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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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라고 하면왠지 한때는 고왔을 터인데 생계를 위한 고된 농사일로 주름지고 투박해진 손으로 어린 손주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허리춤 주머니에서 사탕을 내미는 모습이 그려질 것 같다그러나 할머니에 관한 우리들의 기억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사실 그럴 수도 없다여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자 어른의 이야기를 주제로 여섯 작가가 저마다 다른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분명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보냈을 할머니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혈육들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세월의 무게에 반비례하여 흩어지는 존재감이 아닐까 싶다.


할머니의 존재를 소재로 한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필자는 늘 황동 비녀로 쪽 찐 머리에 옥색 치마와 흰 저고리를 즐겨 입으시던 외할머니를 떠올렸다경북 왜관에 사시다 열여덟 꽃 같은 나이에 연애도 아닌 중매로 김천으로 시집을 오셨고 당시 교정 공무원이셨던 외할아버지와의 사이에 일곱 남매를 두셨다할머니는 당시 평균적인 여성 신장의 기준보다 키가 매우 크셨고 인근 마을에서 일부러 키 큰 새댁을 구경하러(?) 오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취학연령에 아직 닿지 않았을 무렵 필자의 아버지는 청주에서 과수원과 농장을 하셨다당시는 수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우물을 긷고 호롱불을 사용하며 제대로 된 가옥도 없어 황토 흙벽 집에서 생활했다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외할머니는 둘째 사위네 식구들을 보살피느라 함께 지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도심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어머니는 농사일이라면 머리부터 내저으셨기 때문이었다.


아련한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필자의 생명의 은인이시기도 하다당시 농장의 부엌은 전통 한옥식으로 지어져 어른 키의 1/3 정도 되는 층계참을 내려서야 했다층계 바로 옆에는 저녁참으로 잡아놓은 닭과 오리의 털을 뽑기 위해 끓여 둔 물이 커다란 가마솥에 가득했다새끼 원숭이처럼 빙글거리던 부엌 문짝에 올라타 장난을 치던 필자는 그만 손이 미끄러지면서 가마솥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순간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던 외할머니는 놀랄 새도 없이 필자를 바로 건져 올려 우물가로 달려가셨고 온몸에 뜨거운 김을 내뿜던 외손자에게 찬물을 들이부으셨다단 몇 초만 늦었어도 전신 화상을 입었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그날 저녁 내내 부모님의 눈에서 뿜어나오는 레이저 광선을 피해 할머니의 옥색 치마 뒤에 숨어다녀야 했다말썽꾸러기 손자에게 피난처가 되어 준 그 옥색 치마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큰 키에 비해 일찍 허리가 굽으셔서 유난히 구부정한 모습의 할머니는 심한 사투리로 말씀하셔서 서울 토박이인 손주들과 가끔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셨다치약이 귀해 굵은 소금으로 양치를 하던 시절에도 그 흔한 충치 하나 없이 건강한 치아로 사셨고 일가친척이 다 모인 자리에서 여든다섯 천수를 누리다 가실 때 임종했던 순간이 늘 기억난다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세상의 모든 손주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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