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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 뇌과학과 신경과학이 밝혀낸 생후배선의 비밀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2월
평점 :
인기 있는 과학 서적은 마치 출퇴근 시간의 버스처럼 독자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요즘처럼 뇌과학 열풍이 뜨거운 시대엔, 이 책이 그 인기몰이 버스에 탑승한 것 같다. 저자는 인간의 뇌가 얼마나 유연한지, 그리고 우리 인간이 왜 이렇게 다재다능한지에 대한 놀랍고 재밌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비결은 바로 '생후배선(livewiring)', 즉 우리의 두뇌가 상황에 따라 즉석에서 배선을 갈아 끼우듯 자신을 재구성하는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두뇌를 컴퓨터 배선처럼 비유하는 감각은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물론 뇌가 '입력에 따라 변화하는 자기 적응 시스템'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새로운 것이 없다. 하지만 이 변화가 얼마나 빠르고 극적인지는 최근 들어서야 주목받고 있다. 뇌의 절반을 제거했음에도 정상적으로 성장한 어린 매슈부터 방의 조명 변화에 눈 깜짝할 사이에 적응하는 놀라운 사례까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심지어 언어 습득의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쳐버린 아이들이 이후 발달에 어려움을 겪는 안타까운 사례도 등장한다.
책의 중심 개념인 생후배선과 뇌 가소성은 둘 다 뇌의 발달과 변화에 관련되어 있지만, 적용 시점과 방식은 다르다. 생후배선은 어린 시절에 뇌가 외부 자극을 받아 뉴런 간 연결을 빠르게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이 시기에 언어나 운동 기능의 기반이 만들어진다. 반면 뇌 가소성은 평생 계속되어 학습과 경험에 따라 신경망이 계속 바뀌게 만든다. 특히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뇌 손상 후 회복 과정에서 중요하다. 한마디로 생후배선이 초기 설계라면, 뇌 가소성은 평생 업그레이드되는 펌웨어 업데이트 같은 셈이다. 책에서 제시한 7가지 요점은 뇌의 신비를 아주 재밌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1. 뇌는 필요에 따라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다.
어린 매슈는 심각한 발작으로 뇌의 절반을 떼어냈지만, 3개월 후엔 누가 봐도 뇌의 반쪽이 없다는 걸 눈치챌 수 없었다. 약간의 불편을 빼면, 뇌가 알아서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
2. 뇌는 어떤 감각이라도 처리할 수 있다.
1960년대 실험에서 한 시각장애인은 등에 달린 압력 장치로 시각을 대신했고, 이틀 만에 사물을 식별하기 시작했다. 등으로 보는 세상이라니, 참으로 신기하다.
3. 뇌는 어떤 신체든 작동법을 습득한다.
두 발로 태어난 개 페이스는 사람처럼 걷고, 팔 없이 태어난 양궁 선수 매트는 발가락으로 화살을 정확히 쏘는 신기록을 세웠다.
4. 뇌는 중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집중적으로 적응한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펄만의 뇌는 일반인과 확실히 다르다. 뇌도 중요하다고 느끼면 적극적으로 개조하는 모양이다.
5. 뇌는 우리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정보는 잠궈둔다.
1980년대 IBM 로고에 갑자기 빨간색이 추가됐다는 이상한 착각 사건이 있었다. 물론 로고는 변한 적 없었다. 사람들의 뇌가 너무 익숙한 이미지를 임의로 바꿔버린 것.
6. 나이가 들수록 뇌 가소성은 감소한다.
어린 나이에 뇌의 절반을 잃어버린 매슈는 회복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런 극단적인 적응은 어렵다. 뇌가 점점 덜 유연해지기 때문이다.
7. 오래된 기억은 최근 기억보다 더 강력하다.
1960~1980년대 출생한 사람들의 공감각 패턴이 당시 유명한 알파벳 자석 세트와 일치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평생 유지된 셈이다.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건 확실히 큰 불행이다. 그러나 만약 잃어버린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 흥미로운 가능성은 세 가지 중요한 문제를 낳는다. 첫째,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 기술 접근이 불균등하면 이미 존재하는 격차가 더 커질 수 있다. 둘째,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에 대한 정의가 흔들릴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셋째, 자아 정체성과 윤리적 동의 문제다. 특히 어린이들의 경우 본인의 동의 없이 기능 강화가 이루어진다면 윤리적 논란이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기존의 고정된 뇌 개념을 뒤흔들며 인간의 뇌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적응력이 뛰어난지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작품이다. 뇌를 단순한 회로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연결망’으로 설명하며, 우리가 학습하고 경험할 때마다 신경망이 재조직된다는 점을 생생한 사례와 실험을 통해 증명한다. 더불어 신경 가소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감각 대체 기술, 신경재활, 인간 인지 능력의 확장 가능성 등 현대 뇌과학이 제시하는 혁신적인 미래를 제시한다. 특히 뇌가 특정한 입력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고 지속적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생후배선의 특성을 지녔다는 점은 신경과학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교육, 의료 분야에도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뇌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뿐만 아니라 인간의 학습과 창의성, 그리고 미래 기술에 관심이 있는 모든 독자에게 필독서가 될 것이다. 우리의 뇌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적응하는 유기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가능성을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