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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질서 - 의도를 벗어난 모든 현상에 관한 우주적 대답
뤼디거 달케 지음, 송소민 옮김 / 터닝페이지 / 2025년 12월
평점 :

이 책은 겉으로는 운명과 삶의 법칙을 이야기하지만, 읽고 나면 머리에 남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는 삶의 문제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문제를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심리요법 의사로 오랜 시간 사람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저자는, 운명을 속이려는 시도가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신화·역사·종교의 사례까지 끌어오며 “마지막 총결산에 이르면 결국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거창한 선언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책을 따라가다 보면 그 말이 신비주의적 위안이라기보다 삶의 패턴을 보는 관찰의 언어로 다가온다. 이 책이 말하는 ‘질서’는 우리가 무시한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회피할수록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그 무엇이다.
읽는 동안 동양의 음양(陰陽)을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의 세계는 선악을 재단하는 법정보다는 서로 반대되는 힘이 긴장을 이루며 균형을 만들어내는 무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음양은 “좋은 것/나쁜 것”을 가르는 도덕의 선이 아니라 낮과 밤처럼 상반된 요소가 함께 있어야 세계가 굴러간다는 감각이다. 책이 말하는 “대립의 법칙”도 바로 그 지점에 닿아 있다. 문제는 대립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대립을 부정하거나 한쪽만 고집할 때 더 비틀어진다.
큰 것이 없다면 작은 것을 생각할 수 없고, 낮은 게 없으면 높은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심지어 악이 없다면 선도 의미를 잃는다. 상대주의의 가벼운 구호라기보다 현실의 작동 방식에 대한 냉정한 진술로 읽힌다. 우리는 대립을 ‘처치해야 할 장애물’로 간주하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대립은 하나의 틀이다. 한쪽을 지워버리려는 순간 다른 한쪽도 함께 흔들리고, 그 흔들림은 결국 더 큰 혼란으로 돌아온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대립을 도덕의 문제로만 좁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음양에서 음이 양을 방해하는 악이 아니듯, 양 또한 음을 멸해야 하는 선이 아니다. 둘은 반대이면서도 서로를 떠받친다. 그래서 삶의 문제를 “한쪽을 없애는 게임”으로 만들면 해결이 아니라 더 큰 대가가 따라온다고 경고한다. 테러리스트를 제압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이 요구되는 역설 같은 장면들이 여기서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책이 반복해서 겨누는 대상은 “문제는 없애면 끝난다”는 태도다. 싸워서 제거하려 할수록 문제가 오히려 늘 수 있다고 말한다. 한 극을 제거하려는 집착은 그 극을 강화하고, 밀려난 것은 “그림자”가 되어 더 위험한 영역으로 숨어든다는 것이다. 이 설명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거대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우리가 자주 겪는 심리적 경험을 정확히 겨냥하기 때문이다. 억누르면 커지고, 덮으면 돌아온다. 그러니 저자의 조언은 “없애라”가 아니라 “보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책이 말하는 ‘질서’는 억압적 규칙이라기보다 회피할수록 더 강해지는 학습의 구조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항상 빛에만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은 반대로 움직여 평형을 유지하려 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이 주는 날카로움은 그것이 단순한 비관이 아니라 ‘긍정 강박’의 함정을 정확히 찌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밝은 것만 좋은 것”이라고 믿으며 어둠을 억지로 밀어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주 예상과 다르다.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거나, 겉으로는 긍정적인데 속은 불안으로 잠식되거나, ‘착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공격성을 낳는 식이다. 책이 말하는 그림자는 이런 방식으로 독자를 붙잡는다.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라”는 쉬운 처방을 주는 대신 긍정만 고집할 때 균형이 깨지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결국 필요한 것은 빛을 더 밝히는 일이 아니라 어둠까지 포함해 전체를 읽는 능력이라는 결론으로 수렴한다.
