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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도 몰랐던 독일 사람과 독일 이야기
이지은 지음 / 이담북스 / 2021년 1월
평점 :
간호사로 독일에 취업 파견 나갔다가 귀국한 작은 이모님을 만났던 내 기억의 시계는 1970년대 후반으로 돌아간다. 그 시절 집에서 가끔 간식으로 먹던 감자는 기껏해야 찌거나 삶는 게 전부였는데, 이모님이 전해주신 감자 조리법은 가히 신문물이었다. 찐 감자를 으깬 후 잘게 썬 오이와 당근, 설탕과 우유를 붓고 과자 부스러기 고명을 얹어 먹는 단순한 요리법이었으나, 이 맛을 본 친구 녀석들 사이에서 우리 집은 순례 성지가 되었다. 독일에서 주식으로 먹는 흔한 식재료에 불과했던 감자였고 지금 기준으로는 이렇다 할 요리법도 못되지만, 온종일 엄마를 졸라 산 10원짜리 불량식품에 하루가 행복했던 동네 코흘리개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때 선물로 함께 받았던 독일제 식칼 세트는 30년 넘게 쓰다가 더 갈아 낼 날이 없어 폐기할 정도로 개발도상국 한국인에게 ‘메이드 인 저머니’는 부러움의 대상인 동시에 최고 품질의 상징이었다.
그로부터 20년쯤 후 삼성에서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면서 경기도 기흥에 차량 충돌 및 안전시험을 위한 연구소를 건립하게 되었고, 필자가 일하던 회사는 독일 조명설비 업체의 한국 기술 대리점으로 이 사업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칼리라는 이름의 이 업체 설비 기사가 있었는데, 그는 특이하게도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고공에서 작업하는 중에도 항상 주머니에 맥주병을 넣고 다니며 홀짝였고 당연히 늘 상기된 얼굴색으로 알코올 냄새를 풍겼다. 사고를 우려하여 주위에서 주류 반입을 금지하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세상 물은 모두 바닷속 물고기 오줌이 증발한 것이라 맥주밖에는 마실 거리가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도리어 동참하기를 권하기도 했다. 업체에 대한 정식 항의로 그의 맥주 사랑은 결국 얼마 가지 못하긴 했으나, 이질적인 두 국가 간의 문화 차이가 때로는 극복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된 동시에 외국어 습득 시 문화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독어독문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저자가 그의 해박한 지식과 독일에 체류한 경험을 아우르며 독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뿐 아니라 독일에 관심 있는 독자를 위해 독일에 관한 최대한의 것을 알리고자 펴낸 안내서이며 자칭 ‘독일 내부입문서’이다. 그는 우리가 독일을 알아야 하는 이유로 독일이 현재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및 외교적인 면에서 유럽연합을 이끄는 실세이며, 한 국가와 민족을 이해하려면 내면적 과정을 역사-문화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당위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에서는 질서를 잘 지키며 의무감이 뛰어난 독일민족의 전형적 특징과 그 역사적 유래 및 두려움과 그리움으로 표현되는 기본 감정과의 연관성을 설명한 후 독일이 배출한 각계 인물들과 명소를 소개한다. 2부에서는 도입부에 묘사한 ‘메이드 인 저머니‘와 감자 요리 일화처럼 동네 흔한 맥줏집과 맥주 순수령의 역사 등 독일인의 일상과 문화를 소개한다. 3부에서는 독일인의 눈에 비친 한국과 한국인 및 외국인들의 독일 생활 이야기를 전하며, 가장 분량이 적은 4부에서는 최근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던져주는 경쟁보다는 공생을 목표로 하는 교육제도 및 완성국가 후발주자로서 유럽지역 전반에 미치는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살펴본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전체 20개의 주제 가운데 첫 세 항목을 제외하면 순서와 관계없이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좋다. 전체 분량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독일인의 민족적 특성과 형성과정을 가장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데 이는 이 부분이 독일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저자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며, 전반적으로 살짝 중복하여 언급하는 경향은 있으나 배경 설명만큼은 과연 역사학 전공자답게 풍부하고 박식하며 무엇보다 흥미롭다.
저자는 독일인들의 심리적 기저를 두려움과 그리움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과거 유럽지역에서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가장 낙후되고 피폐한 군소 영주국에서 비롯된 역사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어떤 가정이나 국가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내력은 그 과정 자체로도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 같다. 무려 아홉 개의 국가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언제 침략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에게서 벗어나 안락한 상태를 희구하는 이중적인 태생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독일은 주변국과 비교해 국민이 대체로 유머 감각도 떨어지고 너무 진지하기로 정평이 나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전범 국가라는 역사의 오명을 씻고 좋은 이웃이 되고자 주변 국가에 진정 어린 화합의 손길을 부단히 내밀고 있는 그들의 진지한 노력만큼은 높이 살만하다고 여겨진다.

풍부한 역사적 배경과 박식한 저자의 설명을 곁들여 결코 적잖은 분량과 비교해 의외로 책의 시각 자료는 빈곤하다. 도입부에 독일과의 접경 국가를 표시한 컬러판 지도 한 장밖에 제공되지 않아 못내 아쉽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과 명승지를 보여주는 사진 또는 내용을 도식화한 통계자료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더라면 명실상부 독일학 입문자를 위한 안내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독일 국민과 국가에 대해 더 상세히 알게 되는 모처럼의 기회가 주어진 점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마치 재미는 없어도 사람됨은 진국인 독일인들의 특성을 빼닮은 것 같다.
#인문 #알고도몰랐던독일사람과독일이야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