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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럭이는 세계사 - 인간이 깃발 아래 모이는 이유
드미트로 두빌레트 지음, 한지원 옮김 / 윌북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국기라는 단어에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형상은 국기 자체가 아닌,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주로 식사 시간에 즐겨 사용하던 플라스틱 재질의 튼튼하고 키 낮은 접이식 책상이다. 책상 윗면에는 한글 자모와 구구단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테두리를 돌아가며 세계 각국의 국기가 색색이 그려져 있어 누가 봐도 어린이 조기 학습용 다용도 식탁(?)이었다. 이제 성인이 되어 버린 아이들이 아직도 나라별 국기를 구별할 줄 아는지는 잘 모르겠다. 국기에 대한 개념이나 배경지식이 없던 취학 전 아이들에게 국기는 마냥 이쁘고 화려한 장식용 문양으로 보였을 거라는 짐작뿐이다. 우리는 간혹 TV에서 세계 각국의 국기를 줄줄 외우는 신동(주로 남자 아이)들을 보는데, 이 책의 저자도 아마 그런 부류였으리라 짐작된다. 이 책은 그 신동이 자라 국기 덕후가 된 저자가 세계 각국의 국기와 그 상징에 담긴 역사와 의미를 흥미롭게 풀어낸 작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국기들로부터 출발하여, 그 기원이 어떻게 다른 국기들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한다.
국기가 국가와 국민을 상징하고 그 자체로 정체성을 띠며 사용되기 시작한 역사적인 유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국기의 최초 유래는 주로 군사적 필요에서 비롯되었다.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흔히 보이듯, 고대로부터 전투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고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서는 깃발 사용이 필수적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로마 제국의 군기인 아퀼라(Aquila)로, 로마 군단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을 사용하였다. 이는 단순한 군기를 넘어 국가의 위엄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다양한 국가들에서도 이 전통이 이어져 국가의 공식적인 상징물로 정착하게 되었다. 또 다른 좋은 사례인 영국 국기 유니언잭은 잉글랜드의 성 조지 십자가, 스코틀랜드의 성 안드레아 십자가, 아일랜드의 성 패트릭 십자가 등 여러 왕국의 깃발이 통합된 형태로, 군사적 목적과 왕국의 통합을 상징하여 발전한 대표적 사례이다.

근대 이후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각 민족 국가는 자신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물로 국기를 적극 활용했다. 특히 18~19세기 독립운동과 혁명 운동의 영향으로 국기를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으로 채택하는 사례가 급증했다. 청홍의 음양과 팔괘를 사용한 우리 대한민국의 태극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이 필요하여 제작되었다. 한국인의 철학과 전통을 담아 국가 정체성을 표현한 것으로,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상징하는 깃발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오늘날 유럽 지역 다수의 국가가 비슷한 색상과 배열을 지닌 국기를 사용하고 있어 가끔 혼란스럽기도 하다. 예컨대 프랑스의 하양, 파랑, 빨강 삼색기는 이탈리아의 빨강, 흰색, 초록색 삼색기로 이어지고 다시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삼색기로 확산되었다. 각 장은 특정 국기를 중심으로 시작하며 그 국기가 어떻게 다른 국기들과 연결되는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유럽의 일부 인근 국가가 서로 비슷한 삼색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의 민족주의 혁명과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에 삼색기가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각각의 파랑-하양-빨강 색상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상징하며, 혁명의 이상을 담아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고 혁명 이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면서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아 삼색기를 채택하게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국기에는 또한 각 국가의 역사와 문화, 정신적 가치가 함축된 상징들이 담겨 있다. 별, 달, 태양, 독수리, 사자, 십자가, 귀족 집안의 전통 문장 등 독특한 문양들은 그 국가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먼저, 별은 희망과 독립, 통합 등을 상징한다. 