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멘쉬 -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선언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어나니머스 옮김 / RISE(떠오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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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 역자는 이 책의 원전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Human, all too human>이라 밝히고 있다. 그는 정치와 종교, 사회와 철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한 날 선 비판으로 가득한 원전의 내용을 일반 독자가 읽기 쉽도록 순한 맛으로 다듬어 내놓았다고 설명한다. 니체 철학의 흐름을 살펴보면 이 원전은 말 그대로 결정적인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그전까지 예술과 음악의 무대 뒤에서 무겁고 조심스러운 비평을 쓰던 니체는 이 책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철학의 정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대의 거물이었던 바그너와 절연하고 정신적 방황을 겪던 시기에 이 책을 썼기 때문에 그 과정은 전혀 순탄치 않았다. 역설적으로 위기의 순간이 한 인간을 진정한 철학자로 밀어 올린 셈이다. 이후의 작품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안티크리스트도 모두 이 책을 씨앗 삼아 자라난 철학적 열매들이다.

 

무언가를 이루는 사람은, 삶이 고단하다고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고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길을 찾는다. 고민이 많다고 해서 당신이 약한 것은 아니다. 인생이 혼란스럽다고 해서 틀린 것도 아니다. 정말 약한 사람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p49. 정말 쉬운 길이 있을까?)

 

이 책은 형식부터 범상치 않다. 아포리즘, 즉 짧은 격언이나 단상으로 구성된 문장들이 마치 철학적 스냅사진처럼 나열된다. 때로는 상반되거나 모순적인 말이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건 단순히 말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하려는 배려(?)로 보인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 형식이지만, 니체는 그 틀 안에서 훨씬 더 자유롭고 공격적인 사유를 쏟아낸다. 말하자면 아포리즘은 니체 철학을 담기엔 조금 작지만 그만큼 응축된 진심이 느껴지는 그릇이다.

 

이 책은 자기 극복과 성장, 인간관계와 감정 조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등 113가지 조언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엮었는데, 영역별로 세분하자면 철학, 심리학, 예술, 정치, 종교, 가족, 문화까지 안 건드리는 데가 없다. 한마디로 전방위 조언 종합세트. 표현만 부드럽다 뿐이지 읽다 보면 어느새 정면으로 호되게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인데, 문제는 그게 굳이 부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니체의 날카로운 조언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기존 가치들을 갈아엎고 그 자리에 새로운 토대를 세우자는 제안에 가깝다.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신박하다. 예를 들면, 니체는 종교를 인간의 나약함이 낳은 허상이라고 본다. 신이 사랑이라 말할 때 그는 냉소한다. 기독교 도덕은 자연의 이치와 충돌하며 인간을 병들게 하는 체계라고 일갈한다. 플라톤이나 쇼펜하우어마저도 형이상학적 환상에 빠진 인물로 평가절하한다. 음악과 예술조차 그의 비판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그 틈에 형이상학적 믿음을 슬쩍 끼워 넣는다고 지적한다. 꽤 무례한 비평 같지만 곱씹어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남을 깍아내리지 않고도 충분히 빛나는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자시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남의 그림자를 지우려 애쓰지 말고, 스스로의 빛을 더 밝히는 데 집중하라. 결국 그 빛이 당신을 진정으로 높여줄 것이다.(p145. 타인의 성공을 비웃지 마라)

 

니체의 자유에 대한 시선도 흥미롭다. 그는 자유의지라는 개념 자체가 신화에 가깝다고 본다.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은 권력 의지라는 본능적 추동력에 이끌려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단지 지배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내적 에너지에 가깝다. 그 말인즉슨,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하려는 존재이며 그 본성 속에서 진짜 윤리를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사유는 이후 푸코 같은 현대 철학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권력이라는 말이 주는 인상을 제외하면 의외로 낭만적인 철학이다.

 

그리고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초인(Übermensch)’이다. 초인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이 책 이후에 나온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많은 사람이 초인을 어떤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쯤으로 오해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울퉁불퉁한 근육질과 삼각팬티에 망토 입고 하늘을 날며 악당들을 혼내주는 그런 마블 캐릭터가 아니다. 초인은 기존의 도덕과 관습을 넘어 자기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는 자율적인 인간이다. 그는 외부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내면에서 삶의 방향을 찾는다. 니체는 이 초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당대의 상투적인 가치관을 정면으로 부수려 했다. 이 개념은 영원회귀사상과도 맞물린다. 지금의 이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 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며, 그런 삶을 살아내는 존재가 바로 초인이다. 영원회귀는 단순한 순환론이 아니라 한순간 한순간을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에 가깝다. 초인은 그 명령을 내면화하고 실천하는 존재이다. 이런 초인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는 무한한 정보, 가치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만 실은 더 혼란스럽고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다. 니체는 그런 시대일수록 더더욱 자기만의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너답게 살아라.”라는 말이 철학의 이름으로 이렇게 진지하게 들린 적이 있을까? 하긴, 나답게 살기가 그리 쉬운 일이었으면 진작에 고민하지도 않았겠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남을 미워하기보다는 자기 삶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다. 누군가가 나를 싫어할까 하는 질문 대신, 이렇게 바꿔보자.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만큼 나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까. 아마 답은 거의 아닐 것이다.(p224. 악은 여유로운 자의 사치다)

 

물론 초인은 자주 오해받는다. 일부는 이를 독단적이고 공격적인 인간상으로 해석하지만, 니체가 말한 초인은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타인과의 조화를 무시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가능성을 밀어붙이는 존재이다. 무엇보다 두려움 없이 자신을 직면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세, 그것이 초인의 본질이다. 그러니 초인은 영웅이기 전에 참 인간이다. 사족이지만, 그런 점에서 최근에 바뀐 대통령이야말로 현실 세계에서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초인의 모형 아닌가 싶다. 자기 말을 실천으로 보여주던 그의 과거 행정 실적, 사법 탄압으로도 어쩌지 못한 그의 진실성, 국가의 미래 희망을 건설하기 위한 국민적 권력 위임에 대한 그의 생각 등을 듣고 판단한 결과이다.

 

또한, 니체의 철학은 개념 놀이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실질적인 삶의 태도를 묻는다. “그래서 너는 대체 어떻게 살 건데?”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니체의 문장을 계속 곱씹게 된다. 초인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매일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책임지는 삶을 통해 다가가는 목표이자 과정이다. 개인적으로 무신론자인 나는 니체가 종교를 해부하는 방식에 깊이 공감한다. 약간의 흥분과 함께 야릇한 쾌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예술가와 작가의 정신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그 날카로운 분석에 숨이 턱 막히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작고 얇아 손에 쥐기 편하지만 의외로 내용은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간결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전해주어 오히려 읽는 내내 긴장과 집중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니체가 철학자로서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한 순간을 담아낸 작품이다. 고전이라 불리지만 그 안에서 오늘의 우리를 마주하게 되고 익숙한 것들을 다시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삶의 태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그것이 이 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힐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니체가 단지 19세기의 철학자가 아닌 지금, 여기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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