. 전북 진안의 동네 신문 이야기는 흡사 <전국노래자랑> 진안군 편을 보는 것 같았다. <전국노래자랑> 무대 위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스타가 되듯, 진안신문에서는 80대 할머니도, 발달장애가 있는 동네 청소년도 직접 펜을 들고 자기들의 일상을 기사로 써낸다. 할머니가 쓴 삐뚤빼뚤한 기사가 신문에 실리고 그걸 동네 사람들이 함께 읽으며 왁자지껄 웃는 모습은, 동네 할아버지가 방송에 나와 엇박자로 트로트를 부를 때 객석의 주민들이 다 같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는 풍경과 완벽하게 겹쳐 보였다. 주류 언론에서는 절대 마이크를 주지 않을 사람들에게 기꺼이 멍석을 깔아주고 마이크를 쥐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동네 언론의 진짜 역할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지역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지역민들의 삶을 듣고 기록하는 것, 그들의 삶을 지역의 역사로서 보존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단독이나 속보 경쟁, 조회 수 올리기에서 벗어나 지역 언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87쪽)

 

그런가 하면 부산일보의 '산복빨래방' 프로젝트는 故 송해 씨의 따뜻한 진행을 똑 닮아 있었다. 부산의 가파른 산동네에 작은 무료 빨래방을 차린 기자들은 취재 수첩을 들이밀며 딱딱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마치 진행자가 참가자들의 손을 꼭 잡고 살아온 이야기를 먼저 묻듯이, 기자들은 어르신들의 무거운 이불을 대신 빨아드리며 자판기 커피 한 잔과 함께 그분들의 팍팍하고도 눈물겨운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노래 대신 삶의 애환을 듣고 그것을 기사로 써 내려간 이들의 모습에서, 뉴스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따뜻하게 어루만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충남 태안, 당진과 충북 옥천의 동네 신문들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전국노래자랑>이 그 동네의 특산물을 자랑하고 동네 사람들의 소소한 경사를 축하하는 자리인 것처럼, 이곳 기자들은 서울에서 일어난 큰 사건보다 주민들의 삶에 찰떡같이 붙어있는 진짜배기 뉴스들을 찾아다닌다. 동네 버스 노선이 갑자기 바뀌어서 할머니들이 시장에 가기 힘들어졌다, 옆집 철수네 강아지를 잃어버렸는데 같이 찾아보자, 동네에 들어오려는 냄새 나는 공장을 막아보자, 그리고 무려 18년 동안 발로 뛰는 취재를 멈추지 않고 보도하는 전대미문의 기자 정신 이야기까지. 중앙 뉴스에서는 '땡!' 하고 탈락시킬 사소한 이야기들이지만, 동네 사람들의 삶에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딩동댕' 같은 소식들이다.

 

“지역은 다 버릴겁니까. KBS, MBC 등 공영 방송은 좌도 우도 아니고 아래고 가서 주민들과 어떻게 접촉면을 넓히고 필요한 방송을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148쪽)

 

그런데, 돈도 별로 못 벌고 늘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면서 이 동네 기자들은 대체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마 그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된다. 억울한 일을 당한 이웃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사를 써서 동네에 작은 변화가 생기는 걸 보는 기쁨, 그리고 길을 가다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이 "김 기자, 그 기사 잘 읽었어!"라며 건네는 박수갈채. 그것이 이들을 계속 뛰게 만드는 힘이었다. 무대 아래서 쏟아지는 동네 이웃들의 환호성과 응원이 이들에게는 최고의 출연료였던 셈이다.

 

“우리는 4만 인구도 안 되지만, 그 사람들도 사람이지 않나요. 우리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사람, 내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지역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172쪽)

 

서울깍쟁이 같은 차가운 주류 뉴스들은 통계와 숫자를 들이밀며 이제 지방은 끝났다고, 소멸할 거라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전국 언론 자랑』이 비춰준 동네의 진짜 모습은 달랐다. 그곳에는 여전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돕고 살아가는 '뜨거운 사람들의 삶'이 요동치고 있었고, 그 곁에는 우리 이웃들의 삶에 경쾌한 '딩동댕' 실로폰 소리를 울려주는 다정한 동네 기자들이 있었다.