미국의 국기에 등장하는 50개의 별은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의 단결을 의미하며, 유럽연합의 별들은 통합과 화합을 나타낸다. 또한 터키의 초승달과 별은 이슬람 문화를 대표하며 희망과 번영을 염원한다. 속칭 다윗의 별로 불리는 이스라엘 국기의 육각형 별은 두 개의 정삼각형이 서로 겹쳐진 모양으로, 위쪽은 하늘(신)을, 아래쪽은 땅(인간)을 상징하며 두 삼각형이 결합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결합, 조화, 균형을 나타낸다. 역사적으로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 식별용으로 사용한 고난의 상징이기도 하다. 달과 태양은 생명력과 지속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르헨티나 국기 중앙의 태양은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며, 유독 한국인에게 군국주의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일본 국기의 붉은 태양은 밝은 미래와 강한 국가 의지를 의미한다. 동물 중 독수리와 사자는 강력한 힘과 권위를 표현한다. 독일, 러시아, 미국 등 여러 나라의 문장에 나타나는 독수리는 강력한 국가의 권력과 독립성을 상징한다. 영국의 국장에 등장하는 사자는 용기와 왕권의 권위를 드러낸다. 십자가는 주로 기독교 국가에서 나타나며, 그리스, 스웨덴, 영국 등의 국기에 보인다. 이는 종교적 정체성과 더불어 역사적 전통을 상징한다. 귀족 가문의 문장은 역사적 권위와 지속성을 나타내며, 스페인 국기의 문장은 과거 강력했던 왕실의 권위를 여전히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국기를 통해 국민성을 짐작할 수 있을까? 사례를 들어보자면, 캐나다의 단풍잎은 자연 친화적이고 평화로운 국민성을 시사하며, 스위스 국기의 단순하면서도 뚜렷한 십자가는 국민의 중립성과 정확성, 간결성을 반영한다고 평가된다. 또한 브라질 국기에 등장하는 ‘질서와 진보’라는 문구는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와 국민의 열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 태극기의 태극 문양은 음양 사상에 기반한 우주의 조화와 균영을 상징하며, 건곤감리 4괘는 각각 천지인화를 나타내어 조화를 중시하는 상생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물론 독자들은 상징성을 전체의 일반화로 수용하기보다는 국민 다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로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이처럼 국기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가치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기호이며, 국민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기 6개월 전 우크라이나어로 출판되었으며 현재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지에서 출간되고 있다. 저자는 각 국기의 기원과 그 영향을 받은 다른 국기들을 연결 지어 설명함으로써 국기가 단순한 국가의 상징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집합체임을 보여준다. 책에 포함된 200개 이상의 다양한 사진 자료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특히 기존 국기의 대안 디자인을 소개함으로써 국기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탐구한다. 예를 들어, 캐나다 국기의 대안 디자인은 붉은 단풍잎이 두 개의 파란 띠 사이에 있는데 이들은 각각 대서양과 태평양을 상징한다. 이 책은 역사, 정치, 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뿐만 아니라 디자인과 상징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유익한 읽을거리다. 국기를 통해 세계의 역사를 탐구하고픈 이들에게 추천해 드린다.

저자 소개
저자 드미트로 두빌레트(Dmytro Dubilet)는 우크라이나의 금융 기술(Fintech) 기업가이자 전직 정치인으로, 디지털 혁신과 공공 서비스 개선에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85년생 만 40세로 런던 비즈니스 스쿨 MBA (2012) 졸업생이다. 아버지가 CEO인 프리밧방크(PrivatBank)에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최고정보책임자(CIO)로 재직하며 디지털 전환을 주도했다. 2015년, 공공 서비스의 디지털화를 통해 부패를 줄이고 행정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비영리 플랫폼인 iGov를 개발했고 2017년, 우크라이나 최초의 모바일 전용 은행인 모노뱅크를 공동 설립하여 900만 명 이상의 고객을 확보했다. 러시아와의 전쟁 이전인 2019년 올렉시 혼차루크 총리 내각에서 내각 장관으로 임명되어 약 8개월 정도 재직했다. 2020년, 런던에 본사를 둔 핀테크 기업을 설립하여 인도, 베트남, 중앙아시아 등 신흥 시장에서 디지털 은행을 운영하고 있으며 2023년 베트남 OCB 은행과 협력하여 디지털 은행인 리오뱅크를 출시했다. 2016년, 파이낸셜 타임스와 구글이 선정한 '뉴 유럽 100인'에 포함되었으며 우크라이나에서 15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보유한 영향력 있는 블로거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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