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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1979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작품에서 우리는 시간여행이라는 장르적 장치를 통해 노예제의 폭력이 현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체감할 수 있다. 오늘날 노예제도가 다행히 공식적으로나마 부정당하고 있지만, 바로 그해 연말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한 흑인 남성이 백인 경찰들에게 폭행당한 뒤 혼수상태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와 유사한 형태로 촉발된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은 LA 폭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2020년에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가 벌어져 2천만 명 이상이 참여한 바 있다. 노예에게 행해지던 사법적 폭력이 제도권으로 옮겨져 반복 자행되는 모습을 보였다. 반세기쯤 지나 2025년의 미국은 인권 의식이 훨씬 성숙해졌다지만, 그 성숙을 안정적 제도와 실천으로 고정하려는 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 소설은 1976년에서 앤터벨럼(남북전쟁 이전) 남부로 갑자기 이동하게 된 흑인 여성 다나의 이야기다. 그녀는 거실에서 어느새 강둑으로 옮겨왔는지 알지 못하고, 자신이 아예 다른 세기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다만,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으면 눈앞에서 붉은 머리 아이가 곧 익사할 거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다나는 주저 없이 물로 뛰어들어 아이를 끌어올리고 인공호흡으로 목숨을 구한다. 그러나 돌아보는 순간, 아이의 아버지가 들이댄 장총과 마주하며 방금 살려낸 생명이 자기 목숨값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죽임을 당할 거라고 확신하던 다나는 뜻밖에도 사라졌을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 케빈의 눈에는 그녀가 몇 초 동안 사라진 것처럼 보였고, 온몸이 젖고 진흙투성이가 된 채 돌아온 그녀의 말을 그조차 쉽사리 믿지 못한다. 다나 역시 자신이 겪은 일을 믿기 어려워하며,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질까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일은 다시 일어난다.
이번에도 위험에 처한 아이가 나타난다. 몇 해 전 강에서 구한 그 붉은 머리 소년보다 조금 더 자란 듯한 아이가, 이번에는 방안의 불타는 커튼 앞에 서 있다. 급히 불을 꺼 집이 통째로 타는 것을 막아 내지만, 앞서와 달리 위험이 지나갔다고 곧바로 현재로 돌아오지는 못한다. 곧 그 소년의 이름이 루퍼스이며, 강에서 구했던 아이가 몇 년 자란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아까와는 다른 주(州)에, 심지어 다른 시간—1815년—에 와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다나는 이 소년이 노예 소유주의 아들이자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족보에 조상으로 기록된 바로 그 루퍼스와 동일 인물임을 알아챈다. 어쩐지 그들은 혈연 이상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루퍼스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다나를 자신의 시간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듯했다. 그의 평생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며, 때로는 다나가 19세기에 오래 머물러야 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공상과학 장르의 작품답게 몰입감과 사유를 동시에 갖추었다. 현재 시점의 다나와 그녀의 삶을 길게 소개하는 대신(물론 뒤이어 남편 케빈과의 관계, 그리고 두 사람의 ‘인종 간 결혼’을 못마땅해하는 양가 가족에 관한 내용이 채워지긴 한다) 곧바로 과거로의 여정으로 뛰어든다. 다나는 잘 교육받은 사람답게 호감이 가지만, 사고를 달고 사는 자기 조상을 구하러 시간 속으로 계속 끌려가는 그녀의 처지는 안타깝고 답답하다. 다나는 현실적이고 너그러우며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인한 인물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욕구가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이 작품은 기술적으로는 시간여행 소설이지만 그것이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다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루퍼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초반에 드러난다. 하지만 루퍼스가 어떻게 그녀를 자신의 시간으로 끌어당기는지, 왜 하필 다나가 선택되었는지는 끝내 설명되지 않는다. 다나는 여러 차례 루퍼스의 목숨을 구하며 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만, 작은 변화가 현재에 어떤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는지, 이른바 ‘나비효과’를 본격적으로 탐구하지는 않는다. 물론 다나가 루퍼스의 딸 헤이거,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그 후손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염려하는 대목은 있다. 이야기의 진행 대부분은 과거에서 벌어지고, 다나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독자는 20세기 후반 흑인 여성의 시선을 통해 남북전쟁 이전 남부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면서 읽는 내내 속이 아릴 수도 있다.
첫 시간여행에서 총탄을 가까스로 피한 뒤 현재로 돌아온 다나는 깊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다시 과거로 끌려갈수록 경험은 더욱 가혹해진다. 그녀는 도망 노예가 채찍질 당하는 모습을 코앞에서 목격하고, 땀 냄새와 비명이 뒤섞인 폭력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한다. 노예 아이들이 서로를 경매에 부치는 흉내를 내며 노는 서늘한 ‘놀이’도 눈에 담는다. 작품 안에는 인종 비하, 폭력, 성폭력이 등장하며,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잔혹함이 숨김없이 그려진다. 시간여행과 허구의 인물이 등장함에도 이 작품이 독자에게 경각심을 주는 이유는, 그 폭력의 뿌리가 역사에 깊숙이 박혀 있고 작품이 야만적 인간 사회를 비추는 냉혹한 거울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노예제를 받아들이도록 사람을 길들이기가 이렇게 쉬운지 미처 몰랐다’고 다나가 케빈에게 건넨 이 한마디야말로 이 소설의 심장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이로써 사회 전반에 퍼진 태도가 어떻게 인종적 불평등을 강화하는지, 동시에 개인적 피해에서 멀어질수록 불의에 눈감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알게 해 준다. 과거에 잠시 발을 디딘 방문자에 불과한 다나조차 때때로 관찰자라는 느낌에 머문다. 하지만 백인 남편 케빈은 노예들의 처우가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다고 쉽게 넘기며, 그것이 이미 ‘충분히 끔찍하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루퍼스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그가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면 선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루퍼스는 사회가 주입한 가치관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부모에게서 배운 말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그럼에도 다나는 그를 좋아하고, 자신의 영향으로 그가 아버지처럼 잔혹해지지 않으리라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그는 끝내 폭력성과 이기심을 벗지 못한 채 비루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더구나 그와 그의 아버지에게 드물게나마 전적인 무신경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있어, 오히려 그 잔혹한 장면들이 한층 더 소름끼치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시간여행을 활용한 공상과학소설이지만 상당 부분은 과거를 들여다보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가는 사회에 관한 수많은 문제를 치밀하게 짜인 서사 속에 녹여냈고, 그 솜씨는 실로 뛰어나다. 노예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때문에 추한 모습과 잔혹함으로 가득 차 있어 어떤 이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어둡다는 이유로 선뜻 권하기 힘든 면도 있다. 그런데도 모두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허구라는 장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책과 텔레비전으로만 알던 적대의 시대 한복판을 온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한 젊은 여성의 흡인력 강한 서사이자, 사회—특히 인종 불평등과 그것을 떠받치는 구조—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노예제를 정면으로 파고드는 만큼 읽기 불편한 대목이 적지 않지만, 인간성의 최악을 주저 없이 드러내는 솔직함이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 많은 내용이 ‘상식’으로 알려져 있다고 해도, 저자가 다나의 시선을 통해 재배열한 풍경은 유독 강렬하다. 무엇보다 2025년 오늘에도 이 이야기가 여전히 비극적으로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 역사와 현재가 교차하는 이 서사를 통해 우리가 외면해 온 질문들을 정면으로 마주해보고, 이 한 번의 독서가 오래가는 사유와 작은 실천으로 이어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