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실록으로 읽다 실록으로 읽는 우리 문화재 2
최동군 지음 / 도서출판 담디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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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실록으로 읽다> 는 실록으로 읽는 우리 문화재 시리즈이며, 첫번째 경복궁에 이은 두번째 이야기다. 조선의 궁궐을 소개하고 있으며,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궁궐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본다. 창경궁은 경복궁 다음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 안에 궁궝의 숨어있는 역사는 잘 알지 못한다는 것에 착안해 기획된 역사책이며, 조선왕조실록 안에서 창덕궁과 관련한 역사들을 꺼낸다.


창덕궁을 말하기 전 , 경복궁을 먼저 알아야 한다. 경복궁은 조선이 태조 이성계에 의해 세워지면서, 정도전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궁궐이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이복동생을 죽이기 위해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며, 그 피가 묻어있는 경복궁 대신 자신이 기거할 수 있는 창덕궁을 건립하게 된다. 창덕궁은 태종 5년 1405년 10월 25일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전소되면서 자연스럽게 창덕궁이 조선의 법궁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조선은 법치국가가 아닌 예를 중시한 나라이다.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형조보다 예조가 조선에서 더 우위에 있었으며, 조선은 대표적인 왕조국가였다. 왕조국가는 왕의 정통성을 가장 우선시 하며, 후계자는 전 임금의 적장자를 우선하게 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음에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자신의 다음 후계자로 내세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반면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자신의 후계자로 소현세자의 아들을 내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봉림대군을 옹립함으로서 조선은 또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조선의 궁궐은 현대에는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엔 서로가 연결된다. 창경궁과 종묘는 지금은 따로 떨어져 있지만, 조선시대엔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궁궐은 왕과 왕의 일가 친척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왕권강화를 우선할 수 밖에 없다. 백성의 억울한 누명을 덜어주기 위한 신문고 제도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닌 바로 왕권강화를 우선하기 위한 제도다. 즉 신문고를 악용하는 행위를 조선시대엔 용납하지 않았고, 폐쇄와 회복을 반복했다.


조선의 제도의 근간은 중국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의 궁궐의 모습과 법과 제도는 중국을 따라왔다. 돈화문의 모습을 보면 바로 중국을 모방했지만, 조선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천안문의 5개의 홍예는 정면이 5칸인 창덕궁의 돈화문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황제의 궁궐은 '5문 3조', 제후의 궁궐은 '3문 3조'의 큰 원칙에 따라 건립된다. 조선의 왕은 제후의 위치이기 때문에 '3문 3조'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돈화문은 실제로는 5개의 문을 가지고 있지만, 2개의 문만 열어놓음으로서 겉으로는 5문3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3문 3조'를 따른다. 책에는 돈화문에 대해 기록하면서 중종반정에 대해 나오는데, 중좀반정의 목격자가 바로 돈화문이다. 중종반정은 조선시대 4대 쿠데타의 하나이며, 나머지는 왕자의 난, 계유정난, 인조반정이 있다.


금호문은 창덕궁의 첫번째 서문이다. 금호문에는 궐내각사가 밀집되어 있는 외조와 가까우며, 관리의 출입이 잦은 곳이다. 사극 여인천하에 등장하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금호문이다. 명종때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과 문정완후의 동생 윤원형의 권력 다툼 속에서 을사사화의 빌미가 된 것이 바로 양재역 벽사 사건이다. 익명서를 벽사, 괘서, 방서라는 이름으로 실록에 등장한다.


보물 817호로 지정된 선원전은 태조 이하 역대 국왕의 어진이 보관된 곳이다. 선원전은 조선시대에서 종묘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진 곳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 직전에 들린 곳이 선원전이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알린 곳이다.


이 책의 특징은 바로 궁궐과 사극을 연결시킨다.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를 궁궐과 연결시키면 우리는 감이 오지 않는다. 사극 여인천하, 대장금, 허준, 동이 등등이 나오고 있으며, 궁궐과 사극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사극 동이에 등장하는 숙빈 최씨, 숙종의 후궁 숙빈최씨의 신위가 모신 사당을 숙빈묘라 불렀다. 이후 영조에 이르러 숙빈묘는 육상국으로 개칭하게 된다. 


이 책의 특징은 우리가 아는 역사들을 재복습하게 만든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역사와 그들의 삶, 조선의 법과 제도들을 창덕궁과 연결지으면, 왕와 왕비, 그 밑에 있는 신하들의 삶이 그려지며, 창덕궁에 있는 것 하나 하나 허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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