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
라종일 외 지음 / 파람북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79년 10월. 여느 때처럼 동사무소 확성기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오후 6시 태극기 하강식이 시작되면 가던 길을 멈추고 태극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국기에 대한 맹세를 되뇌었다. 그달 26일, 궁정동에서 울린 총소리와 함께 17년간 독재를 이어오던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호기심 천국 어린이답게 이다음 박정희는 누가 하는 거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루이 14세처럼 대통령이라는 명칭 대신 이름 석 자가 곧 절대 권력의 상징이던 시절인데 어려서 몰랐나 보다. 신기하게도 그 아버지의 후광 덕에 세계적으로 드문 여성 대통령이 되었지만, 탄핵 인용으로 임기를 다 못 채운 딸은 지금 국가시설에서 무상급식을 받고 있다.

1984년 10월. 마포대로를 통과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해외 순방 행사에 일회용 태극기를 흔드는 수많은 환영인파의 한 명으로 동원되었다. 그날 오후 수업을 모두 제치고 대낮에 학교 밖으로 나가 우리처럼 동원 나온 이웃 여학교 학생들의 희멀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과중한 학업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어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1987년 6월. 민주화의 봄이라고 부르던 시절인데 향긋한 꽃향기 대신 알싸한 최루탄으로 평생 잊을 수 없는 자극적인 향기를 꽤 오랫동안 맡을 수 있었다. 다음 해 논산 훈련소에서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가스실을 구를 때에도 저녁 아홉 시만 되면 같은 얼굴을 반복해서 보여주니 아버지보다 더 친근감이 들었다. 춘추전국시대도 아닌 20세기에 자신의 손으로 머리에 왕관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얹은 군주가 자신은 전 재산이 29만 원뿐이라고 했다. 가진 것에 비해 매우 풍족해 보이던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대통령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한 개인이 그의 인생에서 떠올리는 순간들을 돌아보았다.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들을 소재로 정하기부터 하나같이 불행한 그들의 말로를 다루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책은 세간에 알려진 대통령들의 공과를 알려주기보다는,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작동방식 오류의 원인을 짚어보고 있다. 대권을 잡았다 놓은 대가치고는 썩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지 못하는 공통적인 이유를 대통령과 연관된 네 가지 분야, 즉 외교, 언론, 정치 구조, 리더십의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무려 50쪽에 이르는 서장을 통해 그러한 불행을 맞이하게 되는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검정과 노랑의 강렬한 대비 색채로 눈에 금방 들어오는 표지의 아홉 대통령 그림을 보고 이들의 불행 이야기가 골고루 다뤄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곧 실망감을 맛보게 된다. 매우 드문 소재를 이 분야 전문가들의 객관적 시선을 통해 바라보려 한 점은 대단히 훌륭하지만 제한된 자료나 저서의 사후 평판을 의식하였는지 논의의 대상이 일부 대통령에 집중된 점은 옥에 티로 보인다.

우리나라처럼 지정학적 위험이 많고 대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가 외교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숙제입니다. 보다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범정부적 차원에서 외교에 접근해야 합니다.

110쪽



이 책은 대통령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제왕적 대통령제, 5년 단임제, 승자 독식 제도와 같은 정치 제도와 지역대결주의 혹은 지역감정으로 읽히는 정치 문화를 꼽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정치의식과 정치 문화로 빚어낸 정치적 구조에 기인하는 것으로, 결국은 국민 개개인의 시민 의식으로 나타나는 민주주의 성숙도에 달렸음을 강조한다.

이어 민주적 리더십의 대표자로서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자질로는 확장된 상황 인식, 소통의 기술, 통합과 포용의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 이들을 현실화할 구체적인 해결 방안으로는 미래 지향적으로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실천하며, 비서실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무위원에게 더 많은 권한 부여하고, 대통령 자신의 신변을 잘 관리할 것과 공평한 인사 정책을 펼치고, 조직을 개편하여 행정 개혁을 이룰 필요성을 말한다.

대통령의 주변인들은 그의 의견에 감히 반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정책을 구상하고 추진하는 데 있어 제재당할 일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대통령이 독단적인 결단과 결정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이유이며, 언론의 비판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148쪽



이상적으로 모범적인 지도자로서 단 한 명의 대원도 잃지 않고 돌아온 남극 탐험대장 섀클턴과 그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준 스테판슨의 사례를 통해, 지도자가 갖춰야 할 자기희생과 솔선수범은 사실 대단히 어려운 덕목이며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이 덕목과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퇴임 후 대통령들이 불행한 정도는 바로 이들 덕목의 유무 차이가 아니었을까.

일례를 들어보자. 도덕성에 아무 흠결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 조금 도덕적이지 않아도 아무렴 어떤가, 일단 경제가 살아나고 내 배부르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으로 뽑아놓으니 앞으로는 베푸는 척하면서 뒤로는 나라의 곳간을 헐어내었을 뿐 아니라 주권국가로서의 지위와 명성에 치명타를 입힌 후임 대통령 자리를 굳혀놓았다가 그나마 비리 일부가 드러나면서 법의 심판을 받아 나란히 무상급식을 받게 된 전임 대통령들의 경우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는 결코 완벽한 제도가 아니며 그 번영과 발전은 체제에 대한 국민 개개인의 철저한 관심과 감시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교훈을 마음에 되새긴다. 국가는 국민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기 마련이며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대가는 최악의 지도자임을 상기하면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