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펼쳐 들고 보니 두 저자 각각 청각과 소아마비 장애인임을 알았다. 순간, 소아마비로 양쪽 다리를 쓰지 못하고 목제 목발을 짚고 다니던 중학교 동창 녀석이 떠올랐다. 다리만 불편할 뿐, 또래보다 훨씬 성숙하고 밝은 녀석이라 그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보다 그의 성품이 먼저 떠올랐다. 사지육신만 멀쩡할 뿐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던 다른 녀석들보다 오히려 그에게서 배울 점이 많았다. 품성이나 인격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신체가 불편한 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기술과 이를 대하는 장애인의 입장을 주제로 다룬 이 책의 두 저자들도 그러하리라는 짐작과 함께 일독을 시작해본다.

 

선천적이든, 사고를 당했든 간에 인간의 신체가 기계화되는 경험은 매우 불편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을 정상이라 여기는 비장애인들조차 어느 정도는 이미 사이보그화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매일 수십 차례씩 들여다보고 손으로 감각을 느끼는 전화기, 속칭 핸드폰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화나 SNS가 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반응하고 전화기를 연신 들여다보니 말이다. SF영화에서 사람의 손바닥에 심어 둔 전화기 기판이나 손목에 띄울 수 있는 액정화면 따위가 나오는 장면을 보셨으리라. 하지만 첨단이라 일컫는 장비와 기술이 보편화되고 장애인들의 편의를 도모할수록, 아무런 장치도 없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신체야말로 가장 값진 자산임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사이보그의 시대야말로 인간 중심의 세상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여건을 만들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기술과 의존, 기술과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40)

 

누구나 나이 들면 몸이 불편해지고 병들고 뜻하지 않은 장애까지 입을 확률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오로지 장애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닥쳐올 보편적인 신체의 기능 부전을 보존해 줄 사이보그 기술이 필요하며 이를 생활 속에 실천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가진 세계 최고의 의료보험 제도에 사이보그 기술력이 뒷받침될 경우를 생각해보라. 국민소득 증가에만 목을 맬 일이 아니라 장애인들의 취약한 현실 수준을 끌어올려 줄 국민의식과 제도의 개선이 더더욱 필요하다.

 

비장애인의 눈에 보이는 장애인들의 각종 보조장비는 사실 그들 신체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데 갖추지 못한 결함을 대신하기 때문이며, 법 앞에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으로서 누릴 당연한 권리를 실현하도록 도와줄 실천 도구이기도 하다. 반려동물과 똑같은 개념을 표현한 휠체어 작품이나, 근무시간 작업 중 부서진 의족을 보상 처리해준 긍정적 사례와 같이 장애인 보장구라는 명칭부터 바뀌어야 한다.

 

과거에 비해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인식은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며 단지 신체 어딘가가 불편하여 사회적으로 배려가 필요할 따름이라는 식으로 점차 개선되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을 물을 때는 더욱 개방적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동네에 장애인 학교가 들어선다는 정부 발표에 집값이 내려간다는 가당찮은 이유로 머리띠를 두른 채 길바닥에 드러눕는 집단의 추태 또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대중교통의 실태는 출근길 전철 시위에서 잘 드러난다. 비장애인들에게 단지 일상적 불편함의 문제라면 장애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정 인원을 고용하도록 규정한 장애인 고용 촉진법을 충실히 따라는 사업체 역시 매우 적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과연 동등한 기회를 얻어 활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장애 접근성과 장애 권리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특정한 기업이나 단체가 소외된 장애인을 위해 시혜를 베푼다는 서사만이 반복되고 있다. 이 온정의 서사 안에서 기술과 실제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장애인들의 진짜 필요는 쉽게 지워지고 만다. (72)

 