 

가짜인데다 자극적인 뉴스 제목에 낚여 늘 신경이 곤두서고 질려있던 참에, 오랜만에 일요일 낮 <전국노래자랑>처럼 사람 냄새가 폴폴 나고 훈훈한 책을 만났다. 문득 내가 사는 동네에는 어떤 지역 신문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내일은 출근길에 동네 구석에 놓여 있는 지역 신문 가판대를 한번 유심히 살펴봐야겠다.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한 곳이고, 우리 주변엔 좋은 이웃이 참 많다고 믿으며, 억압당할지언정 폐간도 무릅쓰던 정론직설 시절이 그리운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귓가에 "전~국! 언론 자랑~!" 하는 정겨운 외침과 딩동댕 실로폰 소리가 맴돌지도 모른다.


#사계절 #윤유경 #미디어오늘 #전국언론자랑 #진짜언론 #정론직설 #지역신문 #민초이야기 #구독자가곧주주 #주류언론반성하라 #전국노래자랑활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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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국내여행 맵북 KOREA MAP BOOK ㅣ 에이든 가이드북 & 여행지도
이정기.타블라라사 편집부 지음 / 타블라라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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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마트폰 하나면 전국 어디든 길을 찾고 맛집을 검색할 수 있는 시대에, 종이 지도책은 어떤 매력을 지녀야 할까? 타블라라사에서 출판한 『에이든 국내여행 맵북』은 이 질문에 대해 '압도적인 정보량'이라는 해답을 내놓았다. 친근한 일러스트 표지를 넘기면 디지털 화면의 좁은 프레임으로는 느낄 수 없는 방대한 맞춤형 정보 잔치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과도한 친절함 때문에 '지도'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해 묵직한 물음표를 던지게 만든다. 이 책의 특징, 정보 전달, 지도 가독성, 편의성 그리고 장단점에 비판적(?) 시각을 더해 분석해 보았다. 참고로 순수 한국어 전용을 원했으나 외래어화된 용어가 너무 많은 점, 양해를 부탁드린다.

 

1. 특징 및 정보 전달: 지리를 넘어선 '여행 백과사전'

이 책의 가장 큰 무기는 단연 정보의 밀도와 알찬 맞춤형 정보다. 목차를 보면 '봄꽃편', '여름꽃 향연', '역사지도' 등 188개에 달하는 테마를 제공한다. 제주도 애월 지역이나 경주 일대의 지도를 보면, 단순한 행정구역이나 도로망을 넘어 핫플레이스, 노포 맛집, 뷰 포인트, 심지어 역사적 사건의 발생지까지 텍스트와 아이콘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지리 정보와 인문, 트렌드가 한 장에 융합되어 있어 여행의 영감을 얻고 목적지를 발굴하는 '정보 전달 매체'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2. 지도 가독성: 배경화면으로 전락한 지도, 텍스트에 잡아먹힌 지리(地理)

하지만 바로 그 장점이 이 책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을 낳았다. 명색이 지도책임에도 불구하고, 정보 전달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텍스트가 지도를 완전히 덮어버린 형국이다. 지도의 본질은 지형의 형태, 도로의 연결성, 지역 간의 물리적 거리와 공간적 맥락을 시각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상세 페이지(예: 제주, 경주 등)를 보면, 수많은 상호명과 설명 텍스트, 다채로운 아이콘들이 공간을 빈틈없이 점령하고 있다. 그 결과 산맥, 해안선, 도로망 같은 진짜 '지도 정보'는 마치 텍스트를 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깔아둔 '배경화면'처럼 흐릿하게 후퇴해 버렸다. 지형적 맥락은 사라지고 정보의 나열만 남아, 공간의 구조를 파악하고픈 독자에게는 시각적 피로도를 유발할 수 있다.