저자는 공명의 법칙을 통해 어떤 일에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관련된 사건과 사람을 연달아 만나게 되는 경험을 설명한다. <시크릿>에서 말하던 ‘끌어당김’과 닮았지만 이 책은 그 달콤한 결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공명은 작동하되 그 위에 대립의 법칙이 더 강하게 작동할 수 있다. 아름다움만 원하는 사람에게 자각하지 못한 그림자 문제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개입할 수 있다. 이 대목이 흥미로운 이유는 공명을 ‘소원 성취’의 언어에서 꺼내 성숙의 언어로 옮겨놓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가 아니라 “원하는 것이 불러올 반대편까지 보라”고 한다. 왜 공명이 안 되는지 불만스럽다면 그건 공명이 멈춘 게 아니라 내가 외면하던 반대편이 균형을 잡으러 온 것이다. 독자는 달콤한 위로보다 정확한 조언을 얻는다.
또 하나의 축은 “시작”이다. 저자는 “시작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며 씨앗과 알의 비유를 든다. 이 말은 ‘첫 단추’를 강조하는 교훈으로도 읽히지만, 책의 흐름 안에서는 더 넓다. 시작은 단지 출발점이 아니라 이후에 마주할 반작용까지 포함한 구조의 설계처럼 다가온다. 태극 문양에서 한쪽 안에 다른 쪽의 씨앗이 들어 있듯, 처음부터 완전히 순수한 한쪽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생겼지?”라고 묻기 전에 “처음에 무엇을 설정했지?”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책은 그 질문을 끈질기게 요구한다. 시작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나중에 생기는 문제를 우연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저자는 그것을 질서라고 부른다.
심층심리를 더 깊이 들어가면 종교의 세계가 나오고, 결국 선과 악 같은 대립으로 수렴한다. 그런데 그 끝에서 다시 대립을 넘어서는 가능성이 암시된다. 최종적으로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종교의 약속처럼 삶의 법칙 역시 단일성으로 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독자에 따라 과감한 도약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대립을 부정하지 말고 의식 위로 올려라—에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는 삶을 학교에 비유한다. 운명의 노크를 무시하면 더 세게 두드리고, 계속 무시하면 문을 부술 정도로 강해진다. 결국 배우는 방식은 두 가지다. 자발적으로 배우거나, 억지로 배우거나. 삶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회피는 더 큰 수업료를 요구한다는 뜻으로 이 비유가 남는다.
이 책의 장점은 삶을 단순한 낙관으로 정리하지 않는 데 있다. “좋게 생각하면 다 된다”로 끝내지 않고, 왜 그런 말이 자주 실패하는지(그림자, 반작용, 대립)를 구조로 설명하려 한다. 특히 공명을 말하면서도 “그 위에 더 큰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은 낙관의 피로를 느낀 독자에게 꽤 신선한 관점을 준다. 다만 책이 제시하는 법칙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삶을 정리해 주는 틀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틀이 지나치게 커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정답이라기보다, 내 삶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비추는 거울로 쓰는 편이 정신 건강에 더 이롭다. 음양이 세계를 완벽히 해석하는 공식이라기보다 변화와 균형을 읽는 렌즈인 것처럼.
결국 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는 말은 하나로 모인다. 삶은 ‘문제 제거’의 연속이 아니라 ‘대립을 인식하고 균형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것. 우리가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던 반대편은 불청객이 아니라 균형이 무너졌다는 신호이자 배움을 재촉하는 종소리일지 모른다. 운명을 신비화하기보다 삶을 더 냉정하고 정직하게 보라고 요구한다. 빛만 붙잡지 말고 어둠도 함께 보라고, 원하는 것만 말하지 말고 그 뒤에 따라오는 반대편까지 함께 감당하라고.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질문이 달라진다. “왜 내 삶은 늘 같은 자리에서 걸려 넘어지는가”가 “내가 회피해 온 균형은 무엇이었나”로 바뀐다. 이 질문의 전환 하나만으로도 책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한 셈이다.
삶의 문제를 ‘빨리 없애야 할 것’으로만 여겨왔다면, 일독을 권해드린다. 문제를 제거하기보다 어떤 균형이 무너졌는지를 묻게 만든다. 긍정, 끌어당김 같은 말에 지쳐 있거나 왜 자꾸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지 설명이 필요했던 사람에게도 유효하다. “안 되는 이유”를 도덕적 탓이 아니라 구조로 보여준다. 음양, 심리학의 그림자, 종교적 통합의 언어를 한 번에 엮어 읽어보고 싶은 독자라면 특히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다. 단, 이것을 ‘정답’이 아니라 ‘렌즈’로 들여다볼 때 가장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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