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사회 - 순 자산 10억이 목표가 된 사회는 어떻게 붕괴되는가
임의진 지음 / 웨일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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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갓 시작하던 무렵 지인이 주선해 준 소개팅에 나갔다. 그때까지 만나본 상대 가운데 가장 빼어난 미모였기에 은근히 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나의 허를 찌르는 그녀의 첫 질문은 연봉이 얼마나 되세요였다. 결혼을 염두에 두었으니 당장 현실적으로 궁금했으리라 짐작은 하면서도, 사람을 만났으면 사람에 관해 물을 일이지 사람을 어떻게 보고 얼마나 버는지부터 묻다니? 사람의 됨됨이를 연봉으로 계산하는 것 같아 굉장히 예의가 없다고 느끼고는 당시 연봉의 두 배 넘는 액수로 답을 했다. 순간, 그녀의 눈이 반짝거리는 게 아닌가. 정작 본인은 무직이면서 아무리 돌려 물어도 그녀의 주된 관심은 고소득에 머물렀다. 50대 중년이나 되어야 가능한 수입을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총각에게서 기대하다니.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 정중하게 집까지 자동차로 바래다준다며 일어섰다. 차는 물론 아버지가 타시는 중형차였고 무심코 맞춰놓았던 주파수에서 흘러나오던 우아한 피아노 연주가 끝나기도 전 집 앞에 내려주었다. 그런데 왜 이리 그날의 기억이 선명한 걸까?

 

나이와 직급, 외모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사회적 지위에 지나치게 민감한 현상은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우위를 확인하고픈 마음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기질이 결합한 결과이다.(p.45)

 

20년 전 여름 휴가차 안면도의 꽃지 해수욕장을 찾았다. 이제 임신 5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쌍둥이를 가진 아내는 이미 만삭이었다. 개펄에서 캐낸 조개를 굽다가 우연히 옆 텐트의 중년 부부와 간단한 술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대전에 산다던 그들의 당시 목표는 자산 10억 확보하기였다. 휴가비용 단돈 10만 원에도 즐거웠던 우리 부부에게 그들의 목표는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미래였다. 그러면서 휴가를 왔지만 속은 편치 않다고 했다. 그럴 거면 휴가 올 시간에 돈을 더 벌 일이지 왜 휴가까지 와서 속앓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버는 건 권장할 일이지만, 오로지 돈만을 목표로 현재가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글쎄, 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 아닌가 싶었다.

 

한국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동시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은 중간보다 못하는 것 또는 평균에 미달하는 것이다.(p.73)

 

평소 희망이었던 취미 드럼 교습을 받은 지 6개월 될 무렵, 가족 식사 자리에서 연주하는 동영상을 자랑삼아 보여주었다. 이를 보신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그건 배워서 뭘 하냐 돈벌이라도 된다더냐 취미는 무슨. 남들만큼 돈이나 벌어라이러신다. 상처받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지만 그때는 좀 울컥했다. 세상 모든 일을 돈벌이와 관련짓고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는 듯하여 매우 껄끄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벌었으면 뭘 하나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결국은 요양원에 다 갖다 바치고 있질 않는가.

 

과거 급제-토지 확보-수확량 증대라는 조선시대의 성공 기제는 현재 한국 사회의 성공 공식으로 여겨지는 고시 정규직 합격(시험을 매개로 한 간판)-아파트(자산) 보유-소득() 증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p.162)

 

한국 사회가 온통 돈 때문에 난리다. 늙으나 젊으나 주식과 코인, 주택과 부동산에 투자한다며 영혼까지 끌어모은 빚투성이 삶을 산다. 주택담보 대출액과 국가 채무액이 매년 기록을 경신한다. 사회에 기댈 곳이 없으니 오로지 돈뿐이라며 돈 모으기에 혈안이다. 쉽고 빠르게 돈 버는 방법을 배우고 가르치겠다며 여기저기 아우성친다. 그러나 돌아보면 돈 번 사람은 없고 죄다 파산 직전이라며 울상만 짓는다. 호황을 누려본 지는 어언 30년은 된 듯하고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의 글로벌 3고 현상에다 수출 채산성은 빨간불이고 무역수지는 계속 적자다. 경제가 성장할 낌새는 안보이고 스태그플레이션은 유력해 보인다. 상황이 이러니 믿을 데라고는 돈뿐이다. 그러나 정작 돈은 또 투자할 곳을 잃고 돌지 않아 악순환이 반복된다. 하루하루가 전쟁이고 한국에 사는 자체가 서바이벌 게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좇는 것은 흠이 아니지만, 돈만 바라보는 인생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는 요원하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사회가 된 지도 벌써 옛날이다. 대체 왜 이렇게 변했을까?


본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굳이 힘들게 경쟁해 사다리에 오르지 않아도 기본적인 삶을 보장받으며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꿈꾼다.(p.250)

 

저자는 시험-아파트-이라는 견고한 연결고리를 해체함으로써 성공의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돈에 관한 생각을 조금만 더 바꾸고 사회적 인식을 달리하며 유물론적 세계관에 머물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국민 기본 소득을 보장하고 아파트를 지급할 여력이 충분히 있으며 중산층의 삶을 회복할 방도가 있는데도 다들 외면하고 승자독식 논리에 취해있음을 신랄하게 지적한다.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는데도 나만은 패자가 아닐 거라고, 아니, 반드시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승자는 못되어도 패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승자는 되기 어려운 현실을 보고 승자 쪽에 가까워야 한다고 몸부림친다.

 

숫자 외에도 가치를 발견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하루가 팍팍한 사람들에게 삶에서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목소리는 공허하다. 당장 내일이 불안한 이들에게 경제적 자유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이야기는 와닿지 않는다. 사회가 사람들에게 돈이나 직업, 학벌, , 아파트 등 결국 숫자로 환산되는 유무형의 가치 외에도 삶의 성공과 만족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p.276)

 

본래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단계가 가장 어렵고 오래 걸린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며 오로지 돈에 매달리지 않아도 세상은 결딴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까지의 불편을 어떻게 참아낼 것인지 사회적 합의로 끌어내기만 하면 된다. 물론 여기까지 이론적으로는 완벽하다. 문제 인식의 다음 과정은 신뢰의 회복이다. 믿을 수 있는, 믿을만한 공정한 세상을 말한다. 해답은 있으되 성취하기 난망한 것은 특히 돈과 물질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매우 지난한 과정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런데도 우리는 그렇게 가야 한다고,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라고 말한다. 우리, 다 함께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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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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