 

3. 사용자 편의성: 시스템은 훌륭하나 시각적 여백이 부족한 UI

사용자 편의성 측면에서는 아날로그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영리한 시스템이 돋보인다. 전국 지도를 격자(Grid)로 나누어 상세 페이지 번호를 명시한 '전국 인덱스 지도'는 독자가 원하는 지역을 매우 직관적으로 찾게 해 준다. 또한 서울 지도의 경우 복잡한 골목 대신 구(區)별 덩어리로 단순화하고 상세 지역을 상자로 유도하는 방식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정작 찾아 들어간 상세 페이지에서는 숨 막힐 듯한 텍스트 밀도 때문에 편의성이 크게 떨어진다. 글자의 크기가 주요 관광지의 이름은 크지만 설명은 작아 시력이 좋지 않은 필자에게는 해독이 쉽지 않으며, 텍스트 간의 여백이 적어 네비게이션처럼 직관적인 경로 탐색용으로는 사실상 활용하기 어렵다.

 

4. 장단점 요약

* 장점

* 경이로운 정보 밀도: 인터넷 검색 수십 번을 대신할 압도적인 양의 여행 정보(맛집, 카페, 유적, 자연경관 등)가 하나의 뷰에 담겨 있다.

* 테마별 큐레이션: 188개의 테마 등 기획력이 돋보이며 동선을 짜고 여행의 목적을 설계하는 기획 단계에서 훌륭한 브레인스토밍 도구가 된다.

 

* 단점

* 주객이 전도된 가독성: 텍스트와 아이콘이 지형과 도로보다 우선순위로 보여, 정작 '지도'로서의 공간 인지 기능은 약한 편이다.

* 시각적 피로감: 작은 폰트와 여백 없는 정보의 나열로 인해 눈이 쉽게 피로해지며, 원하는 목적지를 빠르게 훑어내기 어렵다.

 

결국, 『에이든 국내여행 맵북』을 전통적 의미의 '지도책'으로 접근한다거나, 네비게이션이 상용화되기 전 지도책을 보고 길을 찾아 다니던 중년층 운전자라면 실망할 확률이 높다. 옛날식으로 어느 명승지를 어떻게 찾아가야 하느냐를 염두에 두기보다는, '대한민국 지도 모양의 캔버스 위에 빼곡하게 적어 내려간 방대한 여행 카탈로그'로 정의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과거의 기준으로 이 책의 쓸모를 깎아내려서는 안 되겠다. 이 책은 현장에서 길을 찾는 내비게이션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기 전 거실에 펼쳐두고 수많은 선택지 중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내는 '여행 설계용 백과사전'으로 사용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정보의 과잉이 낳은 아쉬운 가독성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집요하게 전국 방방곡곡의 매력을 한데 긁어모은 제작진의 노고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리뷰어스클럽 #서평단모집 #네이버독서카페 #리뷰어스클럽서평단 #타블라라사 #에이든국내여행맴북 #KOREAMAPBOOK #이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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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국내여행 맵북 KOREA MAP BOOK ㅣ 에이든 가이드북 & 여행지도
이정기.타블라라사 편집부 지음 / 타블라라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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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펴놓고 여행 가기 전 설계용 백과사전으로 쓰기 좋은 지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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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독학이라는 세계 -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양필성 옮김 / 클랩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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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반백 년을 넘어 살았는데 뭔가 적잖이 허망하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인생의 후반전인 5학년에 접어들었고, 곧 6학년이 코앞이다. 그사이 세상은 눈이 멀 정도로 빠르게 변했다. 인공지능이 세상의 모든 질문에 그럴싸한 답을 '딸깍' 내어주는 시대다. 스마트폰을 몇 번 두드려 결과물을 뚝딱 만들어내는 젊은 세대를 보며, 나는 남들 다 안다는 재테크 정보나 세상의 트렌드 요약본을 부지런히 받아 적기에 바빴다. 그게 나이 먹어서도 뒤처지지 않는 유일한 '공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했다. 머릿속에는 단편적인 정보들이 넘쳐나는데, 막상 누군가로부터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받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였다. 내가 안다고 믿었던 것들은 정말 내 지식일까, 아니면 누군가 꼭꼭 씹어 뱉어놓은 찌꺼기일까. 내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듯한 묘한 소외감 속에 만난 책이 바로 일본의 철학자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독학이라는 세계》였다.

