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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중독 - 실패 혐오 시대의 마음
롤란드 파울센 지음, 배명자 옮김 / 복복서가 / 2024년 4월
평점 :

혹시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해 정부가 너무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면 어떡하지? 난로를 켜놓아 집에 불이 나면 어떡하지? 인생의 파트너를 잘못 선택하면 어떡하지? 우리가 늘상 입에 달고 사는 걱정거리가 있다. "만약에 ... 이면, 어떡하지?"라는 질문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상상하며 위험을 계산하는 마음의 방식이자 놀이이다. 노르웨이 룬드 대학교 사회학 부교수인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 대다수가 학습된 무능에 고통을 받는 정도를 넘어 집단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불확실한 삶을 견디는 능력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일례로 서구 세계의 어느 기차역에서 마주치는 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은 사람의 수는 지난 10년 동안 거의 20% 증가했으며, 불안과 우울증은 오늘날 세계보건기구(WHO)가 선정한 세계인의 건강 악화 원인 중 1위를 차지했다.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도대체 인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해졌고 생활 수준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전 세계 인구를 충분히 먹이고도 절반이 남을 정도로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 풍요로운 세상에 살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높아만 가고 '만약에 ...이면 어떡하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미국 역사가 모리스 버먼은 인간이 ‘역설’안에 산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개별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불안에 고통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139쪽)

매일 똑같은 해가 뜨고 지지만 모든 것이 똑같은 날은 단 하루도 없기에 불안은 인간의 타고난 특성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 덕분에 우리는 문명사회를 이루고 살게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문명이 발달할수록 불안의 크기와 깊이 또한 정도를 더해 간다. 불확실성을 분명히 해소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조차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에 잠에서 깰 때마다 내일 당장 세상이 망하면 어떡하냐는 걱정도 함께 시작되는 식이다.
예컨대 좀비 바이러스로 세상이 망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영화의 단골 소재이다. 이런 부류의 영화에서는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자기 집 정원에 벙커를 지어두고 세상의 종말에 대비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 행동으로 고통을 받기는커녕 멀쩡하며 오히려 이런 행동으로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러나 목숨은 보전할지언정 정작 문제는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무너진 사회적 기반이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이처럼 불안한 사회를 걱정이라는 대표적인 단어에 담아내고자 한다. 1부는 현재 우리가 불안해하며 사는 모습을 비추면서 걱정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며 2부는 불안과 걱정을 역사적 배경에서 고찰하고 마지막 3부는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대책을 묻는다.
노동이라는 주제는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노동 자체는 불안을 없앤다. 학창 시절부터 주입되는 사회적 메시지는 명확하다. 철저히 계획된 지루한 삶을 계속하면, 재정 및 지위 걱정을 잠재울 수 있다. (189쪽)
인간의 삶은 불안과 함께 시작된다. 일례로 지금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영아 사망률이 있다. 신생아의 20% 이상이 태어난 지 수 년 이내에 사망하는 시대의 생활상은 잘 상상되지 않는다. 그 뒤를 이어 천연두와 소아마비가 있고 굶주리는 삶이 기다리고 있다. 운 좋게 한두 해를 넘기고 살아남으면 그때 가서 정식으로 출생을 신고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 불안에서 벗어난 지 불과 70년 안쪽이다. 국민소득이 늘고 생활 수준이 높아져 선진국의 문턱에 이른 지금, 더 부유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으면 자살률이 줄어야 정상 아닐까? 역설적으로 국민총소득이 낮을수록 행복과 놀라울 정도로 일관된 상관관계를 보인다. 삶의 수준과 행복감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부의 재분배가 가장 불평등한 국가의 상위 10%가 평등한 국가의 하위 10%보다 더 많이 걱정하는 점을 꼬집는다. 그는 승자와 패자를 체계적으로 구분하고,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받아야 인생이 살 만하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걱정이 생긴다고 보았다. 영락없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 이야기 같다.

직장생활에는 규칙이 있고, 권위 있는 직업군에서는 특히 서로 정중하고 협조적이지만, 가정생활에는 스트레스, 카오스, 끓어오르는 갈등, 죄책감이 득실거리기 때문이었다. (203쪽)
직장인이라면 상당 부분 수긍할 만한 이야기를 해보자. 왜 휴일에 집 안에 머무는 것보다 출근하는 게 더 마음이 더 편할까? 가정에서는 책임과 권한의 경계가 불명확한 집안일이 늘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반면 직장에서는 비교적 모든 것이 분명한 편이다. 네 일 내 일이 구분 가능하고 권한도 매우 선명한 편이다. 해야 할 일이 있는 한편 일부러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 또한 그만큼 된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이와 정 반대편에 있는 게 집안일이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해봐야 티도 안 난다는 결정적인 흠이 있고, 직장처럼 휴일 출근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없다는 것도 문제이다. 직장이라는 안전지대로 도피성 출근하던 이유를 비로소 명확히 파악하게 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행동뿐이다. 그러므로 ‘가치있는 목표’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372쪽)

명확하고 열정적인 화법으로 쓰인 이 책은 불안의 문화적 변화와 역사적 진화에 대한 파노라마이자, 이 사회적 전염병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영감을 주는 행동 촉구이기도 하다. 마력(魔力) 해소에 대한 막스 베버의 생각, 불안을 완화하는 수단으로서의 아야와스카(향정신성 성분인 DMT가 함유된 식물로 만든 일종의 환각제) 체험 여행, 이념적 몽상이 아닌 위험 회피로서의 정치에 대한 미로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수백 건의 연구와 획기적인 조사, 가슴이 아플 정도로 솔직한 개인 인터뷰를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불안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집필하였으며, 쉽게 읽히는 문체를 사용했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다는 흔한 소리 대신, 걱정에 대한 일가견을 가질 수 있길 감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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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