비장애인들도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므로 장애는 장애인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아울러 장애인들의 불편함을 완화해줄 기술이나 지원, 관심은 비장애인들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 베풂의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 일례로 선구적 기술력을 표방하는 대기업이 장애인들의 불편함에 관심을 보이고 삶을 더 낫게 해준다는 광고는, 선의 그 자체로는 탓할 일이 아니지만 결국 자사의 이미지를 좋게 하거나 비장애인들의 시혜 욕구를 대리만족하는 수단이 아니냐는 지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누군가를 돕고 이롭게 하는 일이 반드시 널리 알려야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지닌 익명의 수호천사들이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있지 않던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복잡한 사회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도모하기 위해 온갖 다양한 제도를 만들고 그 틀 안에서 안전의 희열을 추구한다. 역설적으로 이 제도는 모든 이에게 정상성이 담보되었을 때 효력을 발휘한다는 일종의 사각지대가 있으며, 본래의 좋은 의도와는 별개로 사회적 약자나 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익히 겪어보았듯 사회 제도는 늘 사회 현상의 뒤를 따라가며 치다꺼리를 해치우기 마련이다. 세상에 갑자기 어느 현자가 나타나 불길한 사회 현상을 예견하고 미리 제도를 마련하는 법은 없다. 손상은 제거의 대상이고 유일한 해결책은 치료라는 전통적인 태도를 지닌 채로는 장애와 치료, 사회생활 영위와 같은 언덕을 넘어가지 못한다. 장애를 보완하거나 없애 줄 기술의 발달은 필요하지만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는 만능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우주 고아가 될 뻔했다가 기적적으로 지구로 귀환하는 영화 <마션Martian>의 주인공 맷 데이먼의 탈출을 결정적으로 도운 것은 바로 흔히 쓰이는 덕트 테이프 duct tape였다. 청테이프라고도 불리던 이 물건은 군대 시절 팔방미인, 만능 접착제로 통했다. 화성에서 홀로 낙오하여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갈 뻔한 귀한 우주인이 가성비 최고의 싸구려 테이프로 목숨을 건졌을 뿐 아니라 함께 사라질뻔한 화성 연구자료도 구해냈다. 대단히 비싼 장비도 아니고, 사용할 때 특별한 전문 지식도 필요치 않은 테이프가 거대한 인류 역사 흐름의 방향을 가른 셈이다. 만일 이 우주인이라는 존재를 장애인으로 치환하여 생각해본다면? 우리 사회가 단지 신체적인 어려움을 탓하며 보석 같은 귀한 존재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장애인들을 위한 하이브리드 기술은 값비싼 기술도 아닌, 그렇다고 대단한 영웅도 아닌 테이프를 닮아야 한다.

 

25년쯤 전, 비싼 장비 대신 인건비가 들지 않아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군대에서 작업 중 무거운 물건을 들다가 그만 허리를 삐끗었했다.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요령을 피우지 않은 대가가 너무 컸다. 요추 4번과 5번 사이의 물렁뼈가 뒤쪽으로 삐져 나가 신경을 누르고 엄지발가락부터 엉덩이까지 마치 달궈진 철삿줄로 지지는 듯 통증이 극심했다. 장애를 판정받을 뻔한 경계까지 갔는데도 적절한 치료는커녕 군 병원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동료를 비롯해 상관까지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데 무슨 장애가 있느냐는 소리에 또 다른 마음의 상처를 얻었다. 미련하게도 무려 25년이나 더 버티다 결국은 몸에 칼을 대고 말았다. 통증은 사라졌지만, 몸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아졌다. 이렇듯 타고난 경우가 아닌, 사고로 인한 장애를 누구나 겪을 수 있기에 장애인에 대한 더욱 세심한 배려와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장애인보다 더 심한 마음의 장애가 있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배려한다며 생색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보청기의 경우는 초소형 은폐 장착 방식을 선호하도록 진화되어왔다. 눈에 띄지 않는 보청기를 착용함으로써 정상인들의 무리에 잘 섞이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장애를 공개하고 배려를 받느냐 아니면 장애를 숨김으로써 차별당하지 않느냐를 두고 장애인들은 또 다른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는 점을 새로이 깨달았다. 공개와 은폐의 선택 이후에도 어려움은 또 남는다. 사이보그화 된 장애인의 몸과 보조 장구가 부대끼느라 동반되는 또 다른 어려움이다. 신체 마찰 부위에 유발되는 염증을 걱정하고, 배터리 교환 주기에 몹시 민감해지고, 유지 보수 비용을 걱정해야 하지만, 신체는 회복되는 대신 현상 유지될 뿐이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데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마저도 오롯이 장애인 본인의 몫이 된다.

