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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선 ㅣ K-포엣 시리즈 4
허수경 지음, 지영실, 다니엘 토드 파커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7년 12월
평점 :
공터의 사랑
한참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라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dlw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p14)
사람은 살아가면서 흔적을 남긴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태어남은 사랑의 잉태와 함께 하였다.어쩌면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태어나 아기는 사랑 받지 못함에 대해서 분노를 표현하는 건 다연한지도 모르겠다. 태어난 것도 억울한데, 사랑받지 못한 건 더 억울했으리라. 그런 것들이 점층적으로 쌓이게 되면 우리 삶은 점점 사랑은 식어가고, 상실만 남게 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본질적인 사랑에 대해서 시인 허수경씨는 이야기 하고 있으며, 사랑 저편에 어두운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어쩌면 공터가 될 수 있으며, 상실됨으로서 느끼게 되는 또다른 슬픔으로 승화될 수 있다.
이 책은 출판사 아시아에서 나온 책이며, 그전엔 k-픽션을 읽어나갔다. k-poet를 마주하는 그 느낌은 색다름과 독특함으로 다가왔다. 시인 허수경씨의 남다른 시상을 영어로 마주하는 그 느낌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허수경씨의 시구 하나 하나는 한글로 쓰여져 있음에도 어려움 그 자체로 남아있다. 한글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농익은 인생을 더하면서 그 의미는 점점 더 심연으로 빠져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인생에 숨어있는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그 안에 감춰진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 숨어있다. 시 곳곳에 상실과 허무함, 허망함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은 아닐 듯 싶다. 불쾌하면서도 벗어나올 수 없으며, 시 안에 담겨진 의미들 속에 감춰진 한국인의 정서를 깊이 들여다 보고 싶어진다. 깊이 들여다 보면 볼 수록 흔들리는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한 잔 술을 마지면서 비틀거리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비틀거릴 수 밖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다.
오래된 일
네가 아를 슬몃 바라보자
나는 떨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어린 연두 물빛이 네 마음의 가녘에서
숨을 가두며 살랑거렸는지도
오래된 일
봄 저녘 어두컴컴해서
주소 없는 꽃옆서들은 가버리고
벗 없이 마신 술은
눈썹에 든 애먼 꽃술에 어려
네 눈이 바라보던
내 눈의 뿌연 거울은
하냥 먼 너머로 사라졌네
눈동자의 시절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
그리고 오래된 일 (p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