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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어떻게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가
노암 촘스키.네이선 J. 로빈슨 지음, 심운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6년 4월
평점 :

어떤 지식인의 이름은 그 자체로 거대한 권력을 향해 끊임없이 울리는 '경고음'이 되기도 한다. 백 세를 앞둔 노학자 노엄 촘스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이자 '미국의 양심'이라 불리는 그는 지난 반세기 넘게 미국 패권주의의 위선적인 가면을 벗기는 데 앞장서 왔다. 미국이란 나라는 늘 자신을 '세계를 구원할 선한 제국', ‘세계 질서를 구현할 빅 부라더’, ‘우주 최강 수퍼 파워’ 등으로 포장해 왔지만, 촘스키의 타협 없는 시선은 그 거대한 신화를 깨부수는 단단한 망치였다. 손자뻘인 로빈슨과 함께 펴낸 이 최신작은 평생 권력의 민낯을 고발해 온 그가 인류의 생존을 위해 던지는 묵직한 경고장이자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결정판이다.
이 책이 겨누는 가장 뼈아픈 비판의 과녁은 '미국의 외교 정책이 민주주의, 자유, 인권이라는 고귀한 이상에 뿌리를 둔다'는 맹목적인 믿음이다. 미국의 팽창주의를 두둔하는 이들은 미국이 다른 나라에 입힌 막대한 피해를 두고 '선의에서 비롯된 안타까운 부작용'일 뿐이라며 변명해 왔다. 그러나 두 저자는 방대한 사료를 교차 검증하면서 이 모든 것이 철저히 꾸며진 기만임을 폭로한다. 미국은 건국 초기 잔혹한 원주민 학살로 이른바 '명백한 운명'을 실현했고, 20세기에는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곳곳에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일구려 한 나라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부의 온건한 토지 개혁을 무너뜨리고,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독재 정권의 학살을 든든히 뒷받침한 일이 바로 그 증거다.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숱한 무력 개입에서 미국의 이익에 거슬리는 다른 나라 국민은 언제든 짓밟아도 좋은 '부수적 피해'쯤으로 취급당했다.
미국의 이중성은 국제법을 대하는 태도에서 '내로남불'의 극치를 드러낸다. 다른 나라의 국제법 위반에는 발 벗고 나서서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전쟁 범죄를 처벌하는 국제형사재판소(ICC) 가입을 거부하고 유엔 헌장조차 서슴없이 어긴다. 비밀리에 자금과 무기를 대주며 다른 나라 정부를 무너뜨리고 암살을 주도해 온 행태는, 거꾸로 자신들이 당했다면 곧장 전면전의 사유로 삼고도 남았을 명백한 범죄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민주당이나 공화당 가릴 것 없이 미국의 지배층이 군산복합체와 거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이 파괴적인 제국주의를 수십 년 동안 묵인하고 합의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전 세계 시민은 물론이고 미국의 평범한 대중조차 막대한 세금을 갉아먹는 이 끔찍한 정책들을 묵인하는 걸까? 책은 그 이유를 권력자들의 '동의의 조작(Manufacturing Consent)'이라는 틀로 설명한다. 기밀 분류, 내부 고발자 기소, 언론을 동원한 교묘한 선전으로 대중은 진실에서 철저히 차단된다. 결국 정부에게 길든 대중은 복잡한 국제 정치를 엘리트의 몫으로 떠넘긴 채, 자신을 '일밖에 모르는 꿀벌'로 전락시키고 만다.
이러한 비판적 통찰은 지나간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실존적 위기와 곧장 이어진다. 요즘 우리는 연일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끔찍한 뉴스를 마주하고 있다. 미국 행정부가 이스라엘 극우 정권과 한 몸처럼 움직이며 이란과 주변국에 대규모 폭격을 퍼붓는 동안, 중동 지역은 당장이라도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질듯한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의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아이들의 목숨이 스러지는 비극 앞에서도, 미국은 "테러리스트로부터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선택"이라는 변명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일찍이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이스라엘이 없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라고 한 발언은, 미국의 정책이 인도주의가 아니라 철저한 지정학적 패권 야욕 위에 서 있음을 드러낸 서늘한 자백이었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부끄럽고 기괴한 국내 현실로 향한다. 국내 정치 현안을 다루는 집회 현장에서는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진풍경이 종종 펼쳐진다. 국내 문제를 외치면서 뜬금없이 성조기를 흔들고, 심지어 중동에서 민간인 학살을 벌이는 이스라엘의 국기마저 신성한 부적인 양 휘두르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대한민국 시민으로서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짓밟는 패권국을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이 기이한 풍경이야말로 '동의의 조작'이 우리의 정신을 얼마나 무섭게 지배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증거다. 이들은 언론과 권력이 빚어낸 '미국과 이스라엘은 절대 선, 거기에 맞서면 악'이라는 위험한 흑백논리에 갇혀 억울하게 죽어가는 다른 나라 아이들에게 공감하는 능력마저 잃고 말았다.
이러한 정신적 빈곤과 맹목적인 숭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올바른 역사의식'을 세우는 일이다. 과거의 제국주의 침략이 오늘날 어떤 명분으로 모습을 바꾸어 다시 나타나는지 꿰뚫어 보는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야 한다. 제대로 된 역사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시위 현장에서 남의 나라 국기를 흔드는 기형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유력하다는 정치인이 이렇다 할 명분도 없이 강대국을 찾아가 고개를 조아리는 행태를 '애국'이나 '외교'로 착각하기 쉽다. 역사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강자의 부당한 폭력 앞에서 당당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촘스키와 로빈슨은 제국주의적 욕망을 내려놓고, 대화와 국제법 존중이라는 '진짜 외교'의 길로 돌아오라고 일갈한다. 인권을 짓밟는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고 기후 재앙과 핵전쟁의 위기 앞에서 전 세계가 진심으로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 책은 단순히 지나간 역사를 들추려고 쓴 책이 아니다. 힘 있는 자들이 빚어낸 달콤한 거짓말에 속지 말라는 뼈아픈 경고장이자, 강대국의 환상에 젖어 있는 우리의 무지를 내리치는 죽비다.
저명한 석학들의 신랄한 비판을 받으며 한 나라를 떠받치는 정체성과 역사적 서사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 책을 읽어내려면, 지적 위기감과 불편함에 당장이라도 책을 덮고 싶은 충동을 견뎌내야 한다. 그럼에도 이 방대하고 치밀한 서사를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수십 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세계 곳곳에서 되풀이되는 비극의 뿌리를 통찰하는 안목을 얻게 된다.
화려한 명분과 선전 뒤에 숨은 추악한 진실을 직시하고 인류의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거대한 기만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미국 예외주의'라는 치명적인 허구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억울하게 희생되는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평화와 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깨어있는 세계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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