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日蝕 (新潮文庫) (文庫)
平野 啓一郞 / 新潮社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저,저기, 태양!"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이변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아무 일 없이 빛나고 있었던 태양이 천천히 검은 그림자에 침식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구름이 아니었다. 태양과 완전히 똑같은 형태를 가진 검은 그림자, 또하나의 검은 태양, 일식(一蝕)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돌연 공포의 빛이 비쳤다. 이것이 재앙으로 비쳤던 것이다. 지상에서는 불길이 연이어 굉장한 소리를 내며 타올라 안드로규노스의 온몸을 삼켜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연기와 불티가 자욱이 날아오르고,불꽃이 선명하게 빛을 뿜으며 춤추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감쌌다. (p161~p162)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이다. 소설의 배경은 1482년 프랑스 리옹이다. 유럽의 교회의 권위가 살아있는 그 당시 프랑스의 사회를 보여주고 있으며, 파리대학에 머물고 있는 수도사 니콜라의 1인칭 서술구조로 되어있다.
파리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니콜라에게 한권의 낡은 책이 들려 있다. 그 책은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헤르메스 선집> 사본이다. 자칭 토마스주의자라고 하는 니콜라는 <헤르메스 선집>의 원본을 구하고자 하였으며, 자신의 거처를 리옹으로 향하게 된다. 이 소설의 전체 배경은 리옹의 사회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 당시 돌을 황금으로 바꿔주는 연금술과 이단, 마녀 사냥의 실체에 대해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관심사와 상상력, 그의 사유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니콜라가 리옹에서 만난 이는 연금술사 피에르 뒤페였다. 소설 속에서 그의 아우라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구체적인 서술 구조에 기인해 황홀스러운 묘사체를 드러내고 있다. 니콜라에게 피에르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자칫 위험한 상황에 놓여질 수 있게 된다. 교회의 권위가 살아있는 리옹에서 도미니크회 수도사에 거쳐를 두고 있으며, 니콜라는 그들의 모습을 면밀히 기록해 나가고 있다.
세상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 상대방과 그 이야기가 전혀 통하지 않게 되면, 나는 새삼스럽게 말이라는 것으로 상대방을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머리가 번잡스러워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를 위해 낭비되는 팽대한 말들이 내게는 너무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때문이다. 내 가슴속에 감춰진 이 체념은, 이해시키고자 하는 정(情)을 쾌불쾌(快不快)의 정에 간단히 연결시키고 만다. 일상적인 단 한 줌의 쾌(快)를 위해 많은 말을 사용하는 것을, 나는 치졸하게 여기는 것이다. 더불어 세상 사람들의 무지가, 그들을 이해시킬 수 있다는 나의 희망을 근원부터 끊고 만다.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교만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심정 탓이었다. 그러나 감히 반박하자면, 이러한 교만은 별스럽게 단지 나라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일 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보다도 훨씬 학식이 뛰어난 이에게는, 나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또한 내 경우와 똑같이 허무한 것일리라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p61)
니콜라는 연금술사 피에르 뒤페가 필요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피에르 뒤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가 황금을 만드는 것, 그의 주변에 있는 책들, 피에르 뒤페가 마술을 부린다는 생각은 그들의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려운 한자들은 모두 피에르 뒤페를 향하고 있으며, 그 언어는 리옹의 주변인물들과 피에르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차별적인 요소가 다분하며, 안드로규노스는 플라톤의 향연이 등장하는 인물로서 , 피에르 뒤페가 재앙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또다른 장치였다. 남성과 여성이 섞여있는 안드로규노스,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히라노 게이치로는 피에르 뒤페를 통해 깊이 투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피에르 뒤페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이 조만간 나타날 거라는 걸, 마녀사냥이 시작되면 피에르만 무사하지 못하며, 그의 주변 인물들도 같이 화형식에 놓여질 거라는 걸, 그레서 피에르 뒤페는 니콜라에게 넌지지 자신의 운명이 마지막이 되는 그 순간, 태양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니콜라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지시하게 된다. 그것인 니콜라가 리옹에 온 궁극적인 이유였으며, 니콜라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는 결국 그것을 얻었으며, 이후 마녀사냥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은 중세 유럽을 가리키고 있지만 결국은 바로 우리들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이단과 배척이 현실이 되어버렸으며, 그들은 교회의 권위를 버리고 또다른 무언가의 권위에 기대며 살아간다. 그 권위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논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피에르 뒤페가 니콜라에게 원했던 것들,지시했해던 것들의 궁극적인 본질은 바로 회피였으며, 사라지는 것이다. 니콜라 스스로 비겁해질 수 밖에 없는 순간과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