 

저자는 클릭 한 번으로 인공지능이 정답을 내어주는 시대에 인간이 왜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해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타인이 정해준 커리큘럼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을 '학습'으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오랜 시간을 들여 답을 찾아가는 능동적인 행위를 '독학'으로 규정하며 총 5가지 세계를 통해 독학자의 태도를 제시한다. 1장 '독학의 세계'에서 얕은 정보와 깊은 지식을 구분하는 것을 시작으로, 원전을 정면으로 읽어내는 쾌감(2장 책의 세계), 지식을 지혜로 바꾸는 인문학적 맥락(3장 교양의 세계), 사고의 도구로서의 언어(4장 언어의 세계), 그리고 권위에 의문을 품는 사고법(5장 질문의 세계)까지, 책은 온전한 나로 서기 위한 실천법을 촘촘히 다룬다.

 

저자는 책의 도입부터 나의 얄팍한 안일함을 따끔하게 꾸짖는다. "인간은 스스로 탐구할 때만 비로소 자신이 된다. 독학은 바로 그런 자신이 되기 위한 길이다." 그동안 내가 해 온 것은 배움이라기보다 세상이 정해놓은 정답을 수동적으로 쫓아간 '얄팍한 학습'에 불과했다.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젊은 시절의 총명함은 잃어버린 채, 당장 돈이 되고 이득이 되는 정보만 수집하며 늙어가고 있었다. 삶에 배어들지 않은 얕은 지식을 박식함으로 포장하려 했던 기억들이 스쳐 가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특히 요약본에 의존하지 말고 어려운 원전을 정면으로 돌파하라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철렁했다. 언제부턴가 두꺼운 고전보다는 유튜브의 '10분 요약 영상'이나 블로그의 '3줄 요약'을 먼저 찾으며 책 한 권을 다 읽었다고 자신을 위로하곤 했다. 저자는 핵심만 빨리 알려고 하는 '요약 중독'이 인간의 사고 경로를 망가뜨린다고 강력히 경고한다. 답이 바로 나오지 않더라도 며칠이고 몇 주고 스스로 고뇌하며 책의 행간을 읽어내는 일, 그것이 굳어가는 뇌를 깨우고 단단한 내면을 만드는 '진짜 공부'라는 지적은 매서우면서도 해방감을 준다.

 

50대에 시작하는 독학은 시험을 치르기 위한 것도,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롯이 나라는 주체를 지키고 남은 생을 나다운 관점으로 살아가기 위한 '존엄의 투쟁'에 가깝다. 종교, 역사, 철학을 넘나들며 지식을 지혜로 바꾸고, 익숙한 상식에도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 노트에 적어 내려가는 삶. 비록 인공지능보다 속도는 느릴지언정, 질문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모르는 상태를 견디며 묵묵히 나아가는 용기야말로 중년의 삶에 품격을 더해주는 진짜 배움의 길일 것이다.

 

이제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동향과 흥미 위주의 책보다는 그동안 어렵다고 피해 왔던 고전 한 권을 집어 들려 한다. 남들이 요약해 준 정답의 세계에서 걸어 나와, 거칠고 아득하지만 짜릿한 '나만의 독학이라는 세계'로 첫발을 내디딘다. 삶의 후반전, 시시하게 저물지 않기 위해 오늘부터 기꺼이 진짜 독학생이 되어볼까 한다.


