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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유어 달링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5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피터 스완슨의 『킬 유어 달링』은 스릴러가 독자를 붙잡는 가장 익숙한 갈고리를 과감하게 내려놓는다. 보통의 추리소설은 “누가 죽였는가”라는 수수께끼를 끝까지 숨기며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반대로 첫 장부터 독자가 이미 결론을 알고 출발하는 구조를 택한다. 그래서 독자를 몰아붙이는 질문도 바뀐다. “범인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되었는가”. 정체를 숨기는 대신 동기의 층위를 끝까지 파고드는 방식은 독자를 속이려는 반전보다 더 집요하고 더 불편한 방식으로 심리를 건드린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을 관계의 소설로 읽히게 만드는 힘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50대 부부 작가인 톰과 웬디 그레이브스가 있다. 겉으로 보자면 둘은 안정된 삶을 사는 중상류층 부부처럼 보인다. 집도 있고, 직업도 있고, 사회적으로도 “문제없어 보이는” 외형이 있다. 하지만 소설은 그 외형이 얼마나 쉽게 균열을 숨기는지, 그리고 그 균열이 얼마나 오래전에 시작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남편 톰은 술에 무너진 채 살아가고, 아내 웬디는 그의 말과 표정을 늘 경계한다. 둘 사이에 대화는 오가지만 진짜 정담은 없고, 함께 사는 시간이 있지만 서로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고립이 있다. 이 부부의 공기는 ‘싸움’보다는 ‘냉각’에 가깝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큰 사건이 없어도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 그 질식감을 이 작품은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러다 웬디는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중요한 건 그 결심이 어떤 격정적인 선언이나 거대한 광기로 포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장면이 가장 섬뜩한 이유는, 살인이 “특별한 악”이 아니라 “일상의 연장선”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악마가 씌어서가 아니라 지겨움과 혐오가 조금씩 축적된 결과로 살의가 만들어진다. 이 작품이 노리는 심리 스릴러의 핵심은 바로 여기다. 충격적인 장면 자체보다 그 장면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자연스러움이 더 무섭다.
이 소설이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방식 중 하나는 배경 장치다. 웬디가 톰을 밀어 떨어뜨리는 장소는 워싱턴 D.C. 조지타운의 ‘엑소시스트 계단’이다. 영화로 유명한 이 계단은 길고 가파르며, 소설 속에서는 단순한 랜드마크가 아니라 “살인을 가능하게 만드는 합리적 조건”이 된다. 집 안 계단으로는 부족했던 ‘길이’가 더 긴 계단을 향한 계산으로 바뀌는 순간, 살인은 충동이 아니라 계획으로 조립된다. 독자는 그 조립 과정이 놀라울 만큼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을 보며 불편해진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이 작품의 성취로 읽힌다. “이런 일이 소설이라서 가능한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렇게 만들어질 수 있겠다”라는 감각을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핵심 장치는 공간보다 시간이다. 소설은 부부의 결혼 생활을 역순으로 들려준다. 파국의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둘의 관계가 어떤 경로로 망가졌는지를 하나씩 벗겨낸다. 보통의 서사는 시간을 쌓아 올리며 인물의 변화와 원인을 설명한다. 반면, 이 소설은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면서 현재의 균열이 어떤 과거를 전제하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말하자면 시간을 “쌓는” 대신 “벗기는” 서사다. 독자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를 미래에서 과거로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현재의 혐오가 과거의 사랑과 닿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그래서 더 씁쓸하고 더 오래 남는다. 사랑이 단숨에 증오로 바뀐 게 아니라 사랑의 어떤 성분들이 서서히 변질되며 파국이 되었다는 걸 역순이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톰과 웬디가 작가라는 설정은 단순한 직업 배경이 아니라 관계를 좀먹는 방식 그 자체로 기능한다. 톰은 ‘위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 하지만 초고 앞에서 자멸한다. 완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그 무너짐은 술과 자기혐오로 연결된다. 웬디는 시인으로서 비교적 담담해 보이지만 그 담담함 안에는 현실을 계산하고 견딜 줄 아는 힘이 있다. 글쓰기는 이들에게 직업이면서 자존심이고, 동시에 수치심의 근원이기도 하다. 특히 톰의 미완성과 좌절이 결혼의 균열과 맞물리면서 부부 관계는 단순한 애정 문제를 넘어 자존감과 욕망, 실패의 감각이 뒤엉킨 전장이 된다. 이 설정 덕분에 독자는 두 사람이 “그냥 성격이 안 맞아서” 망가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결핍이 어떻게 서로를 파괴하는 구조로 굳어졌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남는 주제는 결국 비밀이다. 두 사람을 오래 붙들어온 것은 함께 공유한 비밀이지만, 결국 두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각자가 따로 감춘 비밀이다. 연애 초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해도 삶이 진행될수록 숨겨야 할 것들은 늘어나는 법이다. 문제는 ‘숨김’이 단순한 오해나 착각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 자체를 바꿔 버린다는 점이다. 죄책감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을 혼자 감당하려 드는 순간 관계는 고립된다. 결국 파탄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지는 사건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든 결과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차분하게 증명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의 살인은 “클라이맥스”라기보다 “결과물”에 가깝고, 독자가 진짜로 목격하게 되는 공포는 죽음이 아니라 사랑의 변질 과정이다.
물론 이 작품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역순 서사는 독자에게 강한 몰입을 주지만 동시에 어떤 독자에게는 템포가 느리거나 반복적으로 느껴질 우려도 있다. 또한 톰과 웬디는 사람 냄새가 난다기보다는 차갑고 불편한 현실감을 가진 인물에 가깝다. 그런데 이 점이 오히려 이 작품의 장점일 수도 있다. 스릴러가 ‘멋진 캐릭터’에 기대어 달리는 순간, 관계의 붕괴가 종종 낭만화되거나 과장되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볼 수 있을 법한, 그래서 더 불편한 민낯을 보여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정말 있을 법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 작품의 온도를 낮추고, 그 낮은 온도가 끝까지 서늘함을 유지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단순하면서 강렬하다. “끝까지 솔직했다면, 우리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소설 속 부부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독자는 읽는 내내 ‘저 부부’를 보다가, 어느 순간 ‘우리의 관계’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우리는 정말 서로에게 솔직한가, 아니면 솔직하다고 믿고 싶은가. 우리는 말하지 않은 것들을 언젠가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말하지 못한 채 관계의 구조를 바꿔 버릴까. 그래서 이 작품은 읽는 동안의 재미도 있지만 읽고 난 뒤의 잔상이 더 강하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반전으로 독자를 속이기보다 역행하는 시간과 심리의 층위로 독자를 끌고 가는 소설이다. 살인의 충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랑이 변질되는 과정이며, 죽음보다 더 불편한 것은 함께 살면서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고립이다. 스릴러의 외피를 썼지만 결국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범죄’보다 ‘관계’다.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냐”에 매달리게 만드는 흡인력, 그리고 비밀과 죄책감이 관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주는 힘 덕분에 심리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특히 결혼/연애의 균열, 말하지 않은 것들의 무게, 관계의 피로가 폭발로 바뀌는 과정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소설은 꽤 오래 마음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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