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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2월
평점 :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매일 돈을 벌고, 쓰고, 돈에 대해 고민하지만 정작 돈이 우리 삶과 내면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는 깊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안락함은 과연 어디에서 오며, 우리는 그 안락함의 대가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가? 이 책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 애써 외면하고 싶어 하는 물질, 계급, 그리고 특권의 모순을 저자 특유의 위트와 날카로운 자의식으로 파헤친 지적 탐구의 기록이다.

1. 위선과 물신주의로 포장된 자본주의의 풍경
저자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상류층 여성들의 슬럼가 탐방을 소환하며 자본주의적 위선의 민낯을 꼬집는다. 당시 유한계급은 빈민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며 이를 ‘교화’라 포장했고, 가난의 원인을 구조가 아닌 개인의 ‘도덕적 나태’로 치부했다. 이러한 위선은 현대 사회에서도 형태만 바뀐 채 작동한다. 한때 청춘을 위로한다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던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순식간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유도 이와 같다. 청년들이 마주한 참혹한 현실을 단순히 ‘마음가짐의 문제’로 치부하는 순간, 그 위로는 현실을 은폐하는 기만이자 정신적 학대가 되기 때문이다.
책의 여정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물과 인간관계의 왜곡을 다각도로 관찰한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타인 대신 물건과 관계를 맺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이케아의 저렴한 가구처럼 “이토록 값싸게 삶을 만들거나 폐기할 수 있다”는 자유 뒤에는 인간적 가치의 상실이라는 슬픔이 드리워져 있다. “집은 사는(live) 곳이지, 투자하는(invest) 곳이 아니다”라는 할아버지의 지극히 당연한 경고가 오늘날 아득한 이상향처럼 느껴지는 현실은 어떠한가.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공간조차 투기판으로 전락해 버린 지독한 역설이야말로 이 시대 주거 불안의 진짜 얼굴이다.
2. 노동의 소외, 그리고 통제권이라는 이름의 자유
이러한 물신주의 속에서 인간의 '노동' 역시 철저히 계급화되고 소외된다. 책은 '손(manus)'을 써서 일하지 않는 존재를 뜻했던 '매너(manners)'와 '젠틀맨(gentleman)'의 어원을 통해 육체노동을 하대해 온 오랜 편견을 짚어낸다. 팝 밴드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노래 ‘Money for Nothing’의 가사처럼, 땀 흘려 일하는 육체노동자 앞에서 기타나 퉁기며 버는 돈을 '거저먹는 돈'이라 칭했던 세태는 노동을 바라보는 씁쓸한 시선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치열하게 노동하는가? 사람들은 일에서 단지 '일용할 양식'뿐 아니라 '일용할 의미'를 찾고자 한다. 시키는 대로 기계처럼 일하기를 거부하며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응수했던 허먼 멜빌의 소설 속 필경사 바틀비의 비극은, 인간이 노동에서 자율성을 박탈당할 때 얼마나 쉽게 시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 이 우울한 저항은 오늘날 화장실 변기 뒤에 비자금을 숨기는 팍팍한 월급쟁이 가장들의 모습과도 묘하게 겹친다. 푼돈을 몰래 숨기는 행위는 대단한 일탈을 꿈꿔서가 아니라, 세상과 가족의 통제에서 벗어나 온전히 내가 쥐고 흔들 수 있는 작은 ‘숨구멍’과 ‘주도권’을 갖고 싶기 때문이다. 돈의 진짜 가치는 액수가 아니라 통제권이라는 이름의 자유에 있다.
3. 불평등의 역사와 구조적 착취
나아가 책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자산 불평등과 착취의 구조를 신랄하게 폭로한다. 16~17세기 유럽의 마녀사냥이 극한의 기후 위기와 기근 속에서 생산성 없는 약자(여성, 독거 노파)를 희생양 삼아 공동체의 부양 부담을 줄이려 했던 구조적 비극이었듯, 역사 속에서 빈곤과 약자는 늘 거대한 권력과 이기심의 희생양이 되어왔다.
여성의 지적 자유를 위해 투표권보다 ‘자기만의 방(물질적 토대)’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버지니아 울프의 통찰처럼, 고결한 이상이나 정치적 권리조차 경제적 독립 없이는 무력할 뿐이다. 오늘날 주식 시장의 과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얻는 투자 수익이나 안락한 은퇴 자금이 실상은 누군가의 노동 몫을 희생시켜 얻은 결실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착취 경제에 기대어 은퇴하는 셈"이라는 불편한 자각을 안겨준다. 결국 부의 불평등은 건강과 교육의 결핍으로 이어지며, 가난은 개인의 실패가 아닌 공동체가 떠안아야 할 뼈아픈 사회적 비용이 된다.
4. 안락함의 모순 속에서 ‘중산층’을 꿈꾼다는 것
저자는 자신이 쌓아 올린 지적 자산과 안락함이 백인 중심의 시각과 “돈에 관한 백인의 거짓말” 위에 세워졌음을 담담히 인정하며 특권의 시선을 스스로 해체하고자 시도한다. “나는 불편감을 놓고 싶지 않았고, 안락도 놓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그 모순의 산물이다”라는 솔직한 고백은 자본주의적 풍요 속에 발을 담근 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월급 액수보다 물가가 더 빨리 오르고 '중산층 붕괴'라는 경고가 쏟아지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끊임없이 '중간의 삶'을 열망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가 꿈꾸는 중산층이라는 지위는 거창한 부의 축적이나 호의호식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불행 앞에서 길거리에 나앉지 않을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돈을 보면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게 뭔지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우리가 진정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5. 추천의 말
자전거를 타려 핸들을 잡았을 때의 기민함이 자동차 운전대를 잡는 순간 사라지고 타인을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기게 되듯, 우리는 자신이 선 위치에 따라 너무나 쉽게 타인의 처지를 잊고 마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결국 이 책은 단순한 경제 서적이 아니라, 비정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우리가 지켜내야 할 인간적 존엄을 묻는 철학서다. 안락함의 달콤함을 누리면서도 부끄러움을 잃지 않으려는 '양심적 중산층', 그리고 매일 밥벌이에 시달리면서도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어 마음 한구석이 헛헛한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서늘하고도 따뜻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타인의 희생 위에 세워진 내 특권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사람, 그리고 물질의 풍요 속에서 잃어버린 '삶의 주도권'을 다시 거머쥐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펼쳐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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