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랑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11
윤이형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소운은 그대로 서영을 보고 있었다. 눈에도, 입술에도,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다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고, 거기에 천천히 미소가 깃들었다. 소운은 조금 더 기다렸다.서영이 대답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방금 일어난 일이 확실하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것처럼, 그리고 서영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소운이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서영을 끌어당겼다. 우정의 징표처럼, 평온하고 고요한 호의의 표현처럼 내내 맞잡고 있던 손이 풀리고, 다른 두 손이 서영의 두 빰을 감쌌다. 소운의 입술이 서영의 입술을 찾았고, 발견했고, 놀랍게도 그 앞 허공에서 잠시 멎었다. 서영 씨,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속삭였다. 내가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는지, 알아요? 어젯밤에, 그리고 그전부터.. 처음 본 순간부터 이러고 싶었어요. 이렇게 될 줄, 나는 알고 있었어요, 처음 본 날부터. (p169)


퀴어 소설. 그렇다. 이 소설의 장르는 퀴어이다. 여성과 여성의 사랑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과정으로 흘러가는지 심리적 묘사가 곳곳에 감춰져 있다. 소설 속 주인공 한서영은 자신에게 팬이라 자처하는 소운이 보낸 편지 하나에 이끌리게 된다.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스테디 셀러로 꾸준히 팔리는 책 <스틸라이프> 시리즈를 쓰는 한서영은 소설 지망생 소운을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과 마주하게 되었다. 


서영은 들키고 말았다. 소운이 보낸 편지에는 서영이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내면에 대해 채워 나가고 있다. 서영은 나체가 되어버린 자신의 내면 속에 자리하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열등감을 그만 소운에게 들켜버렸다. 흔들릴 수 밖에 없었고, 그러면서도 궁금하기도 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만으로도 작가에게 힘이 된다는 사실은 서영도 알고 있었고, 소운은 그걸 서영의 은밀한 실체를 알고 있었기에 서영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다.


소설을 쓰는 소운이 가지고 있는 내공은 서영이 가지고 싶었던 내공이었고, 떠다른 우월감이다. 스스로 소운이 내미는 유혹의 손길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소운의 용기를 거부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그것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걸 서영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자신조차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유혹에 이끌릴 만한 가치가 있다. 사랑이란 그런 거다. 그것이 이성간의 사랑이던지, 동성간의 사랑이던지 말이다. 소운이 내미는 손길이 또다른 사랑의 형태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넘어서는 안되는 금지된 경계를 서영은 넘어 버렸고, 두 사람은 작가로서 서로에 대해서 은밀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 안에 감춰진 인간의 불안과 걱정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작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스스로 설정해 놓은 한계, 감추고 싶었던 것, 설랑으로서 자신의 존재감, 소운이 설정해 놓은 소설 속 스토리의 또다른 주인공은 사랑하는 존재 서영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