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영혼
조지 엘리엇 지음, 박희원 옮김, 김선옥 해설 / 아고라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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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면, 정작 사람을 안다는 감각이 오히려 흐릿해질 때가 있다. 말은 자주 섞지만 속은 쉽게 드러내지 않고, 관계는 이어져도 일정한 거리가 유지된다. 때로는 너무 정확히 알지 않으려는 태도, 적당히 모르는 척하는 기술이 관계를 굴리는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조지 엘리엇의 벗겨진 베일(The Lifted Veil)(1859)제이컵 형(Brother Jacob)(1864)을 한 권으로 묶어 읽는 경험은 낯설지 않다. 두 작품은 겉으로는 결이 달라 보이지만 끝내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진실을 너무 많이 알아도 사람이 부서지고, 진실을 끝까지 피하려 해도 사람이 망가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진실이냐 거짓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버티느냐에 있다.

 

벗겨진 베일에서 베일은 감춰진 비밀을 덮는 천이라기보다 사람 사이를 버티게 하는 얇은 막, 관계의 완충재에 가깝다. 누군가를 완전히 알 필요도 없고, 끝까지 알아내는 일이 늘 좋지만은 않다. 우리는 대개 상대의 표정과 말투, 말의 결을 보며 아마 이쯤이겠지하며 선을 긋고, 그 선 덕분에 관계는 굴러가며 생활은 유지된다. 주인공 래티머는 어느 순간부터 남의 마음이 읽히는 듯한 능력을 갖게 되는데, 그 능력은 특별함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그를 고립시키는 재난으로 작동한다. 래티머가 보게 되는 것은 영웅적인 진실이나 숭고한 인간성의 핵심이 아니라 상대가 계산하는 순간, 무심한 위선, 자신을 합리화하는 습관, 남을 깎아내리면서도 죄책감은 최소화하려는 마음, 사소하지만 정확히 날카로운 잔인함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특별히 악한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더 무섭고, 그래서 더 피하기 어렵다. 래티머의 세계에는 여백이 없다. 이해는 보통 저 사람도 그럴 사정이 있겠지같은 상상력과 여백 위에서 자라지만, 그는 늘 정답을 먼저 본다. 그 결과 관계는 깊어지지 않고 오히려 부서지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가능성은 점점 좁아진다.

 

이 작품이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기대어 살던 문장을 정면에서 흔들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면 자유로워진다는 말은 멋있지만, 실제 삶에서 진실은 해방보다 피로와 마비로 이어질 때가 많다. 래티머가 더 많이 알게 됨으로 얻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무력감이다. 남의 속마음을 알수록 친밀해지는 게 아니라 견디기 어려워지고, 미래를 어렴풋이 예감할수록 선택지가 좁아지고 선택의 의미가 사라진다. 결국 엘리엇은 진실은 언제나 선물인가, 혹시 어떤 진실은 알지 않음덕분에 인간을 인간답게 붙들어 두는 것은 아닌가를 묻는다.

 

반면 제이컵 형은 분위기가 훨씬 가볍고 현실적인데 그래서 더 씁쓸하다. 주인공 데이비드 포는 더 나은 삶을 원하지만 그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이 문제다. 그는 거짓으로 위장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로 삶을 꾸미는 데 익숙해진다. 여기서 거짓은 거창한 악행이 아니라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넘기기 쉬운 작은 타협에서 시작한다. 한두 번의 핑계, 체면을 위한 과장, 들키지 않을 것 같은 편법 같은 것들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곧 성격이 된다. 이 작품에서 삶의 고장은 폭발처럼 한 번에 터지는 사고가 아니라 천천히 녹이 슬어 무너지는 방식의 붕괴다. 무너지는 순간은 극적이지 않고 어느 날 문득 이게 내 삶이었나?” 하고 돌아봤을 때 이미 길이 너무 멀어져 있는 식으로 찾아온다.

 

제목 속 제이컵 형은 데이비드가 지우고 싶은 과거이자 숨겨두고 싶은 진실이며, 동시에 결국 돌아오는 부도수표다. 우리는 종종 과거를 정리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환경을 바꾸고 관계를 끊고 마음가짐을 새로 하면 정말 새사람이 될 것 같지만, 정리했다고 사라지는 것은 생각보다 적다. 특히 내가 만든 균열은 내가 어디로 가든 따라오고, 이 작품이 보여주는 응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벌이 아니라 자기기만이 내 삶을 안쪽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과정이다. 거짓은 당장 숨을 쉬게 해주지만 숨을 쉬는 방식 자체를 바꿔 버리며, 어느 순간에는 진실을 말할 능력뿐 아니라 진실을 감당할 체력까지 사라지게 만든다.

 

두 작품을 함께 읽을 때 더 선명해지는 것은 진실이 한 가지 얼굴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래티머에게 진실은 빛이 아니라 소음이며, 남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통찰이라기보다 침입에 가깝다. 반대로 데이비드에게 거짓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고, 자기기만은 잠깐 버티게 해주는 것 같지만 결국 삶 전체를 좀먹는 독이 된다. 하나는 과잉, 다른 하나는 회피로 망가진다. 방향은 반대인데 결과는 닮았다. 래티머는 타인의 마음을 너무 많이 알아서 함께 있을 수 없게 되고, 데이비드는 자신의 삶을 너무 많이 꾸며 결국 자기 자신과도 함께 있을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조지 엘리엇이 인상적인 지점은 어느 한쪽만 손쉽게 꾸짖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진실만이 구원이다라고도 하지 않고, “모른 척하는 게 현명하다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진실과 착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 균형이 깨질 때 삶이 어떻게 작동 불능이 되는지를 도덕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작동 원리처럼 차분히 드러낸다. 그래서 이 묶음이 남기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무겁다. 진실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겠느냐, 혹은 거짓으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를 묻는다.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의 진실을 모른 척하며 살고, 어느 정도의 거짓을 현실이라 부르며 버틴다. 문제는 그 선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선이 무너지는 순간이 언제인지이다. 엘리엇의 결정타는 그 무너짐이 대개 요란한 폭발이 아니라 조용한 붕괴로 온다는 점을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는 데 있다. 작품을 읽고 난 뒤에도 화려한 충격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찝찝함이 남는다. “나는 지금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너무 일상적인 얼굴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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