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 어느 소년병의 기억
이스마엘 베아 지음, 김재경 옮김 / 아고라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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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시에라리온은 부패한 정부군과 무장 반군 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이 나라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관광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최소 10년 이상 지속된 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당하고 수백 명의 소년들이 양측에 징집되어 전쟁의 소모품으로 쓰였다. 반군이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서쪽의 작은 광산 마을에 도착했을 때 주인공이자 저자 이스마엘은 열두 살이었다. 그가 형 주니어, 친구들과 함께 인근 마을에 나가 있을 때 반군이 습격하면서 부모님과 남동생과 헤어져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도망치는 동안 사람들은 무참히 학살당하고, 반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반군은 오후에 광산 지역을 습격했다. 갑작스레 총성이 터져 나오자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방으로 도망쳤다. 일터에 있던 아버지들은 집까지 쏜살같이 달려왔지만, 가족들 모두 어디로 떠났는지 흔적도 없고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그저 멍하니 빈 집 앞에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찾으려고 학교로, 강으로, 수돗가로 울음을 터뜨리며 뛰어갔다. 아이들은 부모를 찾아 집으로 달려갔으나, 정작 부모들은 아이들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총격이 더욱 거세지자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찾는 일조차 포기하고 마을 밖으로 달아났다. (17쪽)

그렇게 이스마엘의 살아남기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된다. 식량은 구하기 힘들고, 반군뿐만 아니라 그를 의심하는 다른 마을 사람들 때문에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회고록이 아니라면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일을 겪는다. 미국 가수의 랩 음악 테이프가 그의 목숨을 구한 적도 여러 번 있다. 테이프가 신분증도 아닌데, 역설적이지 않은가? 그는 정부군에 징집되어 AK-47 소총을 받고 중위가 나눠주는 코카인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마약에 중독된다. 잠을 거의 자지 않아도 힘이 넘치며 편두통도 멈췄다. 그는 소년 중위가 되어 7살밖에 안 되어 총을 겨우 들 수 있는 소년들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마을을 매복 공격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과 같은 소년들로 구성된 반란군을 만나게 되고, 다른 반란군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게 된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결정해 행동했는데 그 결과가 안 좋게 난 것뿐이다. 전쟁 중에는 흔한 일이었다. 모든 상황이 초 단위로 급변했고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다. 우리는 상황에 적응해야 했고, 결국 생존 전략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해야 했다. 그날 밤 우리는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사람들이 자는 동안 음식을 훔쳤다. (50쪽)

이 책 <집으로 가는 길>은 이스마엘의 집이 파괴된 순간부터 재활을 거쳐 유엔 회의에서 다른 소년병들을 대표해 연설하고 마침내 미국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여러 측면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멀고도 강렬하며, 냉정하게 사실적이면서도 감정적으로 끔찍한 이야기이다. 읽는 내내 주인공이 겨우 열두 살이라는 점을 계속 되뇌게 된다. 글은 때때로 사색에 잠긴 어른의 성숙한 어조를 띠기도 하지만, 대체로 15세 남자아이가 학교에 제출하는 보고서를 연상시키는 스타일이다. 이는 단순한 글쓰기 방식이지만, 그가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 수도 있으며, 분명한 점은 꾸밈이 아닌 사실이라는 데 있다. 그는 전쟁 중에 보고 겪은 일들로 인해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 그것은 상상해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냉정하고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다.

이따금 정어리와 콘비프에 가리를 곁들여 먹거나 코카인, 브라운브라운, 하얀 알약을 섭취할 때에만 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마약들을 섞어 먹으면 활력이 넘치고 사나워졌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물 마시는 것만큼 쉬웠다. 첫 살인 이후로 내 마음은 철컥 문을 닫았을 뿐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남기는 법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그래 보이기는 했다. (210쪽)

혹자는 전쟁의 배경이 된 정치적 상황 등을 자세히 다뤘다면 더 흥미로웠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긴 한다. 이 책은 그런 종류의 회고록은 아니며, 만약 독자들이 그런 점을 기대했다면 전직 소년병에 대해 매우 일반적이지 않은 기대를 품은 것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지 않는 전쟁의 이면, 즉 어떤 면에서는 전쟁을 인간화하고 둔감하게 만드는 점을 들여다볼 수 있다. 텔레비전을 통해 이런 종류의 일을 단순히 시청하는 것과 슬프고 무서운 개인적인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다큐멘터리의 해설처럼 종종 감성적이지 않은 글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 글을 더욱 믿을만하고 가슴 아프게 만든다.

나는 ‘초록 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유리하고 교묘한 위치를 선정하는 면에서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손바닥만 한 수풀 아래 숨어서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족히 마을 하나를 쓸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위님이 지어주신 별명이었다. (248쪽)

유엔 회의에서 이스마엘의 연설이 시적이거나 심오하거나 웅변술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지옥 같은 삶을 살아온 아이의 입에서 나온 솔직한 고백이었기 때문에 감동적이다. 전쟁 경험이 그를 더 성숙하게 도와주지는 못했지만, 한동안은 확실히 거칠게 만들었다. 이스마엘은 군인으로서의 경험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고 어떻게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 상황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어떻게 그 상황을 벗어났는지에 대해 균형 잡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쉽게도 그가 어떻게 소년병의 사고방식을 떨쳐버리고 성공적인 '재활'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간 과정도 설명하지 않는데, 아마도 미국 이민국이 책에 그런 내용을 싣는 것을 원치 않았거나 이스마엘 자신이 관련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전쟁의 잔혹한 참상도 참상이지만, 책을 옮기는 내내 작가가 독자들에게 이거 하나는 간절히 이야기하고 싶어하는구나 느낀 점이 있었다. 바로 시에라리온 소년들에게 소년병이 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반군 밑으로 들어가느냐 정부군 밑으로 들어가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397쪽)

요약하자면 이 책은 겁이 많아도 지략이 뛰어난 소년에게 커다란 총을 쥐어 주고 사람 죽이는 법을 가르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강력하고 본능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또한 모든 전쟁이 그렇지만 특히 이런 종류의 내전은 무고한 행인을 죽이고, 집에 있는 사람들을 불태우고, 강간하고 약탈하고 공포에 떨게 하면서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나라를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관련자들이 인간성을 잃고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무의미한 측면을 고통스럽게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옥이 있다면 아마 바로 여기일 것이라는 시선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지금은 소년병 같은 주제의 단골 추천 도서가 된, 지옥 같은 전쟁에서 살아 나온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길 권해드린다. (202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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