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시장 EBS 세계테마기행 사진집 시리즈
EBS 세계테마기행 지음 / EBS BOOKS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시장이 이 책의 소재인 만큼 우선 시장을 뜻하는 영어 단어 market의 어원을 찾아보았다. 고대 유럽에서는 전리품이나 도둑질한 장물이 주로 시장에 나와 거래되었기 때문에 merce에서 시장을 뜻하는 market으로 파생되었다. 용병을 뜻하는 mercenary, 태양계의 행성인 수성이자 로마신화의 도둑과 상업의 신을 뜻하는 Mercury도 같은 어원이다. 고대 유럽의 시골은 개인이 아닌 마을별로 경제 단위를 이뤘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공동으로 농사짓고, 수확물은 마을 공동 창고에 보관했다가, 필요한 만큼씩 가져다 썼다. 서비스업의 개념도 없던 때라 뚜렷한 전문 직종은 없었고, 함께 농사짓는 마을 사람 중 대장장이가 있어 대가 없이 이웃들의 농기구를 고쳐주었다. 대장장이는 마을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만약 자기네 마을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이 필요해지면, 시장으로 교환하러 가지 않고 그 물건을 생산하는 옆 동네로 선물을 보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선물의 의미를 눈치채고 이웃 동네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답례 형태로 챙겨 주는 방식으로 물물교환을 했다. 하지만 도둑질한 장물은 최대한 원래 주인 눈에 띄지 않는 먼 곳에 내다 팔아야 했다. 또 용병들은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돈이 아니라 전리품을 받았는데, 자기에게 필요 없는 물건들은 내다 팔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야 했다. 빼앗은 물건이 라틴어로 merce였다. 시장에서는 주로 이런 물건을 교환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장을 market이라 불렀다. 실제로 로마신화에서 merce의 신을 뜻하는 Mercury는 도둑들의 신이면서 상업의 신을 겸했다고 한다.


시장을 주제로 한 사진 책이 드문 것처럼 이 책을 쓴 저자의 이력 또한 특이하다. 중학생 될 나이에 서울 유학을 왔고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후 유명 중식당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으며 지금은 중국요리 연구가이자 대학교수가 되어 중국 전통조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최근에는 자서전 성격의 음식 전문 서적도 출간하였다. 이 책은 EBS에서 저자가 참여하여 진행한 세계 테마기행 프로그램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사진 책으로 엮은 것으로 동서양 여러 나라의 시장 풍경과 사람 사는 모습이 날것 그대로 담겨있다.


시장에 관한 추억은 삶의 순간이 기억나는 독특한 공간이며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좀처럼 느껴보지 못할 아날로그 감성을 남겨준다. 시장에는 사람이 있고 삶이 있으며 힘찬 에너지의 물결을 느낀다. 시장이 치열하게 사는 인간 삶의 단면인 이유는 가족을 배부르게 먹이고 따뜻하게 입히고 싶은 인간의 공통된 목표가 발산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힘겨울 때는 시장에 가라는 말이 있다. 생동감을 느끼며 다시 삶을 꿈꾸라는 뜻이 아닐까. (본문인용)


하지만 시장이 늘 낭만적이거나 추억 속의 장소만은 아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편찮으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자전거로 장을 보러 다녀야 했던 필자에게 다가오는 시장의 느낌은 살가움보다 창피함이 더 컸다. 동네를 쏘다니며 놀기 바쁜 또래의 사내아이라면 아무도 하지 않았을 장보기 심부름을 누가 볼세라 늘 신경 쓰며 다녀야 했는데, 어느 더운 여름날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오던 수박이 굴러떨어져 박살이 나던 순간 이를 목격한 옆집 또래 여학생의 웃음을 참던 표정이 차마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외국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시장에 들러보라는 조언을 듣는다. 저자는 인간의 먹고사니즘을 대변하는 시장은 이방인의 삶에 들어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며, 현지인들이 무엇을 먹고 입는지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 정보는 검색을 통해 얻은 정보보다 훨씬 정확한 법이다. 클릭 한 번이면 장 본 물건이 바로 집으로 배송되는 편리한 요즘, 재래시장은 상대적으로 어지럽고 복잡하고 소란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적인 삶의 모습만큼은 가상세계에서 느껴보지 못할 독특한 요소이다. 이 책은 보기에도 맛깔스럽게 진열된 과일, 알록달록 모양도 이쁜 옷가지, 허기를 달래줄 먹음직스러운 길거리 음식, 북적거리는 뒷골목 풍경, 산더미처럼 쌓아둔 형형색색의 상품, 어깨 부딪히며 걷는 사람의 물결과 그 너머로 물건값 흥정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풍경을 담고 있다. 카트 운전하기 바쁜 대형 상점에서의 주말 쇼핑과 인터넷 가격 비교와 검색 구매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재래시장은 불과 20년 전 삶의 현장이었음을 되새겨 본다.


#세상의시장 #인문교양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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