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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 일상, 그리고 쓰다
박조건형.김비 지음 / 김영사 / 2018년 9월
평점 :
캘리그라피를 취미로 하면서 '드로잉'을 좋아하게 됐는데, '일상 드로잉'을 가끔 따라해 본 나는 이 책이 단순한 일상을 그려내는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치고서는 '어, 내가 생각했던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 같다.
‘일상 드로잉’은 말 그대로 일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짤막한 글 한 줄을 보태면 더 좋다. 이 간단한 기록은 오늘도 잘 살아 내느라 고생한 나에게 쓰는 격려이자 내 생에 가치를 더하는 가장 쉽고 정성스러운 수고이다. 완독하고 나니 어떤 의미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 책은 열악한 노동 현장, 25년간의 우울증, 성소수자의 삶, 가족, 결혼 등 두 사람을 둘러싼 여러 일상의 면을 특유의 따뜻하고 유쾌한 시각으로 그려냈다. 생계를 위해 펜보다 폐유를 만지는 날이 더 많고, 멀쩡한 날보다 상처 입어 찢어지는 날이 더 많지만 그저 오늘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일상이 너무 소중해 기록하지 않고는 배길 도리가 없다고 두 사람은 입을 모은다. 남편은 그림을 그리고 아내는 글을 쓴느 그들의 삶이 잘 녹아들어있어 그들의 삶에 가까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p.81
이 그림을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어쩜 저렇게 황당무계한 그림을 말도 안 되게 잘 그려 놓았는지. 그림과 일상을 가지고 놀며 우리 두 사람은 참 많이도 웃고 또 웃었다.
순간 많은 감정이 거품처럼 솟아올랐다가 사라진다. 8년이면 긴 시간인데,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사진으로도 남겨 놓고 영상으로도 남겨 놓았지만 그 시간에 존재했을 '사랑'을 제대로 붙잡아 두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역시 평소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다. 일상을 기록하는 방법 중에 가장 편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요즘엔 캘리그라피로 함께 남기는 습관이 조금씩 생겼다. 그냥 사진보다는 뭔가 더 특별하달까. 아마 작가도 직접 그림으로 남기는 드로잉이 본인에게 가장 특별할 것이라 생각된다.
p.119
우리의 삶도 그럴까? 오래 살다 보면 익숙해지고 요령이 생기는 걸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앞에 나만의 길과 틀을 찾아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지.
그날 신랑은 복잡하게 꼬인 계단을 그렸고, 나는 그걸 그리고 있는 신랑을 사진 속에 담았다. 신랑은 그 사진도 나중에 그림으로 그려 남겨 놓았다.
박조건형의 드로잉도 좋지만, 소설가인 김비의 글도 참 좋았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글 속에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에 대한 마음이 너무도 잘 드러난다. 좋아하는 감정은 얼굴에서 숨길 수 없다고 하는데, 작가들은 글에서 숨길 수 없나보다.
p.127
다른 남편들처럼 신랑도 마트에 가는 걸 별로 즐기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마트에 가는 일을 즐거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 달에 한번 혹은 퇴근하다가 내가 이야기하면 식자재를 사기 위해 함께 마트에 간다.
p. 173
남편의 노동에, 아내의 노동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을까? 혹시 통장에 찍히는 숫자 몇 개로만 그 의미를 파악하며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책을 읽다가 나의 일상과 공통된 점을 발견하고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면 무척 반갑다. 위에 구절을 읽을 때는 어쩜 우리 신랑과도 저리 비슷할까라며...웃음이 났다. 그러면서도 우리 일상과 비슷해 짠한 마음도 있었다.
p.263
우울증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눈에 띄지 않고 최악으로 내몰린 경우만 뉴스에 나오면서 더욱더 우울증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심화되는 것 같다.
이렇게 고생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삶을 그림으로 기록한 성공 케이스로, 신랑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쉽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인데, 솔직하게 용기내주어 멋진 책이 나왔다. 그들의 일상을 통해 공감도 하고, 위로도 되고, 또 나또한 용기도 얻게 되었다. 많은 일상 드로잉이 들어있는데, 많은 독자들이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