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리기 인류 - 인류학의 퓰리처상 ‘마거릿 미드상’ 수상작
마이클 크롤리 지음, 정아영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9월
평점 :

요즘 우리 주변에서 달리기는 취미를 넘어 하나의 생활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기록을 인증하고 루틴을 공유하며 함께 달릴 사람을 모으는 일이 낯설지 않고, 주말마다 크고 작은 대회가 열리며 도시의 리듬 자체가 달리기에 맞춰 움직이는 듯한 순간도 잦다. 이제 달리기는 “왜 달리느냐”보다 “어떻게 오래, 더 잘, 더 즐겁게 달리느냐”라는 지속의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이 책은 이런 흐름을 흔히 기대하는 달리기 서적과는 다른 각도에서 비춘다. 훈련법이나 기록 향상 요령을 정리한 안내서가 아니라, 세계 장거리 달리기를 사실상 지배하는 에티오피아 선수들의 삶과 감각을 내부에서 관찰한 생생한 기록이다. 달리기를 ‘기록의 언어’가 아니라 ‘문화의 언어’로 읽게 만드는 책이다.
책의 출발점은 단순하다. 세계 주요 마라톤 대회에서 케냐와 에티오피아 선수들이 늘 선두를 차지하는데, 그 압도적 강세는 어디서 오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를 위해 저자 크롤리는 인류학자로서 15개월 동안 아디스아바바에 머물며 선수들과 함께 먹고 자고 훈련한다. 그는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국제 수준의 러너이기에, 관찰자의 거리감과 달리는 몸의 감각을 함께 지닌 채 현장에 들어간다. 새벽 3시 도심 러닝부터 숲 훈련, 산지 캠프와 지역 대회까지 직접 몸을 보탠다. 이 책이 기록 향상서와 갈라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독자는 숫자와 프로그램이 아니라 달리기가 한 사회 안에서 어떤 믿음과 규칙, 감각으로 구성되는지를 먼저 만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잘 달리는 비결’을 내심 기대하는 독자의 욕망을 교묘히 비껴간다는 것이다. 한국의 러너라면 페이스 전략, 심박 구간, 인터벌, 영양 관리 같은 과학적 용어에 익숙하다. 데이터 기반 훈련이 달리기 문화를 확장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크롤리가 마주한 에티오피아의 달리기는 그런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힘들이 작동하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유럽에서는 운동 능력을 개인 내부의 잠재력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지만, 에티오피아에서 ‘에너지’는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것으로 이해된다. 공유되고, 흘러 다니며, 때로는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인식은 곧 훈련 방식으로 이어진다. 혼자 달리기는 건강에 좋지만 변화는 함께 달릴 때 일어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간다. 대열에서 선두를 번갈아 맡는 행위는 단순한 로테이션이 아니라 타인의 부담을 대신 짊어지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의 발을 따른다”는 말 역시 기술적 드래프팅을 넘어, 타인의 기세와 리듬을 받아 달리는 행위로 읽힌다. 달리기가 개인의 의지와 체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들의 언어로 구체화된다.
이 대목은 한국의 달리기 문화와도 맞닿아 있다. 요즘 크루 러닝이 늘어나는 이유는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함께 뛰면 페이스가 안정되고,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되며, 초보자도 달리기의 언어를 더 빨리 배운다는 경험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 기록보다 과정이 오래 남는 날의 충만함,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받쳐주는 집단적 리듬이 달리기에 재미를 붙인다는 사실을 많은 러너가 체감한다. (사실 신호가 꺼져가는 횡단보도조차 뛰어 건너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런 표현을 하자니 참 멋쩍다) 이 책은 이런 경험을 단순한 동기부여가 아니라 문화적 실천으로 해석하며, 함께 달리기가 변화를 만들어내는 방식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환경을 대하는 태도도 인상적이다. 에티오피아 러너들에게 장소는 배경이 아니라 거의 동료에 가깝다. 특정 장소를 찾아가며 “공기가 특별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고도나 산소 같은 물리적 조건이자 그곳의 분위기와 몸의 감각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그들은 일부러 험한 지형을 찾아 속도를 늦추기도 하고, 재미를 위해 그런 길을 택하기도 한다. 숲에서는 지그재그로 달리며 나무 아래를 숙여 지나가고, 선두가 울퉁불퉁한 땅을 고르기도 한다.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다”라는 코치의 말은 이 책의 정서를 압축한다. 달리기는 숫자로 관리되기도 하지만 몸과 타인, 장소가 엮여 만들어지는 경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감각은 한국의 달리기 문화에서도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같은 거리를 달려도 강변, 도심, 트랙, 산책로는 전혀 다른 몸의 반응을 만든다. 대회 역시 코스가 곧 이야기이고 장소가 곧 경험이다. 이 책은 “어디서 뛰느냐”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달리기의 리듬과 태도를 형성하는 조건임을 설득한다.
또 하나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달리기는 과학인가, 예술인가”이다. 데이터와 장비는 훈련을 분명 효율적으로 만들지만, 숫자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에티오피아 러너들이 중시하는 것은 경험으로 체화된 감각과 몸이 먼저 아는 지식, 그리고 때로는 합리로 설명되지 않는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다. 성적이 좋지 않았던 선수가 “신은 내가 준비되었을 때를 안다”고 말하는 장면은 승패와 기록 중심의 시각을 흔든다. 이는 한국의 달리기 문화가 기록과 인증에 지나치게 매달릴 때, 달리기가 삶을 확장하는 통로인지 아니면 소진의 장이 되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다고 에티오피아 러너들을 낭만화하지는 않는다. 순위에 들어 상당한 금전적 보상을 받는 성공하는 소수와 달리 다수는 흩어지고 멈춰 선다. 저자는 그 현실을 끝까지 정중하게 바라보며 하나의 정답으로 꿰어 맞추지 않는다. 달리기 역시 숫자와 원리로만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서사의 방식으로 보여주기에 이 책은 더욱 믿음직하다.
달리기 유행이 유행을 넘어 문화로 남기 위해서는 깊이가 필요하다. 기록과 감각, 혼자 달리기와 함께 달리기, 효율과 의미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 이 책은 그 균형의 방향을 조용히 가리킨다. 달리기는 개인의 성취이자 공동체의 리듬이며, 과학이자 설명되지 않는 믿음을 품은 행위다. 에티오피아 러너들의 세계는 그 복합성을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다.
“흔히 공동체의 에너지는 개개인의 에너지를 합친 것보다 크다고 말한다. 에티오피아의 달리기 문화가 그랬다. 선수로서의 삶에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있기에, 에티오피아 달리기의 최정상에 오른 선수들이 그토록 압도적 기량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서로의 발을 따라 뛰고, 모범을 보고 배우거나 직접 부딪히며 익히는 과정에서 최고 수준의 달리기를 가능케 하는 건, 관리와 규율은 물론 그 바탕에 있는 호기심과 모험심이었다.” (380쪽)
결국 이 책은 “동아프리카 선수들은 왜 강한가”라는 질문에 시원스레 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달리기를 이루는 몸, 관계, 장소, 믿음, 불확실성이 어떻게 얽혀 하나의 문화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더 빨라지기보다 더 깊게 달리는 법을 묻는 이 책은, 지금 우리의 달리기 열풍이 삶의 문화로 남기 위해 필요한 질문을 독자에게 조용히 건넨다. 답은 각자의 달리기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달한권할만한데 #온라인독서모임 #서해문집 #달리기인류 #달리기열풍 #인류학과러닝 #마거릿미드상수상작 #이제부터나도달려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