#클랩북스 #독학이라는세계 #배우고익히기 #삶을위한공부 #계몽 #네가진짜로원하는게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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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발을 담근 채 ㅣ 독고독락
이새벽 지음, 김승아 그림 / 사계절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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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여고생 '이연'은 과거 친구들에게 심한 따돌림과 배신을 당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세상에 '진짜'는 없으며 모든 관계와 감정은 '가짜'일 뿐이라고 믿으며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지낸다. 그러던 중 이연은 학교 도예부에서 '성빈'이라는 남학생을 만나게 된다. 흙을 어루만지는 성빈의 섬세하고 다정한 모습, 그리고 묵묵히 곁을 내어주는 태도에 이연은 점차 마음을 열게 되고 결국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성빈은 이연의 고백에 충격적인 진실을 털어놓는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라는 것이다. 성빈은 그 증거로 자기 손을 물에 푹 담근 채 보여준다. 오랜 시간 물에 발이나 손을 담그면 피부가 쭈글쭈글해지는 인간과 달리, 성빈의 손은 아무런 변화 없이 매끈하고 늘씬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연이 성빈의 정체에 충격을 받을 틈도 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엿듣던 누군가가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연은 성빈의 정체가 학교 전체에 소문나 그가 배척당할까 봐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소설은 정체가 탄로 날 위기에 처한 안드로이드 성빈과 그를 지키고자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비겁함과 마주하게 되는 이연의 내면을 통해 진정한 '인간성'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은 겉보기엔 안드로이드 소년과 인간 소녀의 풋풋한 성장 로맨스 같지만, 그 이면에는 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서늘한 경고가 숨어 있다. 특히 안드로이드가 겉보기에 인간과 완벽하게 흡사해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혼란과 문제점들을 상상해본다.

 

가장 먼저 대두되는 문제는 인간관계와 감정에 대한 근본적인 혼란과 신뢰의 붕괴다. 이연이 성빈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외형과 행동 양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계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깊은 감정을 내어주었다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이 느끼는 배신감과 자괴감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이는 타인에 대한 의심으로 번져 향후 인간 사회 전체의 관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릴 위험을 경고한다.

 

또한, 완벽한 안드로이드의 존재는 인간의 심각한 열등감을 유발하고 '인간다움'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든다. 작품 속 성빈은 예술적 감수성이 필요한 도예를 훌륭히 해낼 만큼 섬세하며 육체적으로도 흠결 없는 존재다. 반면 이연을 포함한 인간들은 남을 따돌리고, 거짓말을 하며, 겁을 먹고 비겁해지는 등 수많은 결함을 드러낸다.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공감 능력과 감수성마저 훌륭히 모방하면서 물리적으로 완벽하기까지 하다면, 불완전한 인간은 비인간 앞에서 고유한 쓸모와 존재 이유를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인간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가 일상에 섞여 들면 인간의 내재적 폭력성과 배타성이 비인간을 향해 집중되는 혐오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연이 누군가 엿들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성빈이 '나와 다른 존재'임이 밝혀지는 순간 그에게 쏟아질 인간들의 무자비한 차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간과 지나치게 흡사한 기계가 오히려 인간 사회의 비합리적인 차별과 폭력성을 자극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완벽한 안드로이드 '성빈'을 하나의 거울로 삼아 이연의 지질하고 비겁한 진짜 인간성을 낱낱이 비춘다. 사람과 지나치게 흡사한 안드로이드가 초래할 가장 큰 비극은 그들이 너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완벽함 옆에 섰을 때 인간의 이기심과 비겁함 같은 결함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점 아닐까. 다행히도 인공지능이 날로 발전하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가는 인간성을 우려하는 목소리 역시 높아지고 있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 이면에는 가장 인간다워지고자 하는 본성의 외침 또한 존재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모순된 지점을 파고들어, 포기하고 실수하면서도 끝내 서로의 손을 맞잡으려는 인간만의 연대에서 희망을 찾는다. 기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넘어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인간다운 존재인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의 무게를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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