 

장애disability는 단지 몸의 특정한 기능이 결여된 상태가 아니라 정상이 아닌 몸이라는 사회적 평가를 획득한 일종의 신분(지위)에 가깝다. 따라서 고도로 발전한 테크놀로지가 기능의 결여를 보완한다 해도 여전히 장애는 존재할 수 있다.(155)

 

선천적인 장애를 안고 태어났든, 불의의 사고를 당하든 몸의 특정 기능을 보완해주는 의수 또는 의족을 착용함으로써 어느 정도 정상성을 회복한 장애인들은 사회적 또는 기술적으로 정상과 장애 사이의 중간 지위를 새로 얻는다. 상업화의 소산이라는 일부 비난도 있긴 하지만 1998년 패럴림픽 육상 선수 에미미 멀린스는 영화 <킹스맨>에서 칼 달린 무시무시한 다리로 사람을 썰어대는 가젤캐릭터에게 영감을 주었다. 한편, 2012년 런던 패럴림픽 육상 선수였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의 경우 탄소섬유로 만든 치타 의족을 신고 출전하여 미디어의 큰 관심을 받았으나 자기 애인을 총기로 살해하고 법정에서 보장구를 벗어 보여 유족을 모욕하면서 인간승리의 표본이 나락으로 떨어진 사례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태도가 시혜와 동정으로만 점철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심재신 대표의 말처럼, 우리는 장애인에게 보살핌과 배려가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휠체어 출입이 가능하도록 설계한 건물 입구를 마주칠 때마다 만일 내가 수동 휠체어에 탄 장애인이라면 과연 저 경사로를 자력으로 오를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과거 병원 신세를 지며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던 짧은 체험이 내 경험의 전부였지만, 우리가 뜻밖에도 장애인들의 교통권이나 이동권에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들의 아픔과 불편은 상상 밖으로 크고 오래 지속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가 있든 없든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설계가 업계 전반적으로 적극 권장되어야 하겠다.

 

플라스틱 빨대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은 기술과 장애의 관계가 복잡하다는 것, 더불어 특정한 진보적 가치를 위한 운동이 다른 권리운동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환자와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주름 빨대는 주류화되어 어디서나 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그 주류화를 통해 원래의 목적이 잊히고 말았다. 장애 접근성 이슈에서는 이처럼 자원 사용이나 환경 문제와 관련된 또 다른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210)

 

반드시 빨대를 이용해야만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장애인을 위해 개발되었던 주름 빨대가 처음에는 병원을 위주로, 나중에는 모두가 즐겨 쓰는 상업 용품이 되었다. 장애인들에게는 희소식이었지만 문제는 환경에 해로운 플라스틱을 종이로 대체하는 최근 추세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여전히 필수품이라는 점이다. 매장에서 음료를 주문하는 자체도 쉽잖은 장애인들은 이제 별도로 빨대를 요구하지 않는 한 음료를 마시기도 어렵다. 안 그래도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장애인들의 필수품이라는 목소리가 대중의 합리성에 묻혀가는 현상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과연 플라스틱 말고는 대안이 없는 걸까?

 

장애인들의 손발이 되어줄 보장구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을 방법은 거의 없다. 이들의 디자인은 물론 착용하지 않지만 타고 다니는 휠체어의 디자인 역시 나날이 발전했다. 과거 기능과 가격을 고려하여 투박한 디자인일 수밖에 없었다면 요즘은 이음새 없이 매끈한 디자인을 고려하는 추세다. 이를 항상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이쯤에서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하다. 아무리 디자인이 좋고 이쁘다고 한들, 보장구와 몸에 닿는 부위의 쓰라린 통증마저 잊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신체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이어가려는 이들의 의지를 비장애인인 우리가 이해하기란 정말 요원한 것인가. 출근길 전철에서 통근 시위하는 전장연 분들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크게 와 닿는 듯하다.

 

직접 체험한 것만이 온전한 나의 세상이라는 말이 있다. 그 세상에서 겪은 것들이 또한 온전히 나의 삶에 묻어나느냐는 또한 별개의 문제다. 일시적 또는 간접적으로 정상이 아닌 상태를 겪어보고 장애를 체험하고 이해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 확신한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래서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나 역시 섣불리 이해한다는 말을 삼가야 하리라. 이로써 장애는 정상이라는 말과 그다지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정상이라 여기던 그 누구라도 단순히 상상하기만 해도 장애를 겪을 수 있다니. 고질병인 요통과 이명 증상이 있긴 하지만 이렇다 할 장애도 아니고 하니 이런 처지를 감사할 일이다.

