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어휘력 (양장) - 말에 품격을 더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힘
유선경 지음 / 앤의서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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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왜관에서 김천으로 시집오셨던 나의 외할머니는 당시 여성의 평균 신장을 넘는 훤칠한 키의 멋쟁이셨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모습을 사진으로만 보고 가늠할 뿐이지만 나이 드시고 구부정해도 역시 할머니는 자태가 고우셨다. 그러나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니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할머니의 찐한 사투리에 영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빼다지(서랍), 짐치(김치), 정구지(부추), 가시개(가위), 지름(기름), 통시(화장실), 연희 때(여느 때), 영 파이라(아무래도 엉망이다), 걸구치다(거추장스럽다), 마카(모두), 널찌다(떨어지다) 같은 말은 신기하기도 하고 듣고도 몰라 두세 번 되물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실제로 로 발음하는 방식 때문에 고종사촌 승열이가 언제나 성열이로 불리는 등 동네 친구들과 일가친척 모두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압권은 이 누 해요?’라는 글자마다 높낮이가 따로 있는 질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건 누구의 것이냐?’를 묻는 말이었다. 가히 가가 가가가’(그 아이가 가 씨 성이냐)에 대적할 만했다. 당최 억양 자체가 서울 말씨와 너무 달라 대화가 힘들었던 할머니는 늘 소통에 목말라 하셨다. 혹시 그때 할머니는 어른의 어휘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표준어를 모르셨던 것일까.

 

최근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참신한 연기와 대사로 큰 화젯거리가 되면서 너도나도 해방을 추앙하는 유행이 일었다. 자신을 가두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니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떨쳐낸다는 줄거리가 볼만했다. 배우들의 찰진 연기보다도 더 크게 다가온 매력은 힘 빼고 거품 걷어낸 알토란 같은 대사였다. 저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대사를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어쨌든 드라마에서 영감을 얻어 해방을 추앙 한다던 개인들이 진정 자신에게서 해방되었는지는 아직 얘기들을 안 하니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자는 말은 일찍이 90년대 그룹 듀스의 노랫말에도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도 말이 필요한 일이고, 그 굴레를 벗어나야 허물 벗는 뱀처럼 성장하는 것 역시 말이 필요한 일이다. 언어는 존재를 담는 틀이라고 했던가, 성인이 어른으로 거듭나려면 자신을 규정하는 언어의 허물을 벗어내야 성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말은 참 쉬워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게 큰 함정이다.



 

어쩔 수 없다. 말은 인격이다. 고사성어나 전문용어, 어휘를 많이 안다고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갖췄다 할 수 없다. 그건 그냥 유식하고 교양 있는 거다. 인격은 기본적인 어휘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상대에게 어떠한 의도로 쓰는지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말의 힘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으로 획득된다.(99)

 

독자들은 첫째, 책에 언급되는 순우리말 등의 어휘를 다른 사람에게 써봐야 그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 저자는 어휘력을 늘려야 하는 이유는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누려보기 위함이라 답한다. 둘째, 그렇다면 어휘력을 늘리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먼저 어휘력이 필요한 이유와 중요성을 깨달아 보자고 한다. 저자의 궁극적인 바램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서 해방되기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의 틀을 규정하는 언어부터 점검하는 것인데, 이는 해방감을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이 책은 전체 4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에서는 일상에서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어휘력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짚는다. 2장에서는 어휘력을 키우는 기술을 습득하기에 앞서 전제되어야 하는 마음 자세에 관해 쓴다. 3장은 어휘력을 키우는 방법을, 4장은 한 개의 낱말에 대해 궁금해하고 음미하는 일이 어떻게 어휘력을 늘리고 사고력을 확장할 수 있는지 사례를 들어 쓴다.

 

공감 능력을 갖춘 이들은 어휘 선택과 태도에 신중하다. 남의 감정을 자극하는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이며 제한적이고 시종 감정적인 어휘따위는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습관은 인격을 형성하는 데 주효한 거름이 될 수 있다.(130)

 



이 책 제목이 어른의 어휘력이지만 기실 어휘력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는다. 구수한 남도의 사투리가 섞인 에세이 형식으로,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최근의 일까지 고루 섞어 짧은 글의 제목에 어울리는 글감을 제시한다. 조금 낯설거나 어려운 어휘를 비롯하여 시사 상식까지 본문 아래 따로 주석을 달아 설명하고 있어 읽는 재미가 제법이다. 찰진 9예시문을 통해 문맥 속의 단어를 배우는 과정이 마치 영어 원서 독해 능력 향상을 위한 문해력 교과서의 느낌이 드는데, 이런 구성 방법은 꽤 효율적이다. 본래 어휘는 따로 백반이 아니라 문맥 속에서 배우는 게 최고다.

 

사람은 머리로 안다 해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변화하지 않는다. 내용인즉 아무리 옳아도 가슴을 울리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표현이 아름다워야 하고 가슴을 흔들 수 있어야 한다.(307)

 

지난 26년 동안 라디오 방송일을 해온 베테랑 작가인 저자는 서두에서 이 책의 저술 의도를 어른에게도 어휘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있다고 밝힌다. 짐작건대 저자가 말하는 어른의 어휘력이란 마땅히 어른의 수준으로 인정할만한, 또는 어른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최소한의 문해력을 뒷받침할만한 어른스러운 어휘력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몸은 이미 성장을 지나 노화를 향해 달려가는데 어째서 이놈의 정신머리는 여전히 고등학생에 머물고 있냐며 모자라는 언어 감수성과 어휘력에 가슴을 치고 싶은 필자 같은 중년의 남성 독자에게 절대 필요한 책이다. (202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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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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