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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어원 80일간의 세계 일주 - 지구를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1,000개의 영어 어휘가 저절로 쌓였다
폴 앤서니 존스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일반 사전을 나침반 삼아 떠나는 세계 일주
언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책은 언제나 가성비 최고의 여행 수단이다. 진짜 여행을 떠나기 힘들 때, 책 한 권만 펼치면 순식간에 낯선 이국의 땅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그 매력을 가장 극적으로 살려낸 작품이다. "지도나 지명 사전 대신, 일반 사전을 나침반 삼아 세계를 여행하면 어떨까?"라는 신선한 질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자는 지명에서 따온 영단어들의 발자취를 따라 유럽,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오세아니아, 남북미 대륙까지 65개국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여정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 책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은 단연 저자의 탁월한 말솜씨와 지적 유희다. 빌 브라이슨이나 마크 포사이스 같은 세계적인 대중 교양 작가들이 떠오르면서도, 과하거나 느끼하지 않은 특유의 경쾌한 유머를 보여준다. 참고문헌에 제시된 고전 속어 사전부터 현대 전문 사전까지 15권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썼음에도, 마치 친한 친구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구어체로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책을 읽다 보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너 이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 하며 배운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릴 정도다.

* 단어 하나에 담긴 역사와 인간의 아픔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우리가 무심코 쓰는 단어들에 얼마나 깊고 다양한 세계사가 숨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온 '포트와인', 벨기에 스파에서 유래한 '스파(Spa)', 체코 야히모프에서 나온 '달러' 같은 직관적인 단어들은 가벼운 몸풀기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은 영국군 사령관의 이름에서 나온 '라글란 재킷', 태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전 세계를 돌았던 창과 엥 벙커 형제에게서 비롯된 '샴쌍둥이' 이야기는 단어 하나에 얽힌 개인과 시대의 아픔을 묵직하게 보여준다.
원자폭탄 실험이 있었던 마셜 제도의 비키니 환초가 어떻게 수영복 '비키니'가 되었는지, 19세기 인도 데올랄리 주둔지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정신병 사태가 어떻게 일시적인 광기를 뜻하는 '둘랄리(doolally)'가 되었는지 추적하는 과정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흥미진진하다. 독일의 호전적인 태도가 싫어서 독일 멧돼지 사냥개가 '그레이트 데인(덴마크 개)'으로 국적을 바꿔야 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는 언어가 가진 정치적 속성까지 보여준다.

* '80개 단어'라는 즐거운 속임수와 출판사의 정성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는 '80개의 단어'라는 제목이 사실 즐거운 속임수라는 점이다. 저자는 하나의 목적지에서 연상되는 또 다른 단어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낸다. 각주마저 본문 못지않게 알차서 캘리코, 덤덤탄, 방갈로, 타마린드 같은 단어들까지 합치면 실제로는 160~200개 이상의 어원을 배우게 된다. 단어를 단순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어원 탐구의 방향을 뒤집어 지명에서 파생된 기원을 찾아가는 '발굴'의 대상으로 접근했기에 학습 효과가 배가된다.
특히 출판사 현대지성의 꼼꼼하고 완성도 높은 편집 기획이 빛을 발한다. 원서에는 없는 풍부한 시각 자료(컬러판 사진)를 공들여 대거 가득 채워 넣음으로써 지리적 배경과 단어의 맥락을 시각적으로 훌륭히 보완해 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자의 이해도를 대폭 높였을 뿐만 아니라, 표지 역시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한 단어들로 구성하여 자칫 진입 장벽이 높을 수 있는 책을 한층 친근하고 매력 있게 내놓았다.

* 아쉬운 점과 한계
물론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영국의 언어 연구자가 학술적·교양적 어휘 위주로 집필했기 때문에 영문학을 전공한 필자라 할지라도 실생활 활용 면에서는 체감도가 낮고 낯선 단어투성이로 느껴졌다. 지명과 어원을 매끄럽게 연결해 읽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독자 자신의 세계 지리에 대한 감각이 어느 정도 요구되기도 한다.
또한 챕터 제목과 실제 핵심 내용이 겉도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예를 들어 덴마크가 그레이트 데인의 어원이라면 굳이 코펜하겐을 제목으로 삼을 이유가 없고, '리마 증후군'을 다루는 장에서는 정작 스톡홀름 증후군 설명이 훨씬 많아 흐름이 끊기기도 한다. 무엇보다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편입 연도를 틀리는 등 일부 사실 확인이 누락된 점이나, 완독 후 전체 내용을 되짚어볼 수 있는 '어휘+의미' 형태의 표제어 색인 목록이 책 뒷부분에 따로 마련되지 않은 점은 엄밀한 지식을 기대한 독자에게 아쉬움을 남긴다.

* 그런데도 추천하는 이유
하지만 이러한 단점에도 이 책 본연의 매력을 가리지는 못한다. 애초에 이 책은 무거운 학술서가 아니라,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오마주로 런던에서 시작해 런던으로 돌아오는 쾌활한 여행기이기 때문이다. 자버니즘, 앰프스터 같은 생소한 단어부터 쥐라기, 칠면조, 보드빌까지 다채로운 단어의 성찬을 즐기다 보면 굳이 머리 싸매고 공부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세계 역사와 문화가 머릿속에 녹아든다.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짧은 비행, 혹은 휴가지에서 가볍게 읽을거리나 지적 자극을 찾는 이들, 그리고 언어가 가진 마술 같은 맥락에 빠져보고 싶은 모든 독자에게 기꺼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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