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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ㅣ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4
게리 토머스 지음, 이우진.김자운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12월
평점 :
영국의 교육학자 게리 토머스는 교사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을 연구해온 학자다. 버밍엄대학교 명예교수로 소개되기도 하는 그는 포용교육과 특수교육을 다루는 한편, “교육 연구가 무엇을 측정하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같은 방법론적 질문까지 함께 붙들어 왔다. 교육을 이상론으로만 띄우지 않고, 제도와 현실의 문제로 끝까지 끌어안아 온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현장을 아는 사람 특유의 감각이 있다. 교육을 말하되 학교를 미화하지 않고, 학교를 비판하되 교육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얇고 빠르게 읽히지만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다. 책이 집요하게 붙드는 핵심은 뒤표지에 적힌 한 문장으로 요약될 듯하다. “학교는 답을 전달하지만, 교육은 질문하게 한다.” 우리는 시험과 경쟁, 성과를 ‘교육’이라고 부르며 익숙해져 왔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정말 사람을 키우는 교육인지, 아니면 줄 세우는 선별 장치인지 스스로 묻는 일에는 서툴다. 저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교육은 왜 지금처럼 변했는가, 학교는 왜 좀처럼 변하지 않는가, 진보적 교육은 왜 번번이 실패하거나 왜곡되는가, 교육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더 날카롭게는 “나의 앎이 내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독자 앞에 내놓는다.
이 책의 힘은 교육을 좁은 의미의 ‘수업 기술’로 축소하지 않는 데 있다. 고대 그리스부터 21세기 교육정책의 흐름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 속에서 교육의 두 흐름, 곧 ‘형식주의 교육’과 ‘진보주의 교육’의 긴장과 충돌로 문제를 풀어낸다. 형식주의가 지식과 기술의 효율적 전수를 목표로 하며 교사 중심 수업, 시험, 규율을 중시한다면, 진보주의는 아이의 잠재력과 발견, 비판적 사고를 교육의 중심에 놓고 아동 중심·경험 중심의 학습을 강조한다. 문제는 학교가 이 둘을 충분히 소화해 내지 못한 채 어설프게 섞어 운영해 왔다는 점이다. 심리학의 성과가 진보적 교육에 힘을 실어줬음에도, 그 아이디어는 종종 표면만 차용되거나 입시 현실 속에서 ‘활동만 남은 형식’으로 굳어지기 쉽다. 반면 학교의 뼈대는 놀랄 만큼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토머스의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학교가 왜 더 시험에, 더 측정에, 더 경쟁에 포획되었는지까지 파고든다. 그는 심리측정학과 지능검사의 역사, 그리고 고부담 시험이 교육을 지배할 때 벌어지는 왜곡을 짚는다. 지능을 타고난 특성으로 보고 선별을 정당화했던 논리가 어떻게 교육 제도 안에 구조적인 분리와 차별을 고착시키는지, 그리고 정책 환경 속에서 학교가 성과 중심의 논리로 재편될 때 시험 결과가 학교의 평가와 생존을 결정하는 절대 척도가 되어 버리는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 결과 교육은 질문을 키우기보다 정답을 빨리 찾는 훈련으로, 성찰을 넓히기보다 성과를 증명하는 경쟁으로 쉽게 왜곡된다.
이 대목에서 책은 한국 독자에게 특히 불편하고도 정확한 거울이 된다. 우리는 아이들을 왜 이렇게 치열한 학습으로 내모는가. 그 성취는 과연 진정한 ‘성공’인가. 그리고 그 성과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가. 우리 교실에서 “점수 따기”는 교육의 목적을 밀어내고 교육의 언어 자체를 바꿔버렸다. 배움은 성장의 경험이라기보다 통과의례가 되고, 이해는 사치가 되며, 학생은 한 사람이라기보다 등급과 백분위로 설명되는 존재가 된다. 이 구조가 더 단단해지는 방식은 교실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수업이 끝나고 남는 질문보다 ‘정답률’과 ‘오답 유형’이 먼저 정리된다. 사고의 과정은 짧게 압축되고 요령과 속도가 실력처럼 취급된다. 수행평가조차 배움을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어떻게 하면 감점 없이 점수를 받을 수 있는가”로 재해석되기 쉽다. 루브릭은 성찰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안전한 점수 확보를 위한 점검표가 되고, 발표·토론은 생각을 확장하는 장이 아니라 ‘말문이 막히면 손해’라는 불안 속에서 형식만 남는다. 내신과 모의고사, 비교할 수 있는 수치가 곧 능력이라는 신호가 반복될수록 학생은 더 빨리, 더 정확히 맞히는 쪽으로 몸을 맞추게 된다. 사교육의 존재 방식도 이 왜곡을 강화한다. 학교의 바깥이 아니라 학교의 뒤편을 떠받치는 것처럼 굳어지면서 학교는 ‘교육하는 곳’이라기보다 ‘평가의 관문’으로 인식되기 쉽다. 학원은 학교 진도를 앞서가며 “미리 배워 두면 수업이 편해진다”는 논리를 만들고, 컨설팅과 자료 시장은 ‘평가에 최적화된 전략’을 거래한다. 그 결과 학교는 더 조심스러워지고 교사는 더 많은 기준표와 증빙 속에서 움직이며 학생은 더 촘촘한 경쟁의 레일 위에 올라선다. 공정과 효율을 말하는 관행이 실은 교육을 교육이 아니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경고가 그래서 더 크게 들린다.
그럼에도 저자가 인상적인 이유는 절망을 진단하는 데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반드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불편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교육자들이 학교를 더 나은 배움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는 점 또한 놓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의심했던 이반 일리치의 탈학교론, 프레이리의 문제제기 중심의 대안적 교육철학 같은 논의를 불러오며 ‘학교 밖의 배움’ 가능성까지 함께 상상하게 한다. 코로나19 이후 확산된 혼합 교육과 학습 네트워크 같은 흐름도 단순한 기술 낙관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의 보수성을 넘어설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결국 그는 교육의 목표를 다시 묻는다. 기업과 조직에 잘 순응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여야 하는가. 아니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변화와 정의를 이끌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어야 하는가. 혹은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발이 묶여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이 책을 좋게 본 것은, 교육을 둘러싼 논쟁을 ‘누가 옳다’로 단순화하지 않고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끝까지 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만 얇은 책의 숙명처럼 결론이 더 단단하게 정리되어 ‘닫히지’ 못하고 다소 급히 멈춘 듯한 느낌이 남을 수도 있다. 더 광범위한 사회학적 논의를 기대한 독자라면 갈증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국의 교육 현실을 생각하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부모에게 유효한 질문을 건넨다. 점수와 줄 세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져 교육의 목적을 말하는 순간조차 어색해진 지금, 이 책은 우리를 다시 질문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교실은 매일 답을 요구하지만, 교육은 매일 질문을 되찾는 일이라는 걸 이 얇은 책이 조용히 그러나 야무지게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