 

주제와는 조금 다른 얘기일지 모르겠다. 현대적인 여성의 신체 곡선과 미의 기준은 동서양이 서로 매우 달랐지만, 점차 서구화 쪽으로 통일되어 가는 것 같다. 식단이 서구화되면서 실제 서구인의 신체를 닮기도 하고, 실제 외모 면에서도 호소력이 더 커 보인다. 덜 이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이러한 미의 기준을 이제부터 따지지 않기로 한다면, 미모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사그라들 수 있을까? 아니면 이러한 미모차별주의 혹은 외모지상주의가 존속되는 한 성형을 해서라도 미인으로 살겠다는 욕망이 언제나 정당화되다 못해 추앙받는 사회로 지속될 것인가? 덜 이쁜 이들의 미모차별주의나 장애인의 능력차별주의는 서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첨단인 시대가 오더라도 누구 할 것 없이 다 이쁘고 다 정상인 세상은 결국 오지 않을 테니까.

 

의존은 우리에게 공포다. 나이가 들든, 사고나 질병으로 걷지 못하게 되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자신의 몸에 나름대로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의존적인 존재로 규정되는 일에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적응하기 어렵다. (288)

 

수년 전 치매 증세가 의심되니 보건소에 가서 검사받아보자는 권유에 아버지는 부자지간의 연을 끊겠다시며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격렬한 분노를 쏟아내셨다. 두 팔 걷고 나선 며느리가 어린아이처럼 변한 아버지를 어르고 달래 결국 설득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은 피할 수 없었다. 일상생활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 필요한 시기가 왔고, 그 누군가는 결국 가족일 수밖에 없으며, 장애 진단은 곧 가족과 일상을 나누기 힘든 상황을 의미하게 되었다. 더욱 슬픈 일은 자신이 의존적 존재라는 사실조차도 잊고 한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꾸려갈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나마 국민 복지 차원에서 주어지는 도움이 없었더라면,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최근 노인들만의 공간이던 양로원 혹은 요양원에 신생아 돌봄을 함께 운영하는 시설이 생겼다는 말을 듣는다. 갓난아기들이야 아직 인지 발달이 더뎌서 모르겠지만, 노인들의 경우 아이들을 키우던 당시의 추억과 방법은 물론 돌봄을 통해 아기들과 연결됨으로써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지고 인지능력도 향상되는 효과를 거둔다고 한다. 인간은 본래 여러 연령층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집단생활을 해왔으나 특히 산업화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그 체계가 무너졌다. 장애가 있든 없는 우리는 언제나 함께 살아왔던 자연의 섭리에 귀를 기울이고 인간성을 돌아보고 회복하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 집의 50대 부부가 안방에서 드라마를 시청하는데 두 사람에게 주인공들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서로 주인공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는 통에 드라마 내용에 집중하지 못한다. 청각 장애는 없지만 지금 추세라면 장차 그 경계선에 다가갈 것이 확실하니 자막을 달아주어도 나쁘지 않겠다며 투덜거린다. 공중파나 종편은 몰라도 요즘 웬만한 인터넷 방송에는 다 자막이 달려 나온다. 이 역시 고맙게도 안희제 님이 자막을 요구해서 받아들여진 결과다. 기술의 발전이란 이렇게 장애 정의와 접근성 원칙에 근거하여 기술의 핵심 가치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김초엽 작가의 생각이 공감된다.

 

우리의 세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어떤 것도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복잡함 때문에 무언가를 무작정 보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서 배웠다. (358)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함께 해오던 누군가의 시공간 그리고 그 존재와 의미를 까맣게 잊고 지내오다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듯 갑자기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다. 이 책을 통해 나 혼자 살기에도 바쁘고 복잡한 세상이라며 오로지 나의 입장만 살피며 살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그렇게도 또렷한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며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누구나 그 영역으로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음 또한 알게 되었다. 현재를 사는 모든 독자에게 일독을 권해드린다. (2023-04-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