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두 번째 작품이다. 20대 초반 그의 사유와 생각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일식에 이어 달이 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히라노 열풍이 불 정도로 인기라는데, 왜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한 걸까 돌이켜 보면, 우리는 히라노보다 미야베 미유키. 무라카미 하루키, 히라시노 게이코와 같은 지극히 대중적이면서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작가들 위주로 책을 읽고 있음이 드러난다. 반면 생각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드는 일본 작가는 선호하지 않는 그런 측면이 강하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그런 고지식함이 도리어 나에게 매료되었고, 그의 독특한 심연의 세계로 바뀌고 싶어진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그의 가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진다.



처음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을 집어드는 그 순간 속상했다. 도서관 책이 아닌 돈을 주고 빌린 책인데, 누가 책에 낙서를 해 놓았다. 원주인이 한 낙서인지 그것이 불분명하지만, 빌린 사람이 낙서를 했다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밑줄쳐진 곳에 눈길이 가고, 낙서가 되어 있는 곳에 관심 가지게 된다. 그건 히라노 게이치로의 생각과 사유가 있는 곳에 놓여진 낙서이기 때문이다. 줄이 그어져 있지 않았다면 건성으로 읽고 지나쳤을 그 문장이 한번 더 읽게 만들고 나 자신을 멈추게 만들어 놓았다.


소설 <달>은 1897년 나라 현 도츠카와 마을 왕선악(?) 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선비라 불리는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서생차림의 스물 다섯 이하라 마사키는 구마노 본사를 향하고 있다. 근대의 모습이 또렷히 느겨지는 소설 속 배경은 바로 우리의 100년전 과거로 되돌려 놓으며, 시간과 배경의 이동은 몽환적인 또다른 세계로 이끌어 가고 있다. 험난한 산길에서 길을 잃어버린 마사키는 그만 뱀(살모사)에 물리게 되었고, 스스로 '반바야시 미츠히라' 라 일컫는 노승 엔유가 머무는 거쳐에 머무르게 된다. 그건 그에게 새로운 무의식 세계로 끌려들어가게 되는 또다른 시간적 이동이다.


스스로 시인이라 부르는 이하라 마사코와 옌유 주지 스님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게 된다. 무의식과 의식, 이 두 가지가 교차되는 그 가우네,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에게 무얼 이야기 하고 싶은 걸까 궁금하게 만든다. 노승은 이 곳에 머물며 딱 한 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비밀 스런 공간이며, 이 소설의 긴 줄거리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말을 부여하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본래는 다른 것이었을 수 있던 것이 말을 부여받아 거기에 부합하는 것으로 변해버리는 감정이 있다. 그 둘 다,깨닫고 보면 같은 것이 아닌가.(p94)


마사코가 머물러 있는 곳, 그의 매일 꿈속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실제, 그 감정은 말을 통해 우리에게 납득되어지고, 그것를 받아들이게 된다. 언어가 가지는 한계를 우리는 인식하고 있으면서 거기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다. 마사코는 자신에게 놓여진 무의식의 실체에 대해 검증하려 했으며, 그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미묘한 말을 건내는 엔유 주지 스님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마사코의 사유의 이동은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작품에서 무얼 이야기 하고 싶은 걸까 알고 싶어진다. 그것이 그의 독특함이며, 그의 개성 그 자체라 할 수 있다.과거와 현세가 교차되는 그 경계선에 서 있는 마사코는 그렇게 자신이 추구했던 것을 끄집어 낸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작룸을 통해 과거에서 이롱의 어떤 누군가의 삶을 끄집어 내려 했다. 그것은 이 소설의 전체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 사람이 남겨놓은 작품은 이 소설을 통해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상상력이 덧붙여져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된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의 무의식이라는 또다른 실체에 대해서 그는 무얼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걸까 헤아려 보게 되며, 그가 모방하려 했던,재현하고자 했던 그 사람이 남겨놓은 작품을 슬며시 흘려 놓고 있다. 


다카코라 했던가. 그 다카코라는 여인의 자태가, 내가 꿈 속 여인의 벗은 몸과 똑같다고 바라본 그 자태가, 스님의 눈에는 노파로 보였던 것일까. 함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스님은 끝내 한마디도 자신의 거짓말을 변명하지 않았다. 스님은 나를 광인이라 생각하셨는지도 모른다. (p117)


"아아, 이제 망설임은 없어요.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하는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오래도록, 아아, 그렇지요, 단 한 순간도 잊은 일 없이, 얼마나 깊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하망하게! 처음부터 이루어질 리 없노라 체념했던 내 사랑, 그것이 지금, 이 무슨 기적인가요, 이루어지려 하네요. 당신은 목숨을 걸고 저를 사랑해 주시네요!"
그녀의 말은 분명하게 와 닿았다. 마사키는 북받치는 눈물에 얼굴을 적시며, 시시각각 어둠 속에 가라앉는 건너편 달을 향해 말을 토했다.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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