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여느 때처럼 동사무소 확성기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오후 6시 태극기 하강식이 시작되면 가던 길을 멈추고 태극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국기에 대한 맹세를 되뇌었다. 그달 26일, 궁정동에서 울린 총소리와 함께 17년간 독재를 이어오던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호기심 천국 어린이답게 이다음 박정희는 누가 하는 거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루이 14세처럼 대통령이라는 명칭 대신 이름 석 자가 곧 절대 권력의 상징이던 시절인데 어려서 몰랐나 보다. 신기하게도 그 아버지의 후광 덕에 세계적으로 드문 여성 대통령이 되었지만, 탄핵 인용으로 임기를 다 못 채운 딸은 지금 국가시설에서 무상급식을 받고 있다.
1984년 10월. 마포대로를 통과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해외 순방 행사에 일회용 태극기를 흔드는 수많은 환영인파의 한 명으로 동원되었다. 그날 오후 수업을 모두 제치고 대낮에 학교 밖으로 나가 우리처럼 동원 나온 이웃 여학교 학생들의 희멀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과중한 학업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어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1987년 6월. 민주화의 봄이라고 부르던 시절인데 향긋한 꽃향기 대신 알싸한 최루탄으로 평생 잊을 수 없는 자극적인 향기를 꽤 오랫동안 맡을 수 있었다. 다음 해 논산 훈련소에서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가스실을 구를 때에도 저녁 아홉 시만 되면 같은 얼굴을 반복해서 보여주니 아버지보다 더 친근감이 들었다. 춘추전국시대도 아닌 20세기에 자신의 손으로 머리에 왕관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얹은 군주가 자신은 전 재산이 29만 원뿐이라고 했다. 가진 것에 비해 매우 풍족해 보이던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대통령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한 개인이 그의 인생에서 떠올리는 순간들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